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2일 설교

“못 박힌 예수를 찾는구나!” (막 16:1-8 “부활하신 아침” 2021.9.12.)

우리의 옛 전통풍속 중에 상여를 매고 장지로 갈 때나 시신을 땅에 묻은 뒤에 흙을 밟으며 부르는 ‘만가’(輓歌)라고 하는 노랫말이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 오리라. 솥 안에 익은 팥이 싹이 틀 때 다시 오랴. 소반 위에 삶은 닭이 나래칠 때 다시 오랴. 한번 가고 못 오는 길 어이 섭지 아니하랴. 북망산 마지막 길 내가 서러워하노라.”

영원한 이별을 하니 너무나 허탈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도 사망을 노래해 놓았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성경은 사망의 허탈함을 통곡하는 게 아니라 사망을 정복하고 승리한 감사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허탈한 사망 앞에서 억지 강탈당함을 몸부림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망을 이기고 찬송을 불러 하나님께 감사한다.

인도선교의 업적으로 여러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하였던 인도 선교사 스텐리 존스(1884-1972)가 이슬람교 신자에게 전도했단다. 그때 이슬람교 신자가 이런 말을 하더란다. “우리는 마호메트를 믿는 사람들이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를 모신 무덤이 지금까지 있지요. 당신들이 섬기는 예수는 무덤 하나 없지 않소.” 그러자 선교사 스텐리 존스가 이렇게 대답했단다. “예, 예루살렘에 있는 성 분묘교회에 가면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고 묻힌 동굴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긴 하지만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이지요. 만약 당신네들이 섬기는 마호메트처럼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일부라도 발견된다면 우리 기독교는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다 이기시고 지금까지 하나님 보좌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근거 중에 강력한 진리는 ‘빈 무덤’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무덤현장을 그날 새벽에 최초로 보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째인,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이 세 여인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생각도 안 했기에,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그 바위를 어떻게 굴릴지 답답하였지만, 막상 무덤에 도착해보니 무덤 문이 열려있었다. 그래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니까 흰옷을 입은 천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 여인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겼고(15:40-41), 십자가형벌도 목격하였다(47 ‘보더라’ εθεωρουν, 에쎄오룬 imf, θεωρεω 쎄오레오 to gaze on, view with interest and attention).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애정, 지지, 의리는 십자가 형장까지 곁에서 은인의 고통으로 함께 아파했다(“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1-3> 자신들이 가진 물질과 시간, 재능을 바쳐서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보답했음). 이들은 인간미가 넘치는 여인들이었다. 다만 문제점은 무덤 입구를 가로막은 커다란 바위를 어떻게 굴려 옮길 것인지 걱정을 태산같이 하는 일이었다. 이 걱정은 열린 무덤 안에 들어가서도 붙잡고 있었다(‘놀라지 말라’ μη εκθαμβεισθε 메 엑쌈베이스쎄, 현재 수동태 명령형. ἐκθαμβέομαι 엑쌈베오마이 awe-struck 두려움에 눌린, 무덤 안에 이루어져 있는 현 실태, 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중). 그 걱정에 뭘 그렇게 관심을 집중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6절을 읽어보면 공감하게 된다(‘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살아나셨고’ ‘보라 그를 두었던 곳’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 있음, 즉 부활믿음의 ‘공백’을 웅변해주고 있음).

예수교를 지탱하는 기본기둥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우리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지만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형으로 대속죽음을 당하셨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예수교는 십자가의 죽음종교로 끝난다.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한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죄에서 구원을 받는 길은 전무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원의 능력인 것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고전 15:17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증언해 놓았다.

꽃 가게를 운영하는 할머니가 무슨 일인지 항상 싱글벙글하였다. 그래서 손님이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내 나이만큼 살면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었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사흘 후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는 괴로울 때 사흘만 기다리자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할머니의 지혜는 부활의 확신에서 온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 예수님이 부활하신 무덤을 나랑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챙기자.

1) 여자들(1)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연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향품을 사서 준비했을까?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지는 때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해지기까지인데, 안식일 동안은 아무것도 살 수 없다. 예수님은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에 숨지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장례식까지 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향품을 사러 간 것이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나요?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이 얼마나 차지했는지 잘 보여준다. 손바닥과 손등처럼 진실한 관심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이다.

어떤 남자는 여성적인 마음일 수 있고, 어떤 여자는 남성적인 마음일 수 있는데, 본문의 여자들은 큰 돌문을 자기들끼리 열 수 없어 무덤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절망을 서로 말하면서도 그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 그들이 절망사항을 이해한 후에 시도했다면 열린 무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믿음의 세계에서 큰 돌문을 여는 여자는 없다. 세상에서 부활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먼저 방해요인을 파악하고 그래서 불가능을 저울질해 보고 시도하기 전에 비관하고 포기한 적은 없나요? 반전하는 인생을 꿈꾸자. 다만 반전하는 인생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시작됨을 잊지 말자.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은 탐욕이다. 일곱 귀신을 치료받은 막달라 마리아(9)는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갔고 무덤도 제일 먼저 찾아갔다가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의 부활현장을 목격하고 결국 최초 부활증인이 되었다. 바로 이렇게 인생반전은 이루어지는 법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좋아하고 따르는 자로 살아가길 주 안에서 축복한다. 아멘.

2) 찾는구나(6)

천사는 여자들에게 잘못 빗나간 믿음 삶을 지적해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ζητέω 제테오 look for, endeavour to obtain, pursue. 너희가 탐욕에 빠져있기에 사망한 예수님을 쫓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예수!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ουκ ἔστιν ὧδε ιδε 우크 에스틴 호데 이데 not/ he is/ here/ behold. 바로 이것이 부활믿음과 차이였다. 우리가 알던 방식의 예수, 우리의 생각 속에만 존재하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부활현장에서는 까무러치게 놀랄 수밖에 없다. 세상과 너무나도 철저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다.

3) 도망(8)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그런데 실상은 여/자들이 도망갔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οὐδενὶ οὐδὲν εἶπον, 아무도 없음에게 to none/ 아무 것도 아닌 것을 nothing/ 그들은 말했다. they spoke, 안 한 게 아니라 말 못한 것을 했음!) 새로움을 기존의 옛것으로 이름을 붙이거나 설명하는 순간 그 새로움은 다시 옛것이 된다. 따라서 여자들은 말할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고, 할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말할 사람이 있지만 새로움을 알려줄 사람이 없었고, 새로움의 말이 실존한대도 옛 방식만 알아듣는 제자들이었다. 여자들은 이전에 자신이 알고 존재하던 세상의 것을 본 게 아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새로움을 설명한들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함” 뿐이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부활의 공백’이었음을 말해준다.

영어에는 ‘미래완료’라는 시간개념이 있다. 예를 들면, “아들이 돌아올 때쯤이면 엄마는 이미 죽으셨을 거다.”(By the time son come back, His mother will have already died.) 이 문장에서 “엄마는 이미 죽으셨을 거다.”라는 이 일은 “아들이 돌아올 때쯤이면”라는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 사실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엄마의 사망이 실존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라는 7절 말씀은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3번(8:31, 9:31, 10:33- 34)이나 예고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당시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못 들었다가 아님).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찾아가 만난 후에야 비로소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 이미 부활사건은 존재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부활사건을 인식하지 못했다. 즉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미래완료'로 항상 먼저 존재하였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후속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사후경험으로 그 의미를 인식한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옛 사고방식으로 들었던 말씀’은 예수님 편에서 이미 존재하는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참으로 안타깝게 빗나간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의 핵심을 간추리자. 마리아 일행은 양심적이고 의리 있게 살아가면서 분명한 믿음 사랑 소망을 향해 열심히 나아갔지만, 믿음중심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였다. 그래서 부활공백에 시달렸고 믿음도 헛것 될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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