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30일 설교

“많이 넣었도다!” (막 12:38-44 ‘헌금의 모순’ 2021. 5. 30.)

칩 콘리(Chip Conley 1960.10.31-)는 미국에서 부티크 호텔을 창업하여 24년 동안 50개가 넘는 부티크 호텔체인을 경영함으로 호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CEO이었다. 그는 호텔직원들 각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단다. 이틀 동안 호텔규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일하라고 하였더니, 호텔직원들은 베개나 수건을 예전처럼 정성껏 가지런히 정리하지 않았다. 욕조도 대충 닦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룸서비스를 부탁하는 손님들에게 성의 없는 대답을 하였다.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손님들이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실험기간에 호텔에 머문 손님들에게 서비스의 수준을 물었는데, ‘사소한 부분들이 아쉬웠다’는 의견에 대부분 공감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부분들이 유명한 호텔을 만드는 요소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칩 콘리는 직원들의 세미한 언행이 손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우침으로써 짧은 기간에 미국의 최고급 호텔로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작은 것을 소중히 하라고 역설하신 말씀이 산상보훈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오늘 설교본문도 작은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43 ‘불러다가’ προσκαλεσαμενος 프로스칼레사메노스 = 단순과거 분사, 일제히 단번에 집합시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많다는 그 이치를 깨우치시려는 의도로 예수님께서 불러 모았음!). 그런데 성경 몇 구절을 살펴보면 설교본문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3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35>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13:1> 설교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헤롯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37. ηκουεν 에쿠엔, 미완료. “A large crowd was listening to Jesus gladly.” -GN- “큰 무리가 기쁘게 예수님에게 듣고 있었다.”(성경공부<설교>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음. “어찌하여”<35 πως 포스 how, in what manner?> “어찌”<37 ποθεν 포쎈 whence> “어떻게”<41 πως>. 사물의 근거나 방식을 밝혔음. 그러니까 외모만 대충 보고 지나가지 않고 이치나 원리 그리고 방법을 밝히고 확인하는 설교요 성경공부를 하였다는 것임).

사도 바울도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단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사랑 + 지식 + 분별 + 진실 + 열매 = 영광! 찬송! ≠ 앉아서 박수치는 영광, 음대생이 부르는 찬송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높이는 찬양). ‘진실’(ειλικρινης 에일리크리네스 εἵλη 헤일레 ‘햇빛’ + κρινω 크리노 ‘판단하다’ = 해가 비침으로 분명하게 드러나 확실함. ‘섞인 게 없음’을 의미한다. 또 ‘열매’는 καρπος 카르포스 단수형 갈 5:22에 성령의 열매 9가지를 역시 단수로 기록해 놓았다. 9가지 열매는 사랑과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큰 것을 아주 선호한다. 우리나라는 국호부터 대~한민국이고, 최고통치자를 대통령, 최종학교를 대학교(대학원), 외국으로 내보내는 심부름꾼 외교관을 대사(大使), 한국의 길은 대로(大路)가 많다. 송파대로, 양재대로... 다리도 대교(大橋)이다. 한강대교, 잠실대교... 그래서 자꾸 작은 것을 감추려고 하고, 작으면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수대교가 무너져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됐잖아요. 물론 대형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으로 인하여 회사나 교회가 큰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 때 아간 혼자 하나님말씀을 어기고 도둑질하였는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한 사람이 단 한 번 지은 죄 때문에 한 나라가 패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은 힘들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지 살펴보라(易地思之, 易神思之)는 것이다.

어느 시골 젊은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대형예배당에서 설교하라는 초청을 받고 얼마나 좋았던지, 당당한 자세로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시작하였단다. 그런데 설교 중간쯤에 갑자기 말이 더듬어져서 당황하다가 횡설수설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쉬운 말로 ‘죽 쒔던’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워서 올라설 때와 정반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겨우 내려왔다. 그러자 연로한 장로님이 목사님께 다가가서 위로하며 이런 말을 해주더란다. “겸손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강단에 올라가신 목사님들은 내려오실 때도 기쁜 표정으로 내려오신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설명보다 삶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아멘.

자 그러면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진실로 깨우치려하셨던 그것을 함께 찾아 챙기자.

1) 삼가라(39)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다. ‘삼가다’(βλεπω to have the faculty of sight, observe, perceive, beware of. 물들지 않도록 조심함). 38-39절처럼 “긴 옷”과 “문안” “높은 자리” “윗자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긴 옷”은 회당에서 공식적 기도나 종교적 행사 때 제사장과 레위인, 서기관들이 걸치는 겉옷인데, 긴 술이 달려 있다. 그러니까 ‘표시’나 ‘과시’로 티를 내서 억지 문안이나 존경을 받는 일을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회당의 높은 자리나 잔치의 윗자리 자체를 비난하신 게 아니라, 문안을 탐내고 거짓으로 경건한 척하여 남에게 보이는 행위를 야단치셨던 것이다.

개신교 현대선교의 아버지요 인도에서 전도한 영국 선교사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 1761.8.17~ 1834.6.9)가 임종할 때 곁에서 지키던 분이 조용히 물어봤단다. “선교사님의 장례식 설교에 어느 성경말씀을 선택하면 좋겠습니까?” 캐리 선교사님이 대답하기를 “나 같이 죄 많은 사람인데 무슨 설교를 한다는 게 과분하지만 꼭 해야 한다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입니다.” 그래서 그의 비문은 유언을 따라 이렇게 기록하였단다. “월리암 캐리 1761년 8월 17일 출생. 1834년 6월 9일 죽음. 가엾고 비천하고 연약한 벌레 같은 내가 주님의 온유하신 팔에 안기어 잠 들다.” 맞다! 설명이 아니다. 지식과 총명과 분별과 진실로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이루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서기관을 올바로 삼가는 신앙생활이다. 생활화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중하리라(40)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공동번역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무섭게 번역했다. 누가?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이다.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과부의 재산을 불법으로 강탈하지 않았지만 과부들이 요청하면 율법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해주고 지나치게 많은 대가를 요구하였다. 오늘날이라면 변호사의 고액수임료에 준한다.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짓은 율법을 분명히 알고도 어긴 것이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지니라.”(신 27:19) 그러니 서기관들은 사악한 범죄자였다.

또 서기관들은 길게 기도하는 게 문제였다. 그들이 오래 기도한 것은 사실상 자신들의 부정행위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지만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 앞에서 오래 기도함으로 오히려 착한 신앙인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훌륭하였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더욱 중한 벌을 쌓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 5: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훈계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서기관처럼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교인들이 흔해졌다. 서기관처럼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을 명예직으로 알고 위선을 한다. 무슨 일이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면 삐진다. 그러나 심판 때는 초신자보다 더 엄격한 저울로 총평을 받을 것이다. 그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직분을 받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3) 생활비(44)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동전은 렙돈이었다(1렙돈은 1/128 데나리온<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품삯> 그런데 과부는 실제로 2렙돈을 헌금했음. 2/128데나리온. = 1/64, 1/64 x 64,000 = 1000원<생활비, 최 극빈자> 그 동전을 헌금하려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과부를 생각해 보자. 나팔 모양으로 된 놋쇠 헌금함이 여인의 뜰에 13개<9개는 성전비용, 4개는 구제비용> 놓여있었다.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지면 소리가 크게 길게 들리면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향하곤 했는데, 2렙돈은 ‘땡 땡’으로 끝나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만 감동하셨다. 가난한 과부는 무슨 이유로 생활비를 다 헌금했을꼬? 가난에 지쳐서 생활비를 몽땅 헌금하고 굶어죽겠다고 작심한 것일까? 몽땅 헌금하면 부자 된다고 하니까 무리하게 헌금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고백이었을까?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확신할 때만 가능하다. 뭉치 돈! 대단히 필요하다. 그런데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맡기는 신앙고백은 더욱 크다는 게 예수님의 평가였다. 우리 예수님께서 크다고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신앙생활이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교훈을 챙기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고 그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셨다. 그리고 그들과 대비시켜 과부의 헌금을 크게 보시며 풍족한 중에 헌금함과 가난한 중에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사실만 확인하셨다. 유물론자들은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만 전부라고 생각하고, 광신주의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게 진짜이고 보이는 것들은 가짜라고 우기며, 과학적 실용주의자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인정하지만 보이는 것 중심으로 살아간다. 올바른 신앙인은 보이던 보이지 않던 다 필요한데 보이지 않는 최후심판에 맞추며 살아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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