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9일 설교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 15:33-41 “예수님의 십자가 발견” 2021.8.29.)

온 지구의 어두운 시간과 어두운 면적이 100년 전보다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이게 큰일이란다. 그래서 여러 나라가 ‘빛 공해’에 관한 법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도 ‘인공조명에 의한 빛 공해 방지법’이 2012년에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러면 ‘빛 공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인공조명이 급증하면서 자연 생태계에 난조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로등 밑에 있는 벼들은 이삭을 절반도 맺지 못하고, 철새들은 밤에 날아갈 때 본래 달빛과 별빛을 보면서 방향을 잡는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발광체처럼 밝아져서 달빛과 별빛이 사라짐으로, 공중으로 날아가던 새들이 방향을 잃고 빌딩이나 탑에 부딪혀서 죽는단다. 야행성 동물들도 야간사냥에 방해를 당하고, 또 사람은 멜라토닌을 정상적으로 분비하지 못한단다. 멜라토닌은 사람의 눈 망막에 빛이 차단되는 밤에 생기는 호르몬인데, 멜라토닌이 사람의 수면을 가능하게 하고, 잠자는 동안에 인체에 침입한 세균들과 싸우는 저항력을 높여주고, 인간의 암세포도 잡아먹고, 사람의 우울증과 생체리듬에도 좋은 영향을 준단다. 그래서 조사해봤더니, 항상 인공조명에 노출된 여성들이 인공조명에 별로 노출되지 않는 여성들보다 유방암에 걸릴 확률은 무려 73%나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인공조명의 피해에 가장 민감한 분야는 바로 천문학이란다. 천문대는 본래 도시의 불빛을 피해 산속에서 하늘의 별들을 관측하였는데, 이런 것도 ‘빛 공해’인 것이다. 그래서 어두움의 중요성을 깨달은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해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을 때, 6시부터 9시까지 어두움이 임했음(33)을 알려준다. 33절의 6시부터 9시는 유대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이다.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라면 적도에 가까운 중동지방은 태양볕이 하루 중에 가장 강렬한 때이다. 그토록 밝을 때 온 이스라엘 땅에 어둠이 임했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으셨지요? 2000년 전, 갈보리 십자가형 때 실제로 이루어진 어두움은 하나님 진노의 총체였다. 이사야 53장 6절에,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가복음 10장 45절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이런 말씀처럼 정오에서 3시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류의 사악한 죄들을 대신 짊어지고 쏟아붓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시는 시간이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다.” 요한 1서 1:5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이것이 십자가의 진면목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간과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박 겉핥기나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의 핵심을 보았는가? 인간의 죄를 몽땅 맡아 짊어진 죄인됨에 대한 심판형벌이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 심판에 바로 우리의 죄들이 포함되어 있음이 실체이다. 사실 십자가는 죄와 의가 교환된 곳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벧전 2:24)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나니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는 신분과 권세가 주어졌다.

그러므로 십자가형 때 어둠이 임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믿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시인하고 화목제물(롬 3:25-26)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신앙적인 의미의 인공조명들이 모두 꺼지게 되고, 인공조명을 꺼지게 하는 그 어둠이 가득 찬 마음은 천국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관측할 수 있게 한다(39 백부장은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했다고 했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십자가형 때 3시간 동안 임하였던 그 어두움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우리 마음에 그 어둠을 시인하는 것은 천문대의 천체관측을 원활하게 하는 것처럼 어둠을 시인하는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계신 대속의 하나님을 관측할 수 있게 된다(사도 바울이 롬 5:20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역설했음).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애타게 불러도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인공조명들이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관측할 수 없게 한다. 실제로 천국의 보좌에 앉아계시면서 십자가형으로 대속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 만나지 못한다면 성경의 믿음에서 빗나가고, 따라서 예수님 십자가의 화목제물을 믿는 구원도 빗나가게 되어, 하나님의 의(롬 10:2-3)를 이루지 않고 자기 의만 열심히 이루는 안타까운 신앙생활을 고집하게 된다. 그러니 예수님 십자가형의 어둠은 그 실체를 알아갈수록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 그저 감사무량(感謝無量)이다. 아멘.

자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형 때 의미 있는 일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1) 버림(34)

3시간 동안의 어두움이 끝나는 시간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었다. 그때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온 세상의 죄로 삼으시고 그 죄를 처형하는 방법이 버리심이었다. 이 일은 그 거룩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지만 지독한 고충이었다.

그런데 35-36절을 요약해 보면, “듣고 가로되 보라 ... 가만두라... 내려 주나 보자.” 예수님의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추측하였다. 예수님이 아람어로 “엘로이 ελωι”라고 외쳤기 때문에 엘리야를 부르는 말로 착각할 수 있었다(ιδε 이데 behold, ιδωμεν 이도멘 “wait, let us see” -RSV- 이 모습에서 무엇을 보라는가? 그토록 심각한 상황인데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임. 엘리야가 오는지 안 오는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주는지 안 내려주는지. 재미있게 됐다고). 자기들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제물은 꿈도 꾸지 못했고, 예수님을 구경거리로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움, 무감각이다. 예수님을 이처럼 가까이에서 보고 십자가를 목격하는 기회가 일평생 또 있을까? 그렇게 흉악한 삶을 살았던 강도도 진실한 고백 한 마디로 구원받은 것을 듣고 보았지만 무감각했다.

그래서 믿음과 종교적인 호기심은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 교회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보자, 이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오는지 보자, 이 목사는 어떤 설교를 하는지 보자. 신앙 구경꾼은 그들의 영혼이 이미 소경이라는 증세이다. 아멘.

2) 휘장(38)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모세 때 성막을 알아야 한다. 성막은 마당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할 수 있는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다. 바로 그 휘장이 예수님이 숨지실 때 찢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을 중요시하게 되는가? 본래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들어가 제물의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받았다. 다른 사람은 물론 대제사장도 하나님의 법대로 하지 않으면 죽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발에 줄을 묶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잘못으로 죽으면 밖에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질 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이것은 사람이 찢지 않고 하나님께서 찢으셨고, 죄인이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하심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히브리서에 설명되어 있다. 히 9:7 “오직 둘째 장막(지성소)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제물로 죽으시면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열어주셨다. 이제 어떤 죄인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이것을 ‘만인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인제사장의 기도응답이 풍성하길 축복!

3) 백부장(39)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중대장쯤 되는 군인이기에 많은 전쟁을 통하여 사망을 수없이 봤지만, 예수님 같은 죽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백부장은 평범한 사망이 아니라 특별한 사망을 처음 봤고,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향하여’ εξ εναντιας 에크 에난스 against, enemy. “who stood facing him.” -RSV-).

이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올바로 정통하면 하나님을 보게 됨을 입증해준다. 어떤 죄인이라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진실하게 바라보면 감동되고 구원받게 된다. ‘저는 안 보여서 못 믿어요’, ‘몰라서 못 믿네’ 하는 말은 십자가를 정통하지 못한 탓이다. 십자가를 제대로 마주 바라보자. 거기서 ‘나는 너를 대신하여 십자가형벌을 받는 중이니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든지 보든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NIV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우리가 “in this”를 올바로 목격하는 것은 엄청난 은혜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형벌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정확히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 죄인을 위해 대신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런 일을 하셨는가? 이유는 한가지이다. 우리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 이제 십자가형을 집중적으로 성지 순례하였으니 목격한 골자를 챙기자. 우리의 현실은 헬라인의 지혜를 선호하는 풍조가 판치고 있다. 그런데 그게 바로 값싼 복음, 책임 없는 결심, 편한 제자도로 변질한 것이기에 안타깝다. 더 솔직히 밝히면 그러한 빌미를 주는 교회가 많다는 것이다. 본문 33절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증언하여 준다. 천문학자들과 대화하면 비웃음을 당할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지식으로 십자가를 보면 미련한 짓이 된다. 의학은 예수님의 부활을 무지로 보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죄의 대가,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헬라의 지혜로 설명하는 설교가 값싼 복음이다. 값싼 복음이 이미 유행하였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이시다. 십자가의 대속이 없다면 위대한 성인과 다르지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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