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6일 설교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4-18 “예수님의 대 위임명령” 2021.9.26.)
하이랜드 파크 침례교회(Highland Park Baptist Church)는 한때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로 잘 알려진 성서침례교회였단다. 담임목회자 리 로버슨(Lee Robertson) 목사님이 1942년부터 1983년 4월 은퇴할 때까지 40년 넘게 목회하는 동안에 테네시 템플 대학과 테네시 템플 침례교신학교를 세웠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6만 명이 넘었다. 1년 평균 1,500명 정도라면 엄청난 전도였다. 하지만 그 교회가 세운 학교는 지금 유명무실(有名無實)해졌고, 교회도 희미해졌다. 영향력이 가물가물해졌기 때문이다. 그 원인의 하나는 리 로버슨 목사님의 대화에 나타나 있다. “하이랜드 파크 침례교회 교인 가운데 5%가 한 영혼이라도 그리스도께 인도한 경험을 나는 의심한다.”(I doubt that five percent of the members of Highland Park Baptist Church have ever led a soul to Christ).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전도하는 교회 중의 하나였을지라도, 그 교회의 95%는 단 한 사람도 전도한 적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교회의 미래를 미리 보여 주고 있었다.
2006년 8월 1일, 리 로버슨 목사님은 은퇴한 지 23년 후 96세 때 교회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단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하이랜드 파크 교회의 교우들과 다른 교회들에 속한 친구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데이지 호우즈라는 키 작은 부인이 가르쳤던 주일학교를 통하여 14살 때 구원받았습니다. 나의 최종 목회지는 하이랜드 파크 침례교회인데, 40년 6개월간이었고, 지금 96세까지 계속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장 큰 기쁨은 잃어버린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구원받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지만 더 큰 축복들이 따름으로 영광된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 나는 우리 장래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이 몸을 떠나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장차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런 복된 일들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리 로버슨 목사님은 이 편지를 쓰시고 약 8개월 후 2007년 4월 29일(주일) 새벽 4:45, 97세에 천국으로 떠나셨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 삶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5%에 속하는지? 아니면 한 영혼도 구원하지 않는 95%에 속하는지? 스스로 점검해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본문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혼전도를 무척 강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설교본문은 빗나가는 이해를 예방하려고 ‘그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후에’는 이전에 특별한 사건이나 시간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특별히 인본주의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 막달라 마리아로 변화되는 사건을 암시해준다. 막달라 마리아의 일 후에 함께 모여 음식 먹는 열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나타나사’ εφανερωθη 에파네로쎄 Aor, pass. φανεροω bring to light, to manifest, evince. 열한 제자들이 나름대로 이해하는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님.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의도와 수준에 알맞게 주목시키심!).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믿음에 의심이 섞인 때였다. 그리고 노아와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모두 믿음생활에 관한 삶이다. 로마서 1장 17절의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생활한 게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한때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천로역정은 존 번연 자신이 깨달은 믿음생활을 설명해 놓은 책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 삶을 크게 두 종류로 보여 주고 있는데,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제자들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비관하는 믿음생활이라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확증하는 삶이다. 예루살렘으로 갔던 제자는 엠마오로 터벅터벅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180°로 돌아섰다. 이게 올바른 믿음 삶이다. 옛 삶을 끊는 것,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믿음도 개인마다 다르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똑같은 믿음수준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교회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교회에 다니기만 하지 생각이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교인이 있고, 교회생활에 익숙해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자가 있으며, 성령의 보혜사 되심에 순종하고 감사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는 성도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11제자들은 하나같이 십자가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돌밭’ 같은 믿음수준이었다.
자 그러면 이런 한심한 믿음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무슨 일을 왜 하셨는가?
1) 꾸짖음(14)
11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꾸짖으셨다. 그런데 꾸짖을 그 시간이 “음식 먹을 때”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 비스듬히 기대어 편안하게 먹는 습관이 있었다. 우리 선조들도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든다.”라는 속담을 남겼다. 아무리 순한 동물도 먹을 것을 방해하면 맹수로 돌변한다. 먹는 것은 생존의 본능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걱정시키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식사자리에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다(ὄνειδιζω 오네이디죠 rebuke, upbraid. 징계 수준으로 책망하심). 왜 그랬을까? 체하고 토하라고? 꾸짖은 내용은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동료인 두 제자의 증언을 들었을 때 역시 믿지 않았다. 완악함은 믿음을 없게 하는 이유이다. 완악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가리키는데 교훈이 달라붙지 못하고 튕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튕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제자들의 튕기는 마음을 꾸짖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믿음 없는 제자들을 정죄하심이 아니라 교정(矯正)하심이었다. 꾸짖음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었고 궁극적인 변화이었다. 그런데 11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던 세상에서 그래도 하나님의 그 아들을 믿었고, 택하심을 수용했고, 보내심을 위한 제자훈련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형벌에 순종함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부활의 증거를 불신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불신은 정죄의 심판보다 교정을 위한 꾸지람이 더 필요하다. 교정만 되면 장차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셨다. 잘 교정된 마음을 눅 8:15에 이렇게 밝혀놓았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교정시키심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아멘.
2) 전파(15)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과 완악한 마음을 책망으로 교정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로 시작해 그들에게 대 위임명령을 선언하셨는데,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였다. 이것은 은혜요 큰 축복이었다. 제자들은 의심을 해봤던 경험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확신도 없는 진리를 큰 소리로 우기거나, 맹종을 강요하거나, 거짓된 축복을 미끼로 충동시키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라고 듣든지 아니 듣더라도 “복음의 시작”(αρχη 아르케 beginning, to be first, head, chief, originally, wholly)을 밝히 증언하였다. 단지 감정의 변화를 유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기회를 마련했다. 이 역사는 반드시 성령의 보혜사 되심으로 됨을 체험했기 때문에 자신의 재주나 실력을 의존하지 않았다. 오직 “온 천하”로 찾아다니며 흑인이든 백인이든, 신분이 어떠하든지, 어떻게 살아왔던지, 아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로 이루신 일을 전하였다. 그 반응을 하나님께서 확인하시고 그의 운명을 결정하시는데, 전파한 내용을 시인하고 따르면 천국백성으로 삼으시고, 무시하며 거절한 사람은 지옥으로 버리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생명길이고 진리인 것이다. 아멘.
3) 표적(17)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며 세례를 받으면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해주신다는 것이다. 그 보증은 4가지인데,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독의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을 낫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적적인 표적들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에게 나타남으로 서로의 믿음을 확증시켜주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음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실례는 사도행전에 수없이 많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 기적적인 표적들을 잘 정리해 놓았다. 특히 주의할 점은 이러한 표적들은 연습이나 훈련으로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복음증거를 위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후원방법이었다. 그런데 온전한 것이 오면 기적적인 은사들은 그치고 폐하시며(고전 13:8-12), 기적적인 표적을 나타내시거나 폐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명심할 일이다. 아멘.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면 비겁하고 분별력이 없는 교인이 된다. 베드로는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약속과 천국 열쇠까지 받았지만, 십자가 때 구세주라던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며 배신하였다.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참으로 비겁했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위대한 왕 정도로 알고 추종하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는 전혀 아니므로 분별력이 없는 신앙인은 고난의 현장에서는 여지없이 배신한다.
이사야 32장 15절에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고 언약하셨다. 황무지가 좋은 밭으로 변화하여 곡식을 풍성히 맺고, 메마른 마음과 영혼에 성령이 임하면 변하여 지각과 권능이 생기고 환해지고 순수해져서 환란과 방해 중에도 풍성한 순종과 충성을 해내는 신앙생활을 해간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다.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하면 인본주의로 살아가지만,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권능으로 신본주의로 순종한다. 아멘.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예수님은 네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 믿음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세상을 만드는 게 명품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