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8일 설교
“너희가 보리라!” (막 14:53-65,71-72. “베드로의 배신” 2021.8.8.)
민수기 9:17절 말씀에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광야에서 기온은 낮 동안에 거의 살인적이고, 밤이 되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단다. 그럼으로 낮이 되면 구름이 하늘을 덮어주고 밤이면 불기둥이 하늘에 떠 있던 것은 천혜의 절대조건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반드시 구름과 불기둥을 따라다녀야 했다. 그 절대조건을 벗어나서 생존하는 방법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토록 생존 불가능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구름기둥과 불기둥, 하늘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셨다. 그렇다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철저한 ‘순종훈련’의 방법이요 도구이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삶에 빨간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마땅한 이유도 없는데 교회공동체를 멀리 하고 싶어질 때, 까닭 없이 목사님의 설교가 싫어질 때, 괜히 헌금이 아까워질 때이다. 그럴 때 그냥 혼자 있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된다. 신앙공동체에서 봉사하는 게 복이 틀림없지만, 때로는 그 신앙공동체에서 사소한 일로 상처를 주고받다가 갈등을 겪는다. 그러니 교우가 싫어지고 모임이 부담되기도 한다. 부부나 부자지간도 속상할 때가 있는데 완전히 남남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같이 모였으니 어찌 갈등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러한 갈등이 싫다면 혼자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법이다. 특히 신앙공동체는 교우마다 받는 은혜와 은사가 다르다. 또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교회는 두 세 교우라도 모여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충성하는 게 가룟 유다처럼 비굴한 배신을 예방하는 신앙생활인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신앙 삶에 나타난 빨간 불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54. ‘멀찍이’ ὁ πετρος απο μακροθεν ηκολουθησεν αυτῷ 호 페트로스 아포 마크로쎈 에콜루쎄센 아우투 the/ Peter/ from/ at a distant, far away/ follow, imitate/ him. “Peter followed Him at a distant,” -NKJV- 평소의 베드로답지 않게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언제나 주님을 가장 가까이 따르려던 베드로, 풍랑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에게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뛰어들었던 베드로였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현장에서 이상하게 멀찍이 따라가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현장을 보자. 시간은 밤이었다. 예수님은 체포당했고,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베드로도 그 무리에 끼어있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누군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럴 때 말조심, 몸조심해야 할 분위기였다. 멀찍이 따라가면 장점이 있지요. 상황 따라 얼른 따라붙어 소속할 수 있고, 또 불리하면 모른 체 하고 물러나 몸을 숨기기 좋다. 이런 요령주의를 성경은 미지근한 믿음이라 하였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저와 여러분의 믿음생활은 차가운 머리이고, 뜨거운 가슴이길 축복한다. 아멘.
일부러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교인들이 흔하다. 숨어서 신앙생활하기 좋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인의 단점이 무엇인가? 전도되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신앙색깔이 선명치 않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멀찍이 떨어져서 하면 상처도, 속상함도, 부담도 없을 것 같다. 막중한 사실은 하나님의 사건이 빈약해 리듬감이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은밀한 교제관계를 유지하라).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의 짠맛은 무엇인가? 5:16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옳은 행실들을 보여주고 궁금해져서 찾아와서 믿는 일이 생길 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다. 불신자들과 휩쓸렸을 때, 그들에게 옳은 행실을 분명히 드러내자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향기를 죽이고 있었다.
저는 목회하는 중에 너무 지쳐서 교회를 좀 쉬고 싶어 하거나 쉬는 교인들을 보았다. 물론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 쉬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몇 주 동안 쉬면, 몇 달을 쉬기 쉽고, 몇 달 쉬면 몇 년을 쉬게 되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쉬면서 예배와 기도에 꾸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은 쉬면서도 최소한의 신앙생활은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다시 열심을 내는데 무리가 없다. 마치 식사를 굶고 잠만 자면 그 사람은 병약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 설교본문을 보면 십자가 형장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하였고 베드로만 멀찍이 주님을 따르고 있지만 위험천만하였다.
자 그러면 훈련받은 제자답게 신앙생활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 답은 설교본문에 있다.
1) 뜰 안(54)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그 움직임을 살펴보면, 제사장의 집 뜰 안(54) 아랫뜰(66), 앞뜰(68)이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억지 사형 죄로 몰아갈 때, 베드로는 안 뜰에서 아래 뜰로 그리고 앞뜰까지 예수님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황제등극이 점점 희박해졌을 때 베드로는 여종에게 예수님과 한 패라는 지적을 받고 점점 강도 높게 예수님을 부인하는데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라고 하며 갈릴리 사람들의 사투리 억양까지 밝히면서 한 패라고 다그쳤다. 요한복음은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베드로가 칼로 귀를 잘랐던 말고의 친척(요 18:26)이었다고 밝혔다. 점점 실체가 드러나는 베드로는 맹세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시편 1편을 통하여 그러한 자리는 ‘따르지 아니하며’ ‘서지 아니하며’ ‘앉지 아니하고’ 털고 나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때까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였다. 부인을 시작했을 때 뛰쳐나왔더라면 저주하며 부인하는 비극을 막았을 텐데... 안타깝다!
그런데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은 내 신앙 삶의 허점을 보게 한다. 비교적 안전하면 임마누엘을 당당하게 찬송하다가 불안징조가 생기면 ‘아랫뜰’이나 ‘앞뜰’로 옮기고 거기서 과거의 임마누엘 찬송을 엄중하게 부인하는 짓 말이다. 이것을 우리 할아버지들은 감탄고토(甘呑苦吐)라고 책망했다. 신앙고백이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내가 그니라(62)
계속 이어지는 거짓 증언에 대하여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더니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대답하셨다.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 것” “하늘 구름타고 오는 것”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선포하심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내 불법을 모두 제압할 권능이 충분하셨지만(마 26:53), 오히려 온갖 불법과 악법인 대제사장에게 신성모독 죄로 확정할 수 있는 증거를 제공한 셈이었고, 대속죄일 아사셀 양의 모습으로(레 16장),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사 53:7) 묵묵히 십자가형을 수용하셨다. 그때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분개하였지만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을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던 결정적인 사형증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만장일치로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부쳤다. 기가 막힌 모습이었다.
온갖 불법과 악법 앞이지만 “내가 그니라.” 밝히심으로 십자가를 향해 정면으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정의실현과, 자기신변의 고난을 끊으려고 스승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내 모습과 우리 시대의 가식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보게 되어, 오늘 설교본문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3) 울더라(72)
가야바와 그 일당들은 변호인도 없는 예수를 더구나 정상적인 재판은 낮에만 하는데, 다 무시하고 그냥 하룻밤에 모든 절차를 매듭지어 버렸다. 사실 이들에게 있어서 재판이란 무의미하였다. 왜 그랬는가? 이들은 이미 예수를 사형시키기로 정해놓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어떤 증거를 만들어 사형을 시키느냐가 그들의 고민거리였다. 그러니 이미 사형을 내정한 그대로 거짓증언도 조작하였고, 어떻게든 사형으로 이끌고 가기 위하여 유도심문을 하고 사형을 선고할 근거를 찾아내는 일에 사악한 묘수를 동원하였지만 잘 진행되지 않았을 뿐었이다.
예수님의 십자가형벌은 대제사장의 표적심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61절에 대제사장이 나서서 직접 심문을 하고 있다. 원래 대제사장이 직접 심문을 못하는 법인데도 교묘하게 질문했다. 예수님을 사형시킬 질문은 “네가 찬송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이었고, 신성모독죄를 선고할 함정이었다. 예수님은 아셨다(“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사 50:5-8> 이미 대속제물을 결심하신 예수님이셨다.
그럴 때 닭이 두 번째 울었고, 베드로는 예수님 쪽을 바라봤다. 예수님도 베드로를 측은히 보고 계셨다(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 주님과 눈길이 마주친 베드로!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 실체를 깨닫고 통곡하였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가 배신했다. 하지만 주님과 눈을 마주치자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통곡하고 회개했다. 그래서 눈과 눈을 마주보고 설교를 듣는 예배가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의 뼈대를 간추리자. 대제사장은 십자가형을 위해 쑈까지 했는데, 자신은 비통하다고 옷을 찢었다. 하지만 그것은 금기사항이었다(“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레 21:10). 이토록 악법국가 불법사회 탈법교회가 십자가형 현장인데도, 예수님은 오직 언약성취로 십자가구원을 이루어가셨다. 우리도 닮아가길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