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일 설교

“도망하니라!” (막 14:43-52 ‘유다가 예수님을 판 현장’ 2021.8.1.)

언젠가 ‘배신자’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래서 ‘비굴한 배신자’라면 인간쓰레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어떤 짓을 할 때 비굴하다고 단정하던가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한테는 강할 때’ ‘잘못한 언행을 잘못이라고 시인하지 않고 계속 핑계를 대면서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할 때’ ‘힘들게 수고할 것 같으면 바쁜 일로 핑계대고 피하려고 할 때’ ‘양심을 버리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 ‘남의 실수를 흠집 잡아 힘들게 하는 사람’ 등등이다. 그렇다면 비굴의 이유는 학력부족인가? 재물부족? 얼굴이 못생겨서? 아니지요!

야곱은 외삼촌댁에서 돌아오다가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밤새 씨름을 했다. 그 결과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고, 이름도 ‘이스라엘’(“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로 바뀌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여 이기려고 하고, 그것을 ‘잘하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야곱이 했던 씨름기도의 진정한 핵심은 ‘어긋남’이지, 야곱이 소원을 하나님께 관철시킴이 아니었다. 그럼으로 기도하는 중에 우리의 아집이 어긋나고, 우리의 비굴함이 하나님의 뜻에 굴복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 위대한 대화라면, 우리의 원함을 떼쓰는 씨름보다 주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바를 묻고 알아듣는 시간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잠시 잠깐 우리의 뜻이 좌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후에 실현될 축복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교인들이 속고 있는 중에 하나인데, 주일 날 예배당에서 찬양하고, 설교 듣고, 헌금한 후에, 가끔 전도도 하면, 하나님의 자녀생활을 ‘잘 한다’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을 바라고, 독생자 예수님이 천국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죄인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형벌을 받았을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밝혀놓았다(엡 4:13).

오늘 설교본문도 정말로 비굴한 배신자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43). 예수님을 팔아먹을 가룟 유다가 그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밤새껏 기도하시고 직접 선발하신 그 엄중한 12명에 가룟 유다가 뽑혔다.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였다. 자원도 지원도 추천도 아무 소용없었는데 유다가 그 12명에 뽑히게 되었다. 이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사님으로 모시고 배우고 따르는 12사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보람되고 가치 있고 의미 넘치는 인생이 열렸는지! 그래서 3년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돈 가방을 들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목격하였다. 엄청난 특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겼다. 그러니 그는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비굴한 배신자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 위대한 축복인생을 뒤엎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았던 위인이 결국 허무하게 목매는 자살로 끝냈다. 망조인생이었지요.

가룟 유다의 망조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때 선망의 대상이던 목사님이라도 망조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님만 아니라 누구나 그럴 가능성은 있다. 저와 여러분도 언제든지 그렇게 배신할 기회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 지고 충성함이 필요하고 기도생활이 비결이다! 만약에 가룟 유다가 끝까지 신앙양심을 지키고 12사도 반에 남아있었더라면 어떤 인물로 살았을까? 사도교회의 살림을 맡은 착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겠지요. 엄청난 아쉬움을 준다.

제34대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임종 무렵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방문해서 의사는 면담시간을 30분으로 제한했단다. 이런저런 격려를 마치자 아이젠하워가 “좀 더 머물러계시지요?” 빌리 목사님이 “특별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아이젠하워가 신중하게 말하였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마지막 부탁입니다.” 빌리 목사님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간략하게 증언하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면 다 죄인입니다. 잘한 일, 못한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 놓을 수 있는 의는 없고,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그 예수님의 공로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믿음뿐이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 됨을 확증하시고 천국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권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잠시 묵상기도를 하더니 이런 말을 했단다. “빌리, 감사하오. 나는 이제 준비를 하였소.” 그러고 눈을 감더란다.

“준비를 하였소”라는 말은 바로 “나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 듯 당당하게 찬송을 부르지만 실상은 구주를 드높이기보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기대하면서 자기만족 하는 찬양이 아닌지 한번 점검해볼 일이다. 아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침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군을 조롱했을 때, 이스라엘 군병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다윗은 소년이었지만 신앙심대로 용감하게 나가서 골리앗을 꺾었다. 전술 면에서는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었지만 그는 비굴하지 않았다.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지는데도 매일 3번씩 기도한 다니엘, ‘죽으면 죽으리다’라고 기도하고 바사 왕에게 들어간 에스더... 정말로 믿음이 삶을 만드는 성도였다!

자 그러면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가야 비굴할 자리에서 용감해질 수 있는가? 성경본문을 보자.

1) 말씀(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Και εὐθυς ἔτι αυτοῡ λαλουντος 카이 유쒸스 에티 아우투 랄룬토스 And/ immediately/ yet/ his/ speaking. “And immediately, while He was still speaking,” -NKJV-) 예수님께서 아직도 십자가형벌을 말씀하실 때, “열둘 중의 하나”라는 사도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 체포조 일당을 인솔해 왔다는 것이다(철저한 준비와 무장을 시켜서 들이닥친 절박한 상황을 볼 수 있게 함<파송한 자가 모두 복수임> 눅 22:52에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도 직접 따라왔고, 요 18:3에는 로마 군대도 포함되어 있음. 그들은 등과 횃불과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음. 밤 상황에 알맞게 철저히 준비를 하였음!).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생각의 능력, 감정의 능력, 의지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사람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연결되어 있어야,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 밖에 나가 있어서 교제하지 못하면 그런 상태를 우리 하나님께서 ‘죽음’이라고 하셨다. 그 사람의 능력이나 감정, 의지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자동차 벤츠600이라도 운전사가 없는 모양이다. 여러분, 이 이치를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실 화목제물을 말씀하고 계셨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범죄를 하고 추방당했던 그 상실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됨’이고, 그 실상을 ‘죄인’ ‘죽음’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가룟 유다가 그랬다.

벤츠600이 새 차지만 시동을 끄고 차고에 방치됐다면 폐차기능이다. 그래서 아이가 시동을 걸면 그 차는 사고위험물로 돌변한 셈이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지 않아,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는 일이 없을 바에야 차라리 시동이 꺼진 게 낫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게 아닐 바에는 죄인의 의지를 작동하지 않는 게 사고예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제자들의 신앙 삶은 시동을 꺼놓고 ‘위에서 능력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고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다. 성령이 우리의 지식과 감정, 의지에 시동을 걸어야 올바르게 되기 때문이다.

2) 군호(44)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실패를 걱정하고 군호를 짰다(δεδωκει 데도케이 διδωμι 디도미<give>의 과거완료 had given. 예수를 체포할 무리들에게 이미 암호를 준 자가 가룟 유다였다는 것임. 그 암호는 입맞춤이었음. 당시 유대사회에서 입맞춤은 연인이나 친구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랑이나 존경 또는 감사를 표현하는 행위였음. 그러나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가증하고 악랄한 위선행위였음. 물론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하는 짓을 이미 알고 계셨다. 눅 22:48을 보자(“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가룟 유다는 얼마나 초주검이었을꼬? 제자가 스승을 은 30을 받고 팔아넘긴 짓은 웬만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도저히 못한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야비한 속임수로 배신을 작정하였고, 체포할 무리에게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하였다. 이것은 실패확률이 그만큼 크다는 판단이었다. 예수님의 이적행위를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사랑하는 척 입맞춤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세상욕심을 챙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삶을 돌아보자. ‘역시나’인가? ‘전혀’인가? 진실하기를 축복!

3) 칼(47)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요 18:10에는 귀를 자른 사람은 베드로라고 밝혀놓았고, 눅 22: 36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칼 무장을 허락하셨고, 눅 22:38에 제자들은 칼을 두 자루 준비했었다. 그래서 베드로의 칼부림을 언뜻 보아 용맹으로 칭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혈기만 부렸을 뿐이었다. 요 18:4-9를 보면,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러고 예수님은 전지전능하게 귀를 고쳐주셨다(눅 22:51). 이렇듯 예수님은 다 아시고 그러나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스스로 십자가형을 받아들이셨다. 문제는 베드로가 이 모든 걸 보았고, 알고 혈기를 부려 살인미수죄를 저질렀다. 끝내 저주하며 부인했고 제자들은 도망쳤다. 모세 율법에는 종이 자유의 몸으로 집으로 돌아갈 때 주인이 어찌나 인격적이던지 그 은혜를 못 잊겠으면 자원하여 계속 주인의 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자기의 귀를 뚫고 평생 종으로 살았다. 주인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베드로도 칼부림 대신 귀를 뚫어야 정답이었다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말씀의 가르침에 저와 여러분의 삶을 맞추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래서 그는 재물을 얻은 것도 아니고 출세정권을 잡지도 못했다. 더구나 예수님은 배신의 십자가형을 통하여 대속제물이 된다고 평소에 역설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은 12사도의 마음 밭에서 자라지 않았다. 세상탐욕 때문이었고, 기도생략 때문, 사탄조종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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