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 설교

“그러면 어떻게 하랴?” (막 15:1-15 “빌라도의 재판” 2021.8.15.)

2004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하고 톰 행크스가 주연한 ‘터미널’이란 영화가 있다. 1988년부터 2006년까지 18년 동안,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서 실제로 머물렀던 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Mehran Karimi Nasseri 1942~)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었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인 ‘크로코지아’ 사람이 뉴욕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입국을 거절당했다. 물론 여권과 비자도 있었지만 그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모든 여권을 효력중지 시켰고, 자기나라로 가는 항공편도 전부 잠정중단 되었다. 그러니 그는 자기나라로 귀국도 못하게 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케네디 공항에서 9개월 동안이었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의 억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항의 노숙생활은 생소했지만 점점 익숙해져갔다. 그는 무일푼 되었을 때 짐 운반용 수레를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동전이 반환되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렇게 해서 생긴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면도와 샤워도 공항화장실에서 해결하였다. 그리고 공항서점의 책자와 TV를 통하여 영어를 독학하며, 제한된 공항 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친구로 사귀고, 가끔 공항 내 보수공사 때 노동 잡부로 일하여 돈을 벌기도 하였다.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공항의 노숙생활을 통하여 인생을 교훈해 주고 있었다. 공항터미널은 인간이 잠시 머물다 가는 삶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항터미널은 영원한 세계에 비하면 비교자체가 웃기는 일이나 작고 짧은 인생을 말해주는데, 그 공항인생에서 항상 포기하지 말고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아보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할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해결의 필수는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인데 이게 인생 삶이라는 것이다.

복잡한 난문제들 속에서 산 소망을 찾아내고 기다리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이 참과 거짓으로 판가름 난다는 사실을, 바로 오늘 설교본문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설교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판이 얼마나 불법과 강제강요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계속해서 보아와서 알고다. 예수님을 고발하였던 대제사장 일행은 여러 거짓증언과 유도신문을 통해 결국 신성모독죄를 억지로 결정해 놓았다(“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14:64>).

그런데 설교본문은 “새벽에”(πρωι 프로이 03시- 06시 ‘Very early in the morning’ -NIV-)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71명의 산헤드린(유대인 의회)이 이른 새벽에 모여서 예수님을 사형죄수로 결정하고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일을 얼마나 억지로 서둘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합법적인 회의는 낮에 모여 하는데 새벽에 모여 의논하였다(ποιεω 포이에오 to make, form, construct. “reached a decision” -NIV- ‘의논’보다는 ‘결정’임). 그들은 ‘신성모독죄’를 공식적으로 확정하고 속행하였던 것이다(“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요 18:28. ‘가야바’는 대제사장이고, ‘관정’은 빌라도 총독의 관사인데,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도 새벽이었음!>). 당시 로마제국은 통치하는 지역주민들이 세금을 잘 내면, 자치권을 허락했는데, 그게 산헤드린 공회였고, 사형결정권은 로마총독에게 있었다. 그래서 설교본문 1절처럼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고, 신성모독죄가 아닌 “행악자”로 고발하였다(요 18:29-38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8 빌라도가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발해댔지만, 예수님은 어떠한 반론도 하지 않으셨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변호기회를 주려고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4)라고 물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예수님께서 거짓증언과 뇌물매수, 억지부림과 진실대화는 불가능으로 보신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그리스도인 윤동주 시인이 쓴 시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옥사한 윤동주는 일제말기 대한민국의 독립의식을 불 지른 시인이었다. 천재급 이완용, 이광수가 일제에 넘어가 협력한 실태를 보면서, 윤동주는 일본이 최후발악을 하던 일제말기의 그 가혹한 시국에서도 조금도 망설임 없이 혼신을 다해 독립운동의 시를 썼다. 교회에게 신앙양심을 행동하자는 것이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성령님이 주시는 양심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자는 거였다. 때로는 신앙양심 때문에 손해를 당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예수님의 재판현장도 거짓투성이였다.

자 그러면 오늘은 빌라도를 집중하여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의 신앙양심을 점검해보자.

1) 시기로(10)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그 당시 유대종교의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시기로 예수를 고발한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문제이니 무죄판결로 심증을 굳혔겠지요. 누가복음 23:13-16을 보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무죄확인을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은 올바른 판단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을 때도 흔하다. 특히 자신의 유익과 연결되면 더욱 둔갑한다. 그래서 빌라도도 흔들렸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5가지(듣고, 순종하고, 의를 행하고, 귀를 기울이고, 지키는 것)를 하나님이 요구하신다. 그러니 갖추길!

2) 어떻게 하랴(12)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빌라도의 진심은 이미 무죄판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진심을 가지고 기득권층과 타협하였다. 이게 문제이다. 이 세상에서 ‘정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과 법과 양심에 따른 판단이냐? 아니면 보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앞세운 통치적 판단이냐? 정의의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세상현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역사상 어느 때나 존재하였다. 빌라도가 파악한 사실과 로마법과 자신의 양심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불가였고, 분명히 불의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유대사회의 질서유지와 평화통치를 해야 하는 로마총독이 예수님을 무죄석방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사회혼란을 만드는 현실문제였다는 것이다. 법과 양심에 따른 판단을 행함도 정의였지만, 반면에 유다백성의 들끓은 분노를 평화롭게 잠재워 사회안정을 도모하는 현실통치도 또 다른 ‘정의’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그 갈등을 참고하여 아무리 배려해 주더라도 성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처리한 빌라도의 책임을 분명하게 지적해주고 있다. 요 19:10에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27:24를 보면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빌라도는 분명한 진실을 실천하여 10달란트를 만드는 판결자리에 있었다. 판단자리 획득보다 10달란트로 삶이 축복이다. 아멘.

3) 만족(15)

이러한 빌라도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민주적 절차와 결정’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현실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 빌라도의 선택은 다수의 요구를 잘 수용하여 민주적인 만장일치를 활용한 슬기로 볼 수 있다. 형편이나 민의를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법과 원칙만 강조하면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니, 융통성을 적당히 발휘하여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면 훌륭한 정치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사회에서 보는 ‘민주주의’와 예수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 활용하는 민주적 의견결정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사회에서 사용하는 민주주의 방식이라는 의사결정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만 대중의 생각이 항상 합리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의 평등함이 보장될 때 정의이다. 그러나 소수의견이 존중되는 민주주의는 쉽지 않다. 실제로 전문가집단과 소수권력층의 영향력이 이기적 욕망달성을 꾀하는 정치집단과 결탁하여 쉽게 ‘죄악’으로 변질하는 것을 자유당시절이나 군사정권에서 자주 보았잖아요.

그러나 교회에서 활용하는 민주주의적인 의견결정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이 가능함으로 공동체의 다수가 함께 의논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구약시대에는 특정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 사람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음으로 민주적 절차는 필요 없고 선지자나 제사장의 판별에만 의존하였지만, 교회의 민주적 절차는 결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현하기 위함임을 기억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런데 빌라도는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정의를 실행하지 못했다고 보기 어렵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았고, 시기로 고발함을 알고도,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 현실적으로 자신의 출세와 성공의 연장을 선택하느라고 확실히 무죄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1세기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책에 빌라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빌라도 이 사람은 로마정부에서 유대로 파견된 5번째 총독이다. 그는 잔인했고, 로마정권에 지나치게 아부했으며, 로마황제숭배를 강요했던 인물이다. 그는 출세를 위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총독의 임기가 5년인데, 그는 유대지방을 10년간 다스렸다.” 다 알고도 예수님을 희생시켜 성공을 누렸던 빌라도였다. 사마리아에 터진 민란으로 로마황제가 소환하자, 빌라도는 이제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자살로 삶을 끝냈다. 오로지 출세위주로 사는 사람은 그 출세병 강박관념 때문에 진리도 정의도 휴지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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