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2일 설교
“그 유산이 우리 것!” (막 12:1-12 ‘포도원 농부의 비유’ 2021. 5. 2.)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I am still hungry.”) 이 말은 지난 2002년 FIFA월드컵 때 대한민국 축구의 ‘4강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 축구의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가 남긴 명언이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선발도 당시 슈퍼스타들을 제외시키고 신예들을 선발함으로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월드컵경기를 1년 앞두고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프랑스와 체코에게 각각 5:0으로 대패하자 히딩크 감독은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고, 경질론까지 거론 되었다. 그러자 히딩크 감독은 의연하게 “아직 팀이 완성되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였지만, 그 당시 축구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은 매우 희박하다고 단정하였고,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심리는 ‘1승만이라도 했으면’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축구대표팀은 2002년 월드컵 1차전으로 폴란드에게 2:0 승리로 월드컵 48년 만에 첫 승을 거두게 되었고, 2차전 때 미국과 1:1 무승부, 그리고 대망의 3차전은 세계랭킹 4위 포르투갈을 1:0으로 제압하고 2승1무 조 1위로 당당하게 16강에 진출하여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때에 히딩크 감독은 인터뷰 중에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는 말을 쏟아냈다. 이 말은 “지금 16강 진출로는 아직 만족할 수 없어 더 높은 목표에 도전하겠다.”라고 밝힌 포부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강호 이탈리아를 연장전에서 꺾고 8강에 진출했고, 스페인과 승부차기 승리로 4강에 진출하고, 4강전에서 독일에게 1:0으로 패배한 후에, 3,4위전에서 터키와 3:2로 패배하였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아 최초 월드컵 4위라는 성적을 거둠으로 거스 히딩크는 약체 한국축구대표팀을 ‘기적의 팀’으로 만들어 낸 명장 중의 명장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런데 축구에만 조별예선, 본선 16강, 8강, 4강 싸움이 있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선한 싸움은 치열하게 존재한다. 예수님은 그 치열한 선한 싸움을 깨우치시려고 ‘포도원 농부’라는 비유로 설교를 하셨는데, 이러한 내용이었다. 주인은 포도원을 잘 조성하여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주고 떠났다. 수확 때에 맞춰 소작세를 받으러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포도원 농부들이 때리고 거저 보냈다. 포도원 주인은 다른 종들을 보내 봐도 농부들은 여전히 종의 머리가 상하도록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고,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은 죽여서 버리고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려 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게 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로 예수님이 깨우치시려고 하신 바는 무엇이었는가? 이 비유는 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시비를 걸었던 성전정화에 대한 대답이었다(막 11:27-33). 예수님의 의도는 거의 적중하여 그들이 그 의미를 깨달았지만 반항하고 말았다(12). 포도원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 세상에 구원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을,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종들은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다가 핍박과 죽임을 당했던 구약의 선지자들을,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마지막으로 포도원 농부들을 대신한 다른 사람들은 제자들이나 전도를 받아들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성경독자가 시선을 집중할 곳은 농부들의 대화이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7) 포도원의 소유권 사유화는 엄청난 마귀 짓인데도, 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유산’이라는 소유권을 끝까지 강탈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미심장하게 시 118:22-23을 인용하셨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10-11).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집 짓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역사를 말해주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쓸모없다고 판단하여 핍박하고 버린 돌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계획 중에는 성전모퉁이의 머릿돌로 갱신하시겠다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좀 더 명확히 해석하여 굉장히 강조하였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9-12) 또 벧전 2:4에서“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누에는 자기뱃속에서 실을 뽑아 집을 짓지만 10일만 살고 버린단다. 제비는 자기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집을 짓고 6개월만 살고 버리고, 까치는 집을 짓느라고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1년만 살고 버린단다. 그토록 혼신껏 보금자리를 마련하고도 시절이 바뀌면 미련 없이 그 집을 버리고 떠나는 짐승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숨질 때까지 움켜쥐다가 빈손으로 떠나지요. 이 세상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서 전부를 잠시 빌려 쓰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이다. 그래서 사람이 진정 소유해야 할 바는 재물보석이 아니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가치관이 좌우한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포도원농부들처럼 무자비한 강도꾼으로 변질해버린 이유는 뭘까?
1) 탐욕(1)
이 비유에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의 포도원을 크고 풍작 되게 잘 만들고, 소작세도, 기간도 정하지 않고 마음껏 농사 짓게 맡겼다. 그러고 그저 소출의 얼마만 요구하였다. 하지만 농부들은 소작세( = 창 2:17의 선악과)를 주지 않으려고 종에게 폭행과 능욕, 살해까지 하였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당한 핍박을 가리키는데,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한 철면피 같은 죄악이었다.
농부들은 왜 그렇게 험악해졌는가? 눅 12:16-20에 답이 있다.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인이 멀리 떠나 있으니까 농부들은 주인해도 되겠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내 것’이라는 탐욕에 지배당한 것이죠.
주인이 맡겨주신 살림을 통째로 관리하는 일꾼을 ‘청지기’라고 한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 의견도 권리도 없는 종도 아니다. 그렇지만 주인에 가깝다. 주인이 모든 일을 위임해 줘서, 자기 소신껏 관리하고 경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님을 청빙할 때, ‘위임식’을 한다. 하나님께 교회를 위임 받아 주인처럼 일하는 청지기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실례를 보자.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팔려서 결국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됐잖아요. 요셉이 성실하니까 보디발은 자기 아내 외의 집안일을 전부 맡겼지요. 그러니까 요셉은 보디발 대장의 청지기였다. 요셉은 훌륭한 청지기답게 주인이 정해준 선을 아예 보지도 않았다. 보디발 대장의 아내는 네가 선을 넘어오면, ‘너도 주인이 될 수 있다’라고 끈질기게 유혹하였지만, 요셉은 결코 주인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기회가 생기면, 누구나 탐욕이 생기지요. 그 탐욕에 지면! 하나님한테 위임받아 위임식을 공개적으로 해놓고도 분명히 위임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선을 넘잖아요. 청지기 요셉처럼 충성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자라는 죄악(3-7)
포도원 소작농부들은 소출세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을 무시했는데, 그 무시함이 점점 더 심해졌다. 처음에는 종을 때리고 거저 보내더니 다음에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다(ατιμαζω. 아티마조 abuse, infamy). 그러고 아예 죽이고 강탈까지 의논했다. 죄악은 처음 저지를 때 주저하지 시작하면 대범해진다.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임을 알아봤음에도 존대커녕 포도원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탐욕으로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으로 내던졌다. 죄악은 이렇게 점점 더 잔인해져 가는 법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정말로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라고 수없이 말하나 언행일치하지 않는 교인이 많다. 그래서 그 언행일치에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인지 솔직하게 밝히면? 가장 실패하는 과목이 ‘지갑’이란다. “우주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래서 전부 하나님 것입니다!” 이 고백을 암기로 끝내라면 쉽다. 그런데 ‘내 지갑’은 암기처럼 대충할 수 없잖아요. 당연하게 내 것인 내 지갑까지도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청지기의 재산으로 관리하느냐는 것이다. 청지기 소작농부로 신앙생활하길 축복한다. 아멘.
3) 고집(12).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을 알고 잡고자 하되” 이 철면피한 농부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 장로들임을 신앙식견으로 곧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선 신앙 삶을 지적하시는 예수님을 포도원 비유처럼 죽여 없애면 자기들 세상이 될 거라고 속단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거울삼아 정직하게 비춰보고,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감화에 솔직해져 겸손하게 순종하여 회개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좁은 생명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의 장점이다. 만약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설명하지만 삶으로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감화나 찔림에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포도원농부와 같은 죄를 범하는 거다. 그러면 결국 천국은 “다른 사람들” 즉 제자들과 전도를 받아들이는 이방인에게 넘어가고 마는 비극이 생기고 만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주인이 참 바보처럼 참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 종들이 당한 참혹함만 더해지는 것을 다 알면서도, 무모하다 싶은 일에 자기 아들을 보냈다. 하지만 호세아서를 통해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끝까지 사랑하심에 일치한다. 포도원 주인은 포기 대신 올바로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주인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끝까지 참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에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신호등은 확인하자. 그 “다른 사람들” 중 한 부류인 우리는 이 비유말씀에 어떠한 응답을 하여야 옳은가? 설교본문 11절이 말해준다.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사랑하심과 용서에 감응할 따름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6-17). 그냥 구원의 감격이 나 자신을 사로잡아, 감사 찬송이 내 중심에서 넘쳐 나올 뿐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