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3일 설교

“미리 말하였노라!” (막 13:14-23 ‘종말 신앙관’ 2021. 6. 13.)

강원도 양구 출신으로 가난 때문에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하여 한국인의 애환과 정서를 가장 한국적인 독창성으로 표현해낸 작가로 각광을 받는 화가가 박수근(1914.2.21~1965.5.6)이다. 박수근 화가 자신이 밝힌 화가관(畫家觀)인데,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려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사는 다채롭지 않다. 나는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려서 자신의 화실조차 갖추지 못하였고, 개인전은 꿈도 꾸지 못했단다. 그러나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달아 회고전이 열리고, 그의 작품들은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에서 이중섭(李仲燮)과 쌍벽을 이룬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술마저 멀리 했다면 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실토했을 만큼, 정작 그 술 때문에 간경화와 백내장에 시달리다가 결국 왼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단다. 그래서 한쪽 눈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다가 52세 때 봄날 5월 6일 새벽 1시경에 숨을 거두면서 남겼던 한 마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이 그의 묘비명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근현대 화가들 중에 최고봉에 올랐던 인물도 천국을 멀리 멀게 두고 힘겹게 겨우 걸어가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실재(實在)를 들어서, 읽어서, 배워서...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로 내 영혼이 누리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도 멀리 떨어져있기에 현실은 고충, 한숨, 가슴앓이... 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 하나님 나라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그리스도인이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겪는 대혼란을 가르치고 있다. 이 대혼란은 교회의 내부적으로 겪을 고충이요 외부적으로는 지속될 환란인데, 제자들이 궁금해 하던 종말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느 때입니까?” “무슨 징조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종말심판의 때와 징조에 대한 직답을 피하시고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말씀하셨다(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전무후무한 일이니 얼마나 큰 혼란이겠는가! 그 대 혼란은 긴 기간이라고 설명하셨다. 참고로 “아직 끝은 아니니라.”<7> “재난의 시작이니라.”<8>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종말심판은 갑자기 시작되지만 일시에 끝나지 않고 인내를 보여줄 기간 동안 진행된다는 것이다.

7절과 8절에 기록된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대혼란의 징조로 볼 수 있다. 맞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성서학자들은 상징 또는 은유라고 본다. 인류역사에 전쟁과 기근, 지진, 거짓 메시야의 출현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만약 이러한 사건 때마다 종말심판의 징조로 삼는다면 우리는 오판과 허탈을 반복하게 된다. 실제로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때 성전은 정말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때 11만 명이 죽고 9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교회는 절벽 위에 세운 도시 펠라로 도망갔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때가 종말심판은 아니었다. 14세기에 유럽에서 페스트 전염병으로 유럽인구의 1/3인 3천만 명이 죽어갔다. 그때도 종말심판은 아니었고, 20세기에 제1, 2차 세계전쟁으로 각각 1천 6백만 명과 5천만 명 이상 사람들이 죽어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이 터졌을 때도 종말심판은 아니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심판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바는 고난이나 재앙이 아니라 언약성취이다. 7절과 13절에 나오는 ‘끝’이라는 헬라어(τελος 텔로스 closing act, fully accomplished, end. 영어의 end도 끝이라는 뜻도 있지만 목적이란 뜻도 있음). 종말심판은 고난이나 재난, 죽음으로 몰아감이 아니다. 영생복락의 성취이다. 죽음으로 이 세상의 끝남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시골교회의 집사님이 너무나 힘든 처지에서 믿음으로 고난환경을 겨우 이겨가다가 “주님, 아무래도 못하겠네요!” 이렇게 자주 기도했단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꿈에 자기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시더란다. “주님, 힘들어 죽겠어요. 이 십자가를 좀 잘라주세요.” 주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잘라주셨다. 꿈속에서 집사님은 세 번이나 자기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더니, 덧셈표 십자가를 편리하게 들고 갔는데, 드디어 요단강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은 큰 십자가를 강에 걸치더니 그 십자가 다리로 건너갔다. 그런데 그 집사님의 덧셈표 십자가는 퐁당! 요단강으로 떠내려 가버렸다. 깜짝 놀라 그 집사님은 꿈을 깼다. 그때 바로 생각난 말씀이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그 집사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멘! 아멘!!” 했단다.

자 그러면 종말심판 때 위로받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명심해야 하는지 설교본문을 살펴보자.

1) 도망(14)

예수님은 종말심판 때 산으로 도망하라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산인지 밝히지 않았고, 도망하는 당사자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눅 21:21) 지혜로운 판단으로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혜, 총명, 분별력, 예측력, 결단력... 주셨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지붕에 있는 자들은 무엇을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고”(15) “밭에 있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고”(16) “아이 밴 자들은 화가 있으리라”(17) 이 말씀들은 종말심판이 너무나 황급하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세계라는 것이다. 당시의 지붕은 평평한 지붕인데 낮잠이나 묵상, 기도하는 곳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어서 포탄들이 날아오는데 집안에서 금, 은, 문서를 찾는 일보다 피난이 더 중요한 살길이라는 것이다.

2) 기도(18)

예수님은 그 종말심판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성 기후라서 겨울이라도 만주벌판처럼 혹독하게 춥지 않다. 이스라엘의 겨울은 우기라서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주 비가 오면 우기 동안 내내 피난은 아주 곤란해지지요.

마태복음 24:20에는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 혼란이 안식일에 시작되면 도망도 문제지만 안식을 놓치고 말지 않느냐는 것이다. 대 혼란 중에도 안식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토요일도 휴무일이 됐지만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삶의 질도 더 떨어뜨리고 있다. 주일을 휴무로 내주면 그 교인은 이 세상에서 안식을 얻는 날이 사라지고 만다.

여호수아서 10장에는 하나님께서 하루를 길게 늘여주시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다섯 왕들의 연합군과 싸울 때 전투시간이 너무 짧아서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이스라엘이 완승할 때까지 태양과 달이 멈추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언약성취에 동참하면서 기도하면 초자연적으로 도우시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종말심판의 날은 길고, 지속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대 혼란을 견뎌내며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시도 바울도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매사에 적응력을 배웠다고 했다. 우리도 배우고 익혀서 믿음실력을 갖추기를 축복한다.

3) 삼가라(23)

‘삼가라’(ὑμεῖς δε βλεπετε 휘메이스 데 블레페테 βλεπω 블레포 to have the faculty of sight, observe, perceive, beware of.)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가짜 정보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2000년 교회역사에 가짜 그리스도는 항상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많다. 박태선, 문선명, 안상홍, 신천지 교주 이만희... 한 40여 명 된다. 또 가짜 교회, 가짜 목사들, 가짜 교인도 있다. 크다고 모두 진짜는 아니고 작다고 모두 가짜는 아니다. 설교를 듣기 좋게 한다고 모두 진짜는 아니며 설교를 듣기 거북하게 한다고 무조건 가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리냐 아니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로 나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겔 13:6, 19).

신앙의 사람들과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함께 갈 수 없다. 서로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였듯이 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사랑해야 하지만 세상과 하나 될 수는 없다. 불안한 동거이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인정받아, 세상의 온갖 편의와 안전을 누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 삶이 아니다.

오늘 설교본문 말씀은 교회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종말심판이다. 쉬운 말로 천국과 지옥의 선포이다. 그래서 그때는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때는 대환난이요 대혼란이다. 정의가 빠졌으면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령 받은 교회공동체는 지금의 고난과 궁핍, 그리고 방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좁은 생명길로 계속 가는 것이다. 끝까지 가는 자는 구원에 이를 것이고 그 구원이 위로와 기쁨, 감사를 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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