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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5일 설교

“아리마대 요셉처럼!” (막 15:42-47 “예수님의 장례식” 2021.9.5.)

보리스 콘펠드(Boris Cornfeld)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단다. 그는 ‘스탈린도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한 죄로 강제노동수용소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그의 임무는 죄수들이 병원에서 죽지 않고 일하다 죽도록, 웬만하면 의료카드에 건강함으로 적어서 죄수들을 작업장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 일은 압력이 심해서 그의 의료행위는 기계적으로 형식적이었고, 의사의 양심상 아주 심한 갈등을 겪게 했는데, 한 죄수가 그에게 계속 전도하는 바람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단다. 그런 후에 그는 수용소 안에 있는 비밀기도 공동체가 유일한 의사인 자신과 다른 죄수들을 위하여 기도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의사로서 진료를 정성껏 하기 시작했단다.

그러다가 그는 장암에 걸린 청년을 진료하게 되었다. 수용소의 병원 규칙대로 하면 그 암 환자를 그냥 죽도록 관리만 해야지, 그런 암 환자를 치료하면 그 의사가 처형받게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의사 보리스는 수용소의 규칙을 어기고 그 암 환자를 치료하여 살려냈단다. 그 암 병 환자는 암을 치료받고 물었다. “왜 당신은 이렇게 나를 살리려고 위험한 일을 하였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소?”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단다. “괜찮소.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려고 죽으신 분이 계십니다.” “도대체 그분이 누구요?” 보리스 의사가 미소를 짓고 속삭였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고 보리스 의사는 그 암 환자를 살린 일로 공개처형을 당했단다. 공개처형이 진행되던 그 순간 그 암 환자는 땅에 엎드려 흐느끼며 이런 다짐을 했단다.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최선을 다해 그분을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짐했던 사람이 바로 알렉산더 솔제니친(1918~2008)이었단다. 저는 보리스 콘펠드 의사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의 신앙 양심상 전도적인 치료로 목숨을 건지게 된 솔제니친은 조금 안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암병동’ ‘수용소 군도’라는 소설로도 유명하다. 이래서 삶을 만드는 믿음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멘.

오늘 설교 본문도 믿음을 실행하기 시작하는 한 그리스도인을 사실 그대로 보여 주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43). 주인공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다. 그의 인적사항은 아리마대(예루살렘 서북쪽 100km에 위치한 시골 동네) 출신이고, 존경받는 공회원(유대인의 제사장과 율법학자, 귀족들로 구성된 71명이 입법 사법을 처리하는 최고기관. 대단한 권세자였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메시아가 세울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인), 마 27:57에 예수님의 제자(예수님을 믿고 따름이 상당한 수준급)요 부자였다. 그의 성품은 ‘선하고, 의롭고’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눅 23:50-51). 그렇다면 이 분은 사회적으로 권세 지위가 높고, 부자인데, 선하고, 의롭고, 소신까지 갖춰서 존경을 받았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나라 같으면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누린다고 할 수 있는 부러운 교인이다.

그런데 올바른 성경독자라면 요 19:38도 읽어봐야 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ὤν μαθητης του Ἰησου, ὤν = εἰμί의 현재분사<being> “being a disciple of Jesus” -NKJV-), 요셉은 공회원답게 예수님의 제자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못했던 잠행 신앙인(밤의 신자, 이중 신앙인)이었다. 왜 그랬을까? 요한복음은 그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밝혔을 때 따라오는 시비와 불이익을 생각하면 겁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까이도 멀리도 안 했다(不可近不可遠).

사람이 하는 걱정의 40%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고,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며, 걱정의 22%는 안 해도 그만인 사소한 것들이고,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며, 나머지 4%는 우리 능력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96%나 되는 걱정은 괜히 붙들고 있는 셈이다.

교회를 열심히 섬기시던 권사님이 토요일 저녁에 새로 전도한 교우 집에 심방을 갔단다. 내일 주일예배에 참석하라고 권면하고 함께 기도한 후에 대접하는 간식을 부담스럽지만 다 먹었단다. 밤 9시에 초신자 집을 떠났다.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파지더란다. 걸음을 재촉하였지만 참기 힘들어졌다. 좌우를 살펴보니 은행 365일 자동화코너 밖에 없었다. 얼른 동서남북을 살펴봐도 아무도 없자 급히 자동화코너로 들어가서 자동인출기 옆에 비치해둔 은행봉투를 바닥에 깔고 볼일을 봤단다. 그런데 신앙양심에 민감한 권사님인지라. 은행봉투에 변을 담고 다시 담고 냄새나지 않게 손수건으로 싸서 보물단지처럼 들고 조심조심 집으로 걸어가는데, 웬걸 2인조 오토바이 강도가 지나치면서 권사님이 들고 가던 손수건을 현금뭉치인 줄 알고 낚아채 휑~ 하고 달아나버렸다. 권사님을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깔끔하게 뒤처리를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더란다. 그렇다. 아리마대 요셉도 괜히 겁을 먹고 이중 신앙인으로 살아갔다고 웃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아리마대 요셉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신앙교훈을 챙기자.

1) 당돌히(43)

예수님은 십자가형으로 사망 당했다. 추종자들도 전부 도망갔다. ‘아이고, 내가 예수 제자인 것을 숨기기를 잘했지. 공개했더라면 망신만 당했겠네.’ 이제 다 허망하게 끝난 상황에서, 그래도 양심에 부담되면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을 시키면 됐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무슨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로 다 밝혀질 텐데, 예수님의 장례를 본인이 직접 자원했다. 레 21:11에 “어떤 시체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라고 했다. 집중비난을 당할 게 뻔하고 공회원 자리도 위험천만하였지만 다 감당하겠다는 결단을 했던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을 ‘당돌히’(τολμαω 톨마오 to presume, make up one’s mind, more boldly, more confidence)라는 말이 설명해준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서울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들의 무덤을 보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동과 감사에 사로잡히게 한다.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불과 출생 7일 만에 세상을 떠난 아기가 있고, 입국 9개월 만에 질병으로 25세에 죽은 여선교사 루비 켄드릭의 묘비에 “내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칠 것입니다.”라고 써 놓았다. 그들은 머나먼 어둠의 조선 땅에 아기와 아내와 남편 그리고 마침내 자신도 묻히면서 끝까지 희생전도를 하였다. 그래서 오늘 우리를 천국백성 되게 하였다. 우리는 복음을 시인할 자이다.

2) 저물었을 때(42)

και ἤδη οψιας γενομενης επει ἦν παρασκευη 카이 에데 오피아스 게노메네스 에페이 엔 파라스큐에

and/ already/ evening/ being come/ since/ was + ing/ preparation. 신 23:21(시체를 그 날에 장사하여).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6시간 후 오후 3시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유대사회에서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6시부터 시작되면 어떠한 일도 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장례는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 3시간 안에 끝내야 했다. 이토록 긴박한 시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서 시신인도(屍身引導)를 허락받아 장례를 마쳤다.

사람은 죽을 때 대부분 진실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지기 직전에 이런 말을 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기도는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버린다면 하지 않겠지요. 예수님의 최후기도 속에 분명한 진실이 있다. ➀ 살아계신 아버지가 있다. ➁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죽지 않는다. ➂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아버지 나라로 옮겨간다. “맞다! 나도 죽으면 예수님처럼 아버지 나라로 가겠구나. 죽으면 끝이 아니구나.” 본문 43절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했다. 요셉은 예수님의 최후기도를 듣고 천국확인! 천국확신이 “당돌히”를 하게 하였다. 그러한 요셉을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고 미련하다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인 것이다.

3) 무덤(46)

요 19:38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을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Μετα δε ταυτα After/ but/ this things. 이러한 일들 후에 = 예수님의 십자가형 때 있었던 일들, 특히 숨진 장면들! 믿음의 확신, 진보가 이뤄진 것).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확신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자. 천국이 없다면 숨지는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 영혼을 부탁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허락받아 정성껏 세마포로 싸서 자신을 위해 마련한 새 무덤(요 19:41)에 장례했는데 이게 말씀성취에 동참함이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올바로 정통할 필요가 있다는 중론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이중신앙을 고치는, 그런 강력한 권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예배당만 오면 성도가 되고, 예배당 밖에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교인들에게 특효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 고후 5:15에 있는 말씀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십자가를 정통하면, 정말로 주를 위해 사는 성도로 변화되고 이게 성경이 말해주는 회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장례식을 목격하였다. 우리의 마음판에 뚜렷이 새겨지는 게 있다. 아리마대 요셉의 ‘당돌히’이다. 그 당돌한 결행이 니고데모의 잠행신앙을 깨웠다. 요 19:39을 보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 쯤 가지고 온지라.”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도 바리새파 출신 공회원이었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상담한 일을 기록해 놓았다. 그러니 요셉의 결행은 ‘상승효과’(Synergy Effect, ‘나비효과’)를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도 믿음을 깨우고 相生케 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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