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9일 설교
“듣고 믿습니까?” (막 16:9-14 “부활 신앙인” 2021.9.19.)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단다. 노래 제목의 ‘아니마밈’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인데, 이 노래는 소름 끼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들이 작사 작곡한 노래인데, 이런 내용이란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께서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하지만 자기 동료들이 호명 당한 후에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어나자 그들은 노래가사를 덧붙였단다. “그런데 때때로 그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하지만 그 수용소에 갇혀 있던 젊은 유대인 외과의사는 이 노래를 거절했단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 이다.”(시 139:8-10)라는 말씀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동료들은 수용소에 갇혀서 언제 가스실로 불려갈지 몰라 죽음을 받아들인 듯 체념하고 깊이 잠들어버린 밤중에 그는 홀로 일어나 날카롭게 갈아 둔 유리조각으로 피를 흘리면서 면도를 했단다. 다음 날 나치군병이 그의 방에 들어와서 사람을 골라 가스실로 데려갈 때, 수염 하나 없이 소망 찬 눈빛을 가진 청년을 보면서 차마 그를 사망의 가스실로 데려가지 못하고 매번 다른 사람을 데려가더란다.
그러다가 전쟁은 끝나고 그 의사는 최후생존자들에 포함되어 풀려나, 수용소의 정문을 나올 때 그는 아니마밈의 노래를 이렇게 고쳐 불렀단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두른 사람들은 믿음도 포기한다.” 나중에 세상에 공개된 그의 일기에 이런 말을 써 놓았더란다. “고통 중에 죽음을 선택하기는 가장 쉬우나 가장 게으른 방법이다. 죽음은 이렇게 서두를 것이 못 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 보려는 부활의 의지, 이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그는 스웨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살면서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친척들을 불러모아 고친 아니마밈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생명의 끈을 붙잡았던 그 이유의 확신을 중간중간 확인하는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 의사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정신의학자요 의미요법(logotherapy)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확신하는 바를 실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오늘 설교본문도 아주 심각하게 보여주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0-11).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11제자를 가리킨다. 충격적인 점은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인데 13절에도 반복하며 폭로하고 있다.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들은 마치 팽팽한 줄다리기를 연상시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증인과 자신들이 손수 만나본 게 아니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무리 직접 만나봤다고 증언하지만 믿을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는 모습이었다.
현재도 이러한 전도 씨름은 계속되고 있어서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는 전도를 믿으려 하지 않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예수님의 재림심판도 다 듣고, 어떤 이는 교회에 등록도 하고 설교도 듣고 교회봉사도 한다. 그런데 단지 현실 삶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그렇게 믿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여전히 엿새를 살아가면서 따로 교회생활을 더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여러 정황 속에서 부활신앙으로 어떻게 살아갔는지 선명한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단테가 안내자의 인도를 받으면서 천국과 지옥을 쭉 둘러보는데, 죽을상을 하고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천사가 이렇게 설명했단다. “저들은 천국에서 거절당하고 또 지옥에서도 거절당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사탄도 좋아하지 않고 미지근하게 살았기 때문에 양쪽에서 버림당한 것입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생각나는 말씀이 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 4:15). 막달라 마리아처럼 갈리리부터 십자가형벌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소유로 섬겨도 부활 신앙인이 전혀 아닐 수 있고, 또 12제자들처럼 그물과 배를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해도 부활 신앙인과 강 건너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부활신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랑 같이 설교본문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보자.
1) 먼저 보이시니(9)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일곱 귀신을 치유 받았다. 일곱은 완벽함을 의미함으로 귀신의 노예였음을 말해준다. 일곱 귀신이 끔찍한 지배라서 우리 할아버지들은 ‘미친년’으로 부르면서 조롱하고 무시했다. 그런 처참한 인생에 웃음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녀에게 얼마나 고마운 은인이었겠는가! 누가복음 8장 3절에 그는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을 도왔다고 했다. 감사를 간직하고 있는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참으로 예수님이 고파서 십자가 형장까지 따랐고, 안식일이 지나자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을 만큼 예수님께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
그렇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다놓았다가 그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κλαιεις 클라이에이스 현재형 2, 단수. 11절의 ‘울고 있더니’ κλαιουσα 클라이우사 현재분사 ‘울면서’ εκλαιεν 에클라이엔 미완료. 계속 진행. κλαιω bewail)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안타깝다.
그런데 18절에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80도로 변화됐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17절에 해답이 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 가서 이르되 ... 올라간다 λεγει αυτη ιησους μη μου ἅπτου<Do not hold on to me. -NIV->... πορευου ... εἰπε ... αναβαινω 현재형 동사<레게이, 포류우, 에이페, 아나바이노> 지금 진행 중! 핵심은“가서 전하라<go and say> =“와서 보라<come and see 1:39. 요한과 안드레를 제자삼는 방법!> 지금 당장! 내일도 다음도 나중에도 아님. 깨달음이 있는 만남이 중요함).
2) 다른 모양(12)
시골로 갔던 두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찾아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였는데, 그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밝혀놓았다(“가리어져서” εκρατουντο 에크라툰토 미완료 수동태 κρατεω to hold fast, seize, grasp. 생각이나 의식, 觀에 지배당함). 그러면 부활신앙의 결함은 왜 생기는가?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아니다.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다”(διανοιγω 디아노이고 to open, explain, expound.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그래서 천사는 7절에서 여자들에게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라고 전했던 것이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던 현장이었다. 예수님은 복음훈련을 처음부터 새롭게 그리고 철저히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3) 완악함(14)
“마음이 완악한” σκληροκαρδια 스클레로카르디아 hardness of heart, perverseness. 외고집.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러니까 지각이 작든지 없어서 분별을 못함으로 하나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영생을 몰라보는 교인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례를 보자.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 이다.”(막 8:17-19). 떡 바구니 열둘은 오병이어 기적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보았고 들었으며 기억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수박 겉핥기’(走馬看山 대충 보았지 진짜 알 것을 보지 못함. 성경읽기를, 설교듣기를, 예배드리기를...).
미국에서 1년 소득 25만 불 이상(3억 원) 되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25만 불이면 한 달에 2만 불 이상(2천 300만 원) 되는 큰돈이고, 상당한 고소득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재미있는 질문이 있다. “만약에 당신이 천국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를 투자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최고액을 써낸 사람이 64만 불(7억 5천만 원)이었다는 것이다. 천국을 너무나 대충 들은 증거이다. 성경은 부피보다 핵심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이제 오늘 설교를 정리하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아침에 11제자들이나 열성지지파 여인들은 뭘 했나요? 그들은 무덤 앞에서나 집에서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고 있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그들 중에 단 한 분도 없었고 한결같이 비통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심각함인가? 허탈인가? 충격? 분노? 모두 다 합해도 부족하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진행되고 있다면 최악의 비극이요 바보짓이다. 냉정하게 점검해보자. 양궁의 적색을 맞춘 화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