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0일 설교

“깨어있으라!”(막 13:28-37 ‘재림준비’ 2021. 6. 20.)

청교도시대에 영국사회는 성경말씀대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그런데 1780년 5월 뉴잉글랜드에서 돌연히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지가 급변할 것처럼 특이한 징조를 보임으로 교인들은 최후심판의 날을 생각하기 시작했단다. 그때 마침 커네티컷 주의 주의회가 개회 중이었다. 회의가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한 의원이 “이제 주님께서 재림하실지 모르는데, 우리가 이렇게 한가하게 국회에 앉아있으면 되겠습니까? 어서 국회를 폐회하고 주님 오심을 준비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때 한 청교도 국회의원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의원 여러분, 오늘이 최후심판의 날이든지 아니든지 상관할 게 아닙니다. 만일 심판의 날이 아니라면 연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만일 심판의 날이더라도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수천수만 사람들을 대신하여 우리의 임무에 충실히 감당하는 것을 재림하시는 주님께서 보시면 주님께서 더 기뻐하실 줄 압니다. 촛불을 켜고 회의를 진행할 것을 제의합니다.”

또 남독일 시골교회의 목사였던 블룸하르트는 그저 평범한 목회를 해오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에 그는 ‘종말론적 신앙관’으로 목회한 일이 기독교역사에 아주 의미 있게 평가되어졌단다. 블룸하르트 목사는 예수님의 재림을 살아생전에 보리라고 확신하여 교인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설교하면서, 사택 마당에 마차 한 대를 항상 준비해 놓았단다.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당장 달려가려고 대기시켜 둔 것이었다. 이토록 재림확신 중심으로 살았지만 그는 재림확신 신앙생활 때문에 사회나 현실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커다란 위로와 소망을 주었단다. 물론 그의 일생 동안에 예수님은 재림하시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재림확신 신앙생활은 한 시대를 깨어있는 삶으로 살게 하였다고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재림신앙의 삶은 무슨 일을 중요시하느냐로 나타나고, 그 삶이 현명한 로 판가름 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양심과 도의를 잃고 점점 혼란으로 변질할지라도 비관만 하고 있을 게 아니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사회는 혼탁해지며, 자연재해가 세계적으로 발생할지라도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고, 일어나 빛을 발하고 소금과 향기로 예수님의 편지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종말신앙인인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종말신앙인의 삶을 현명하게 하라고 권하고 있다(33 βλεπετε αγρυπνειτε οὐκ οἴδατε γαρ ποτε ὁ καιρος ἐστιν. 블레페테 아그류프네이테 우크 오이다테 가르 포테 호 카이로스 에스틴 βλεπω = to have the faculty of sight, observe, perceive, beware of. αγρυπνεω = to be watchful, want of sleep. “Take heed, watch and pray; for you do not know when the time is.” -NKJV- “주의하라, 살피라, 그리고 기도하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 하나님의 시간이 언제 실현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굉장히 집중해서 빗나가지 않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임!).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하실 그 날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이 1,500번 넘게 나온다. 그만큼 예수님의 재림은 중요하고 세상종말심판을 반드시 실현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오늘이 그날인 것처럼 성실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항상 깨어있는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인 것이다. 주님께서 홀연히 오셨을 때 잠자고 있는 교인은 게으름을 보여준 것이다(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마 25장에는 이런 비유를 기록해 놓았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저는 강단에 있는 나무에 관심을 많이 가진다. 새벽기도 후에도 어떤 싹이 생겼는지? 또 어떤 잎이 말라가는지? 주일예배에 누가 오고, 누가 빠졌는지 살펴보는 것과 비슷하다. 생명체의 본성은 가장 먼저 자기 몸부터 키운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어느 정도 몸이 자라야 자식이나 새끼,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런데 식물은 어느 정도 몸을 키웠으면 열매를 많이 맺도록 순을 잘라주는 일을 해주어야 한다. 오이, 호박, 사과나무, 배나무...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도 코로나를 순 자르기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이제는 알곡 좀 맺으라고 하나님이 강권하신 신호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올바르고 현명한 재림준비를 하는 게 될까? 설교본문을 보자.

1) 깨어있으라(35)

예수님은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ιτε circumspect, to be watchful, to be awake) 라는 명령을 무려 3번(34, 35, 37)이나 반복하셨다. 깨어있는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살아간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내 가정, 내 일터, 내 교회, 내 엿새 동안)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라고 하였다. 빛과 소금, 향기 이 3가지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기희생이다. 자신을 헌신함으로 빛을 내고, 방부시키고, 향냄새를 풍겨내게 된다. 본래 불신자는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을 바보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히면 자기희생은 쉽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에 민감한 성도가 깨어있는 성도인 것이다.

누가복음 2장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감격 감사하였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두 번째는 시므온이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세 번째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된 안나라는 선지자이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우리가 명심할 바는 그때 메시야를 기다리다 만나 감격했던 사람들은 유별나지 아니하였지만 그들은 깨어서 준비하고 지속하던 사람들이었음(‘지키더니’ φυλασσοντες 필라손테스 keeping, ‘계시더라’ ἦν 엔 was being ‘섬기더니’ λατρευουσα 라트류우사 serving)이다. 누가 주님을 만나는가? 세상에 빠진 사람들은 세상의 풍조 때문에 주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법이다. 깨어있는 보초라면 곤충이 지나가는 소리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잠을 자면 적군이 쳐들어와도 알지 못한다. 깨어있는 신앙 삶에 익숙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알라(29)

‘알라’(γινωσκω “recognize and know that He is near, at [the very] door.” -Amf-). ‘이런 일’로!(5-23. 예수님의 증언, 설교, 설명, 성경말씀을 깨달아 알아차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6-)

사도 바울이 수시로 사용한 말은 ‘그리스도 안에’(εν χριστω 엔 크리스토 164회)이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 회개한 후부터 수시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고백을 하였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으로 옷 입기를 소원했다. 옷은 천한 성품인지 성숙한 인격인지 본인의 품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갑옷’은 군병들이 입는 전투복이었다. 싸워서 승리하게 하는 옷이다. 에베소서 6장에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권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녹아나오는 언행이길 축복한다.

3) 아버지만 아신다(32) 하나님같이 되려고

예수님은 종말심판의 날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밝히셨다. 왜 그럴까? 그날을 몰라야 신앙생활에 좋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종말심판 날을 정확하게 안다면 어떤 신앙생활을 할 것 같은가? 긴장과 기대로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까? 학생들은 시험날짜가 결정되면 매일 조금씩 미리 준비하는 학생보다 벼락치기로 밤샘하며 시험준비 하는 학생이 훨씬 많다. 이것을 성경은 ‘요행’이라고 한다. ‘겸손’의 문제라는 것이다. 착하고 충실한 종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만 밤샘하며 일할까? 진정 충실한 종은 항상 꾸준히 성실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날을 알려고 하지 말고 충성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재림을 지연하실까? 궁금해 할 수 있다. 그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사도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베드로가 정확하게 밝혀놓았다. 베드로후서 3:8-9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대충하다가 한때 특별한 것을 선호하지 말자.

하나님의 자녀가 ‘대충’을 ‘충성’이라고 착각하는 일을 성경은 이렇게 밝혀놓았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3:6-7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처참하게 패전을 시키셨다는 것임!). 우리 하나님은 노하시기를 더디 하지만 정확함을 철저히 따지기도 하신다.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챙겨 담아야 할 믿음교훈을 확인하자. 일상 삶 중에 깨어있는 자들은 구원을 알아보고 축복과 은혜를 누리지만 깨어있지 못하면 농담뿐이다. 노아의 홍수가 그렇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그랬다. 그토록 준비하라고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그들은 먹고 자는 일만 즐기다가 “농담으로 여겼더라.” 깨어있는 성도만 구원이 은혜로 기회 되는 법이다. 해당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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