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8일 설교

“죽을지언정!” (막 14:27-31 ‘제자들의 믿음 중심’ 2021. 7. 18.)

노욕(老慾)이란 말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60년을 지나갈수록 대체로 탐욕이 점점 커지고, 강해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분명히 활발하던 의리도 회갑을 넘기면 점점 허약해지고, 그토록 강했던 체면도 무기력해져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라고 하였고 21절에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밝혀놓았다. 하지만 사탄은 인간에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도록 충동한다. “너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수 있어!” 이렇게 충동하여 하나님이 주신 에덴에서 추방당하게 한다. 그러면 사람이 점점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고 노욕은 강해져서 아전인수(我田引水)를 더 많이, 더 오래, 또 다시 받고 싶어진다. 그리고 더 편리한 삶의 환경을 원하며 걱정한다. 그래서 또 한 번의 성공을 욕심낸다.

영국 목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5.~1834.8.1)은 중국에 파견된 개척선교사였는데, 7년 만에 최초 1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27년 동안 10명을 세례주면서, 성경번역에 힘썼단다. 그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해 가던 중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에 이르렀을 때, 함께 성경번역작업을 해온 중국인 동료가 말했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면전에서 마주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다르게 바꿔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모리슨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여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순전하다’(צ רַָ ף 차라프 purify, refine)는 말씀은 마치 뜨거운 불로 돌에서 금을 녹여 찌꺼기를 모두 제거한 순금처럼 순수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해서 더러운 것이나 잘못될 일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으로 아무런 증거를 보지 못하고, 귀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게 전혀 없어 의심과 염려로 불안해질지라도 말씀 그대로 믿고 의지하며 생활해가면 그 말씀이 시험과 환난, 승리에서 진정으로 진리인 것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멘.

오늘 설교본문도 예수님의 말씀을 대충 자기 탐욕대로 들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십자가형장에서 예수님께 그 엄청난 배신을 하게 된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31 예수님께서 27절부터 시작한 말씀을 듣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하였던 대답이요 선언이며 맹세였지만 속빈 강정이었다는 것임). 설교본문의 핵심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 베드로의 호언장담은 실제로 불과 몇 시간 후에 현실화되었다고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72) 기록해 놓았다.

요즘엔 뜻을 담아 줄이는 낱말이 인터넷에서 많이 만들어지는데, ‘근자감’(根自感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고,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부작용을 탓하는 말이다. 그러니까“너 자신을 알라”를 올바로 하지 못함으로 무리하게 자만만 부리고 착각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예상하게 될 때 하는 말이다. 설교본문의 베드로가 그런 만용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설교본문을 예수님께서 새롭게 정하신 성찬예식(22-26)과 예수님의 겟세마네 십자가기도(32-42) 사이에 기록해 놓고,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아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는 결혼하였음에도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랐고, 밤중에 예수님을 향하여 호수 위로 뛰어들었고, “주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으로 천국열쇠까지 받았고, 유월절 식사 때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자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요 13:8-9). 또 예수님의 배신예고를 듣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러는 중에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이토록 주를 향한 열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배신하였다. 제자훈련은 그런대로 수료되겠지만 제자의 삶은 낙제이었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로 선발되었는데 항상 벤치에 앉아있다면 진정한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아니다. ‘절대’라고 하는 이유는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일을 전문업으로 하는 운동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운동선수가 결승전에 경기장에도 참석하지 않는다면 선수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랬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었지요.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 삶의 열정을 통곡으로 바꿔 간신히 살아남는 꼴로 초라하게 몰리지 않으려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중요한 답이 오늘 설교본문에 있다. 함께 찾아보자.

1) 기록(27)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예수님이 체포당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고,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스가랴 13:7에 기록되어 있음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밝혔는데, 하나님께서 계획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제작하셨다는 뜻이었다. 제작은 ‘재료를 가지고 기능과 내용을 가진 물건이나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신약(新約)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먹으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쟁취하려는 성공욕심이 죽는다. 그래서 자신은 죽고 예수님만 살아있게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런 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바울이 간증하였다.

성경을 분석하면서 읽어보자.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의식주와 세상권세를 누리고 싶은 육욕심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신앙 삶을 외면시키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신앙 삶은 어떠한 모습이던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삶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내 육욕이 죽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을 꿈꾸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대복음(絶對福音)이다. 그러므로 제작된 십자가죽음을 올바로 알고 결심하고 먹어서 그 효능을 보여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기록하여 놓은 게 사도행전 2장이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내 교회”(마 16:18)인 것이다. 우리도 기록된 말씀을 존중하여 “내 교회”를 이루자. 아멘.

2)진실로(30)

예수님은 스가랴 13:7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제자들이 배신 할 것을 예고해주셨다. 그러고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다시 출발할 것을 말씀해주셨고, 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면서 특별히 “진실로 αμην truly”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구체적으로 시간과 행위, 정황을 알려주셨다. 그런데도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새겨듣지 않았다. 롯의 사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농담으로 여겼던 것처럼 대충 듣고 말았다. ‘대충’은 성령님이 아주 싫어하는 벌레인 것 다 알지요?

‘쉰들러 리스트’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인데, 두 번(94, 19년)이나 개봉했지요. 쉰들러는 군수품 사업에 뛰어들어 유태인 1200명을 구출시키려고 자신의 전 재산을 독일군 장교에게 건네주고, 그의 희생의 댓가로 유태인 포로의 구출명단 1200명을 넘겨받아 자기 공장에 취직시킨다. 사망의 처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태인들이 해방되어 쉰들러에게 반지를 만들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쉰들러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좀 더 노력했더라면 몇 명 더 구출할 수 있었을 텐데...” 쉰들러는 영원히 떠나가 버린 그 기회를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엡 5:15-16에서 간권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베드로와 제자들도 지혜로 진지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 참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3) 힘 있게(31)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 말은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인가? 인류역사상 수많은 전쟁 때 출전하는 장수들이 했던 말이다. “힘 있게”(ἐκφερισσῶς ελαλει 에크페릿소스 엘랄레이<미완료형> exceedingly, said. “Peter said more vehemently and repeatedly,” –Amf- 베드로가 계속 몇 번이나 예수님께 장담했음. 사람은 자기만 모르는 자기 흠이 있음. 무식하면 용감한 법!).

제자들이 허약하고 비겁해서 배신하였을까?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의 화목제물로 나아가신 그 마음을 제자들은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승리를 위한 일사각오 결사항전 중에 당하는 죽음은 위대하게 본다. 만약에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결사항전이었다면 그 십자가형장에 제자들이 앞 다투어 동참했을 것이다. 특히 베드로라면! 다윗의 장수들도 많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사항전은커녕 그냥 무저항으로 오히려 십자가형을 지지하였다. 그러니 제자들이 장수의 다짐을 상실할 수밖에... 제자다운 그 충성심이 다 허물어졌지요. 예수님의 결심 때문에... 죽음을 목표로 하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에 제자들의 그 큰 맹세는 헛스윙을 치게 되었다. 야구선구의 헛스윙은 크면 클수록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제자들이 십자기 앞에서 그랬다.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춰보자. 어떤 모습이, 무엇이 보이나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그런데 제자들은 “살아나 후에... 갈릴리로”라는 단어가 들리지 않았다. “부활!”이라는 말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성공하고 정복하려면 수도 예루살렘에 가서 사투하여 쟁취하여야, 장관이 되고 총리가 되며 대통령이 될 수 있지 시골구석 갈릴리로 다시 가봐야 이장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데도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서 신앙훈련을 다시 시작하시겠다고 하였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이라는 비교의식을, 권력지향 성공심리를 수술하겠다는 것이다. 믿음 밭의 가시요 돌이기 때문이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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