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5일 설교

“이제 자고 쉬라!” (막 14:32-42 ‘십자가의 기도’ 2021. 7. 25.)

천동설(天動說)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태양과 달, 다른 별들은 모두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학설인데, 2세기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창한 것이다. 그런데 이 천동설은 전능하신 유일신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구에 인간을 살게 하시며 우주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일치함으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진리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을 지구가 아닌 태양으로 보고,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과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순으로 원을 그리며 공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갈릴레오(Galilei Galileo, 1564~1642)는 지동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갈릴레이의 주장을 신성한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갈릴레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를 보내다가, 1633년 로마로 소환하여 유명한 종교재판을 하여 불복종 죄라는 판결을 내리고 3년 동안 금고형을 받게 하였다.

그런데 지동설은 사실상 B.C. 5세기에 필롤라오스도가 주장하였고, B.C. 3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도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지지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하였고 이후에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을 거쳐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커다란 발상전환을 할 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조선 세종 때 이순지(1406~1465)는 월식을 관찰한 후에 월식이 진행될 때 보이는 그림자가 바로 지구의 그림자이고, 그 그림자가 둥근 것을 보니 “지구는 둥글고 해 주위를 돈다.”라고 주장하였단다. 그 당시에 중국이나 조선의 우주관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난다.”)이었기 때문에 이순지의 발상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보다 100년은 더 앞섰다는 것이다( = 1543년 – 1465년).

오늘 설교본문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보다 더 개혁적인 신앙자세가 필요함을 보여주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33-34).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성찬예식을 새롭게 제정하셨다. 그러고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의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셨다. 이때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하였다고 요한복음 17장에 길게 기록되어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 8명을 동산에 머무르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3제자만 데리고 기도할 자리로 가셔서, 예수님은 아주 특이한 말을 하셨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며”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고 하시고 기도하셨다는 것이다(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께서 심혈을 기우려 제자훈련 시켰음. “놀라시며 슬퍼하사”는 마 26:37에 엄청난 고충으로 기록되어 있음. ηρξατο λυπεισθαι και αδημονειν 에륵사토 류페이스싸이 카이 아데모네인 he began/ to be sorrowful/ and troubled<heavy>/ λυπεω의 현재 수동태 부정사 “he began to be sorrowful and deeply distressed” -NKJV-). 예수님께서 십자가형벌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법정에 서서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 됨을 몸소 알아차리셨다는 것이다. 사망 자체를 두려워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퍼붓는 무서운 진노의 고충과 비통함을 실감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기도일수록 현실을 알고 시인하며 간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온갖 병을 고치셨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물 위로 걸어가셨고, 죽은 자들도 살리셨다. 그 전능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우리 인간처럼 연약해지셨다. 십자가 형벌 앞에서 엄청나게 고민하신 모습은 다름 아닌 온전히 인간됨을 입증해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토록 연약해지셨는가? 히 2:17에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또 히 4:15를 보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동정하다’ συμπαθησαι(쉼파쎄나이 συμπαθεω, πασχw<파스코 고난을 몸으로 당함> = 공감, 동정, 동료 의식, 상호 참여. 상대방의 고충을 똑같이 자기 아픔으로 실감하는 것임. “체휼”<體恤 불쌍할 휼, 마음에 피가 흐름>.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 제가 지금 어찌나 눈물 나는 괴로움인지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시잖아요!” 하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기도응답을 놓쳤다(42 “함께 가자 보라” ιδου 이두 ἦλθεν ἡ ὥρα ιδου<41 엘쎈 헤 호라 이두 “The hour has come. Look” -GN->.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연이어 ‘보라’라고 강조하셨다. 예수님이 이미 여러 번 말씀하신 십자가수난이 이제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넘길 가롯 유다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셨다. 기도할 때 고난에 대한 해석과 관점과 대응을 올바로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자 있느냐. 기도할 것이요.”(약 5:13)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필요한 것을 챙기자.

1) 심히 고민(34)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또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33): 예수님께서 어떠한 처지에서 기도하셨는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통과 괴로움, 갈등이 덮쳐왔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겪는 인간의 실상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바쳐야 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그 대속제물은 이제 몇 시간 후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일로 실현될 것인데, 그래서 육신의 고통도 컸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됨이 예수님을 더욱 고민하게 하는 슬픔이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형벌을 생각할 때 슬퍼지고 비통해져 고민되었던 것이다.

시 42:5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고통 중에 기도한다는 것이다. 고난당할 때에 예수님은 원망하거나 방황하고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특별히 자신의 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혼자서라도 집중기도하는 실력을 갖출 때 이게 진짜 신실한 신앙인이다.

2) 아버지의 원대로(36)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기도할 때 온 열정을 다하여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믿음 충만한 기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내 생각과 내 소원을 하나님께 맞추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도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그 뜻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열매가 풍성해진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스도인은 영혼이 육을 이길수록 성령 충만하다. 흰 진돗개와 검은 진돗개가 싸운다면 어느 개가 이길까요? 정답은 ‘그 동안 잘 먹은 진돗개가 이김’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내 영혼과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내 생각이 대결할 때 어느 쪽이 이길까? 평상시에 잘 먹은 쪽이 승리한다. 기도자의 영혼이 경외하심에 기울수록 기도응답은 신령해진다는 것이다.

3) 깨어(37)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ουκ ἴσχυσας μιαν ὥραν γρηγορησαι γρηγορειτε και προσευχεσθε ἵνα μη ελθητε εις πειρασμον. 우크 이스퀴사스 미안 호란 그레고레사이 not/ you cannot strong/ one/ hour/ to watch. γρηγορεω to circumspect, to be watchful)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희미하였음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 22:45-46).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예고를 더디 믿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것을 함량미달(含量未達)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절대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금의 순도를 표시할 때 ‘캐럿’이라 하고 ‘K’라고 쓴다. 캐럿은 중동지방에서 콩과 비슷한 나무열매인데 그 지역 사람들은 말린 캐럿 열매를 어른이 한 손으로 쥐면 보통 24개였다. 그래서 순금을 24K라고 표시하게 되었단다. 18개(75%)는 18K로, 14개(58.5%)는 14K, 그만큼 순금이 덜 들어갔음을 의미했다.

가룟 유다는 검과 몽치로 무장한 대적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님과 입맞춤의 신호로 배신하였다. 이 모습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위선과 거짓된 인격, 파렴치한 양심은 말씀 함량부족이었다. 또 “그들의 눈이 피곤함이라”(40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새번역-). 육신의 과로도 기도를 방해한다. 우리도 ‘바쁩니다’ ‘피곤합니다’로 자주 핑계 삼지만, 우리의 판단은 바쁜데 예수님은 그 바쁘다는 시간을 기도할 시간으로 보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연약해지신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 때 천사의 도움을 받았음도 기억해야 한다(“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1-44> 기도를 돕고 응원하고 보완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을 체험하길 축복함).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에서 꼭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교훈을 챙기자. 예수님께서는 비통함 가운데 특별히 세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시고, 기도를 하다가 세 번이나 와서 봐도 제자들은 다 잠자고 있었다. 잠으로 기로시간을 다 채워버린 제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정점이었던 십자가 때에 너무나 비참하고 무능한 배신자들로 변질 되었다. 심판 때 하나님께서 “넌 왜 신앙생활을 그렇게 살았느냐?”라고 물으시면 “저는 부자였잖아요.” “전 여자였잖아요.” “전 잘 삐진 성격이잖아요.”... 소용없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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