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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7일 설교

“기억으로 전해지게!”(막 14:1-9 ‘향유의 헌신’ 2021. 6. 27.)

새 색시가 23살 때 남편과 사별하고 다음 해에 유복녀로 낳은 딸을 온갖 헌신으로 뒷바라지하여 유학까지 보내서 결국 저명한 대학교의 교수로 귀국시켰단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교회를 멀리하게 된 딸에게, 이제 어머니가 강권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큰 실망거리들을 봤다. 예배 후에 여 집사님들이 모여서 남편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장로가 다가와서 처음 본 자신에게 자기아들의 대학입학을 청탁하고, 여전도 회의실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너무 짜증난 딸은 어머니의 손을 끌고 집으로 가자고 재촉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조용히 다 듣고 나서 한 마디 했다. “나는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만 보고 분발하느라고 정신없었는데, 너는 딱 하루 교회에 와서 많이도 봤구나...” 어머니의 소감에 교수님 딸은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아니었고, 어머니의 시야와 자신의 시야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많은 것들을 보며 살아가지요.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게 주변의 현실이기 쉽다. 멀리 있는 실재(實在)는 생각하면서 살펴야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관만큼 크게 인식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할 때 너그럽게 볼 수 있기 마련이다. 상대를 섬기면서 살펴보라. 이미 충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기도하면서 살펴보자. 기도의 능력사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나 추하고 한심한 것들이 자꾸 보이면, 불평하기에 앞서 내가 불평에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볼 일이다. 참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 넓고 것들을 볼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해보자(6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일을 ‘괴롭게’와 ‘좋은 일’로 다르게 평가했음. κοπους<코푸스 bother> = ‘허비’<4>, καλον εργον<칼론 에르곤 = ‘a fine and beautiful thing’ -GN-> 라고 번역함. 전자는 제자들의 견해이고, 후자는 예수님의 견해였음. 그렇다면 ‘아름다운 허비’라는 예수님의 평가는 굉장히 역설적임. ‘허비’는 죄악의 일종인데, ‘아름다운 허비’는 칭찬이요 모범이기 때문이다. 허비의 죄악행위를 바라보신 예수님은 오히려 아름다운 모범으로 평가하셨음<9>).

우리는 본문상황을 좀 더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본문은 1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라고 밝히고 있고, 10-11절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에 흥정하고 있었다. 또 유월절이면 온 이스라엘은 물론 해외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성경학자들은 당시에 2-3백만 명은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2절에 ‘민란’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명절인 유월절 축제분위기 속에, 한편에서 무서운 살해음모를 추진하는 그런 설교본문의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일은 3절에 보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 때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쏟았다고 밝혀놓았다. 나병환자는 모세율법에 동네 밖에 격리시키라고 하였는데, 동네에서 살면서 잔치규모의 식사를 대접했다면, 예수님의 치료에 보답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설교본문의 옥합헌신은 마태복음 26장과 요한복음 12장에도 나온다. 요 12:3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라고 밝혀놓았다. 따라서 옥합헌신은 베다니 사람 마리아가 했다. 그 옥합헌신을 보고 화를 낸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4-5) 요한복음 12장에는 그렇게 책망했던 사람이 가룟 유다였다라고 밝혔고,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이 합세했다고 밝혀놓았다. 그들의 책망이유는 두 가지였다. 괜한 허비와 구제사용이었다. 그 당시에 노동자의 하루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 그렇다면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 연봉이었으니, 괜한 허비와 구제사용이라는 책망은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의 ‘허비’를 예수님께서 ‘나에게 좋은 일’로 평가하셨다는 이 차이가 문제다(신앙적일수록 예수님평가를 선호함).

서머나는 ‘에게 해의 진주’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면류관’이라 불릴 만큼 유명한 항구도시였단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의 교우들은 웰빙 상 밑바닥 생활을 했다. 왜냐면 동족인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과격하게 서머나 교회를 비방하고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 2:8-9 ‘실상은 부요한 자’ αλλα πλουσιος εἶ 알라 플루시오스 에이 but really you are rich! -GN- πλουσιος = rich, wealthy. 그 당시에 서머나 교회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핍박당하고, 고통당하고, 또 경제적으로 빈곤한데도, 실상은 부요하다고 하나님이 평가하셨다면, 이것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만 보면 빈곤이 맞지만, 빛과 소금, 예수님의 편지된 삶을 보면 부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부요를 ‘성령충만’ ‘신앙적’ ‘영적’이라고 말하고 심판 때는 ‘좋은 일’이 된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좋은 일로 평가하시게 신앙생활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본문에 정답이 있다.

1) 내 장례(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와 동일사건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미 3번이나 십자가 죽으심을 말씀하셨고,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분명하게 밝히셨다. 마가복음 10:45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였고, 언니 마르다가 분주하게 식사준비하고 있을 때 마리아는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기를 좋아했던 여인이라면 대속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기 쉽다.

예수님의 대속 죽으심을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고 흘렸지만 마리아는 듣고, 올바로 믿었고, 실천하여 자신의 귀한 것을 바쳤다. 이러한 믿음생활은 강요라기보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자원한 최선이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 이점은 제자들보다 앞섰다. 예수님께서 ‘좋은 일’로 평가하신 것은 단순히 값비싼 향유를 받쳤기 때문이 아니라, 마리아의 중심을 보신 것이다. 마리아의 옥합헌신은 ‘복음의 시작’(αρχη 아르케 begining, to be first, head, chief, originally, wholly)과 일치하였다는 것이 본문의 강조점인 것이다.

2) 향유(3)

이스라엘은 머리에 기름을 붓는 관습이 있었다. ① 자기 집에 온 손님의 머리 위에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림 ② 왕의 즉위식 때 ③ 제사장의 임직의식 때 ④ 선지자를 세울 때 ⑤ 장례식 때 시신에 기름을 부었음. 그렇다면 마리아의 옥합헌신은 예수님이 왕이시오,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시고, 대속제물이심을 고백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향유 300데나리온의 값을 아끼지 않고 바쳤고, 심지어 눈물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다. 칼빈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의 육체는 옥합이요, 영은 향유다. 옥합을 깨뜨리고 순전한 향유를 예수님께 바친 것처럼 우리의 육을 꺾어야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4-47). 참 사랑은 낭비의 헌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피땀 흘려 번 돈이지만 사랑하는 자식에게 사용할 때 즐겁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 당시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다.

3) 깨드려(3)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옥합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옥합의 뚜껑만 열고 향유를 조금씩 부어도 좋은 헌신이다. 또 뚜껑을 열고 단번에 향유를 쏟아 붓고 그 옥합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옥합의 목을 깨뜨리고 향유를 아낌없이 다 쏟아 붓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최고, 최선, 최대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오직 그 분에게!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마리아가 그랬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 이 말씀은 독자를 오해시키기 쉽게 한다.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행위가 값비싸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에 상응한 상급을 주셨다고! 그러니까 이러한 상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 ‘비싼 헌신’을 하자! 이렇게 유도하면, 마가복음을 ‘내가복음’으로 만드는 짓이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옥합을 깨뜨리는 그 행위자체가 복음을 수용하는 결단 행위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 이걸 바로 복음의 핵심내용으로 보는 것이다.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비싼 옥합헌신’이 아니고,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려면 누구나 옥합을 깨는 마리아의 그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 즉 말씀이해와 준비, 실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요즘 대화로 표현하면, 망해가는 회사의 주식을 사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자기 미래를 위한 베팅을 한 것이다. 이 지상 삶을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으시는 예수님께 함께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옥합 깨버리기는 자기 미래를 접는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꿈꾸는 그 삶을 끝냈던 것이다(마 13:44).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 시몬과 확연하게 다르다. 그는 당시에 천벌로 통하는 나병을 예수님께 치유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자신이 치료받은 사실을 축하받고 감사하는 잔치였다. 그래서 그 잔치의 주인공은 자연히 예수님이 아니라 시몬 자신이었다. 요즘도 나병환자 시몬처럼 모든 헌신과 섬김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교인은 많다. 예수님은 핑계이고 자신의 이름만 드러내는 출판기념예배, 회장당선 감사예배... 기회는 도망가는 법이다.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나의 나침반으로 확신된 그 가르침을 챙기자. 2천여 년 교회역사에 오늘 예배처럼 마리아의 향유헌신은 자꾸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몰래 바친 우리의 향유헌신은 천국에 심판근거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가롯 유다처럼 속이고 이용해먹는 직분생활도 고스란히 범죄로 남아있겠지요. 그렇다면 옥합헌신 신앙생활이냐 아니면 속이며 이용해먹는 신앙생활이냐 이것은 본인이 선택한다. 다윗이 드린 기도이다.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시 109:7-8). 심판대에서 면류관상을 받는 신앙생활이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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