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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6일 설교

“산자의 하나님!”(막 12:18-27 ‘부활신앙인’ 2021. 5. 16.)

조 바이든 미국대통령이 4월 29일 취임 100일을 맞아 조지아주 덜루스를 찾아 연설하고,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살고 있는 같은 민주당 소속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자택을 찾아 약 45분간 머물렀단다. 1976년 카터 전 대통령이 대선에 도전하여 민주당 내 경선을 치룰 때, 바이든은 상원의원으로 카터를 지지함으로 친밀한 관계이기도 해서, 그들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카터 부부가 소파에 앉고, 바이든 부부가 소파 양쪽 옆에서 각각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데 왼쪽부터 질 바이든 여사, 카터 전 대통령, 로절린 카터 여사, 바이든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 사진을 꼼꼼히 보면 카터 부부는 작고 왜소해 보이는 반면, 바이든 부부는 상대적으로 많이 커 보이는 모습이다. 실제로 바이든의 키가 183cm, 지미 카터는 177cm, 5cm 차이이고, 질 바이든 여사는 167cm, 로절린 카터 여사는 165cm, 2cm 차이이다. 그래서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큰 차이는 생길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진이 공개되자 트위터에 “카터가 소인인지 바이든이 거인인지 궁금하다.” “카터가 작아졌어요.” 등등 댓글이 하루 만에 13,000개 정도나 올랐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WP 신문)는 광각렌즈와 강한 플래시 라이트를 사용한 ‘착시 효과’때문이라고 분석했는데, 광각렌즈를 사용하면 사진의 가장자리는 확대되고 중간부분은 뒤로 밀려나기 때문에 크기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최장수 전직 미 대통령인 카터는 96세가 된 올해에도 거의 매일 수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어떤 누리꾼은 그 사진을 반대 크기로 다시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 단 하나의 사실을 이렇게 사진기자가 의도한대로 조작하여 틀림없는 사실을 실제 그대로 찍은 사진처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도 성경본연의 뜻과 전혀 다르게 설교자가 자기주장을 합리화시키려고 성경본문의 어느 부분을 특별히 부각시킬 수 있다? 없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로 오늘 설교본문이 그 실례를 보여준다(22-23). 이 말씀은 “계대혼인법”(繼代婚姻法 신 25:5~ 10. 아들 없이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의 대를 잇기 위해 형수와 아들을 낳고 형의 기업을 지속시키는 제도)을 근거로 만든 꼼수질문이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다가 도리어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경탄만 하고 물러났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야 말겠다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꼼수를 부렸다. 아들을 낳아 형님의 가문을 잇고자 일곱 형제가 차례로 미망인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였지만 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면, 부활한 후에 그 형수는 누구의 아내로 살게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의 핵심은 부활로 혼란한 사회를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모세오경과 일치한다는 주장이었다. 부활교리의 불합리성을 질타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오해 때문에 그런 억지질문을 하게 된다고 대답해주셨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신앙색깔 상 나누어져 있었다. 모세오경(창세기~신명기)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을 철저히 신봉함으로 보수적인 국수주의자였던 바리새파와 제사장 가문인 사두개파 그리고 극열분자들인 에센에파, 또 정치적으로 현실주의자들인 헤롯당이었다. 그런데 사두개파 유대인들은 본래 제사장 가문으로 소수 상류계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헤롯 왕과 로마정권과 타협하는 정치성이 강해 친 로마파였고 세속적인 현실주의였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님과 모세율법은 믿었지만 성경의 초자연성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사람은 죽으면 끝남으로 인간의 부활이나 영생, 천사를 믿지 않았다. 일단 한국교회에서 자주 설교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복을 넘치게 받은 교인들로 충분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솔로몬 왕 때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손임을 자처했을지라도 신앙보다는 사회의 상류층을 유지하는 데로 더 기울어졌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것은 실존하는 건 이 세상뿐임으로 장차 영생은 없다고 주장하여 불의를 범하여도 심판준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도 등록교인이지만 심판대를 인식하지 않는 경우는 흔하지요.

어느 선교사님이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실제 모습과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찾아와서 서울과 여러 지방을 둘러보다가 한국 목사님에게 물어봤단다. “왜 한국 교인들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 심각한 표정으로 갑자기 바뀝니까?”라고. 그 목사님은 잠시 대답을 생각해봐도 궁해져서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고난을 묵상하면서 예배드리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했더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잊어버렸나요?”라고 하더란다. 부활신앙은 어디다 보관해두고 예배를 드리느냐고 꼬집는 반문이었다.

부활신앙의 삶! 이것은 성경을 예찬하며 읽고 쓰는 사람들이 반드시 암기하고 교리정리로 끝낼 일은 아니지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이론쟁이 사두개인들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사두개인의 믿음생활을 면하게 되는가? 설교본문에서 그 정답을 저랑 같이 찾아 챙기자. 아멘.

1) 알지 못함(24)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오해한 이유를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한 탓이라고 예수님이 밝혀주셨다. 첫째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가리키는 바 그것을 올바로 보고 깨닫지 못해서 생기는 오해요.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전능전재 하심을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했다는 것이다(πλαναω 플라나오 astray, err, wander, deceive). 하나님은 전지전능전재하심으로 창조하시고, 역사의 하나님이며, 부활의 하나님으로, 심판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죽음도 생명으로 바뀌는 법이다. 따라서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올바로 맞았을 때만 믿어지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 하신 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권능을 올바로 봤다면, 그 권능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제대로 알기에 인간의 언어나 생각에 갇혀서 “부활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이렇게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후에 사람의 육신적 실존과 사회제도가 현세와 똑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당한 혼란도 유발시킨다고 봤다. 그러나 ‘천사들과 같다’와 ‘천사가 된다’는 말은 너무 다르다. 부활한 사람은 천사와 동등하지 않고 비슷하다고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분명히 알아보았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문을 닫아두었지만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이렇게 사람이 부활하면 분명히 인격을 가지면서 초월성도 갖고, 또 영원성을 갖는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아 창조할 때 그대로 그 숫자인 것처럼, 부활한 사람도 시집장가 가서 종족을 계승할 필요가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천사들과 같다는 것이다. 부활한 세계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영생복락이다. 이것이 성경을 오해함이었다. 아멘. 성경오해에 갇혀서 신앙생활하지 않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읽어봄(2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출 3:6을 인용하신 반문인데, 과거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살았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살았던 하나님이었고 동시에 모세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현재형으로 표현하셨던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쓴 책이다(읽으면서 보는 책 ‘읽어보지’). 성경을 세상적인 사고방식이나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만 보려고 시도하는 이들은 대부분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일이 아니면 시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학으로 설명도 증명도 할 수 없는 사실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논리도 비과학적 논리도 아니다. 정말 초과학적이고 초논리적인 증언이 많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가설이었다. 이렇게 가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만일 부활이 있다면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전지전능하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등등 이러한 가설이 하나님의 허점을 발견한 것인 양 반가워하며 즐긴다. 그러고 하나님이 설명하면 자신은 그 설명을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는 위인인 듯이 질문을 해대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을 통쾌해 하면서 자신의 무식함을 확고하게 고집한다. “하나님은 없다” 혹은 “부활은 모순이다”라고... 고집신앙에 걸려들지 않기를 축복한다. 아멘.

인터넷에 있는 재미나는 유머이다. 한국 남자들이 지금 다 그냥 무기력해져 있대요. 왜냐하면 코로나19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열매를 먹었는데 그게 잘못된 정보였대요. 그 열매 이름은 구기자. 구기자 먹고 다 구겨져버렸대요. 아직 못 알아들었나요? 그러면 좀 더 설명하지요. 아내들이 너무나 속상해서 남편들에게 특별보양식을 먹였더니 남편들이 그냥 다시 밝아졌대요. 그 보양식을 아세요? 피자. 아직도 못 알아들으시는 분들을 위해서. 피자. 좀 피자! 우리는 불평불만 낙심에 눌려 살지 말고 활짝 펴고 밝게 살자는 것이다. 아멘.

3) 크게 오해(27)

부활이 없음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논리를 사두개인들이 작성했다. 이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그 논리로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라고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알려줄 수 있는 정보였다. 하나님 안에서 죽음이란 옮겨감이다. 육체적으로 그 생명이 중단되면 그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그의 영혼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다 육체적으로 모두 죽고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성경을 통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성취이며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통치국가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런 인간관계, 질서, 가치관의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속하심’이며,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무능해진 지성으로 성경을 이해하려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한계 밖에 존재하게 된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의 배경에서 태어나 자라는 축복을 누렸음에도 안타깝게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적했다. 하나님 아들의 대답을 듣고 사두개인들 자신의 무식함과 빗나감, 거짓됨이 밝혀졌을 때, 그들은 통회자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시기와 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처형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마음 밭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해 주셨지만 결코 길가로 끝났다. 그것은 고집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발견한 믿음푯대를 챙기자. 제사장 가문답게 높은 기득권으로 상류층의 부와 권세를 누렸던 사두개인들! BUT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식! 의미를 모르는 성경읽기 때문! 고집신앙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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