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4일 설교

“네 믿음이!” (막 10:46-52 ‘구원받는 신앙관’)

옛날 농촌에는 누에치는 가정이 흔했다. 깨알 같은 누에알을 부화시켜서 하얀 고치로 키우기까지 1달 정도 사육한다. 누에는 ‘5령’이라는 시기까지 온도와 습도, 그리고 먹이를 제대로 맞추어 보살피지 않으면 실패하는 꾀 정성스런 농사이다. 그런데 누에가 잠을 자는 모습을 살펴보면 그토록 왕성하게 뽕잎을 먹던 누에가, 하루 동안 내내 머리를 들고 꼼작도 않고 가만히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먼저 입언저리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작은 구멍으로 몸이 빠져 나온다. 그 모습은 너무나 힘들어 보이게 전심전력하여 빠져나오는데 누에는 잠자기 전보다 상당히 자란 모습이다. 하지만 병약한 누에는 잠을 다 자고 난 다음에 입언저리는 떨어졌는데도 몸이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지 못해 결국 그대로 죽고 만다. 그토록 힘겨운 껍질벗기를 누에는 1달 동안 5차례나 하면서 성장을 거듭하는데, 이 모든 과정을 정상적으로 치러야 약 1.5km 실로 고치를 짓고 그 속에서 번데기 되고 나방이 되어 짝짓기를 하고 500-600개의 알을 낳은 다음 일생을 마치는데 누에농사는 번데기 때 중단시킨다.

우리 그리스인의 일생도 ‘거듭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성경은 ‘거듭남’을 그리스도인의 필요충분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거듭남은 사실상 주인이 바뀌는 일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 예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죄인인 자아가 새 생명인 예수님의 영으로 주인을 바꾸고, 영생복락의 길로 들어섰을 때 이것을 성경은 ‘거듭남’, 또는 ‘다시 태어났다’(重生), ‘구원받았다’라고 한다.

오늘 설교본문은 예수님께서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사건이다. 그 당시 바디매오는 ‘인간이길 포기해야 할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구제 불가능한 존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네거리에 엎어져있어도 관심을 갖는 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버림받은 인생을 살아갔다. 부모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 ὁ υἱος Τιμαίου βαρτιμαῖος 호 휘오스 티마이우 바르티마이오스 ‘바’ = βαρ = בר 바르 son 이름이 없어서 ‘디매오 아들’이라고 아버지 이름으로 불렀음).

그러던 바디매오에게 천지개벽 같은 큰 변화가 생겼다. 길거리에서 구걸했던 거지, 맹인, 천덕꾸러기... 이런 딱지들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육신의 장애는 물론 영혼구원과 예수님을 따르는 반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2 예루살렘의 십자가 형장으로 가는 길. 부활확신 믿음만이 동참가능한 길!).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눅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사람 속(마음, 생각, 사고방식, 가치관, 사상...)의 빛은 눈이 보는 것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이 고쳐져서 당장 예수님을 따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병 치료나 기적 체험을 훨씬 능가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7-19) 나병치료와 영혼구원은 따로따로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또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9-25)라고 하셨으니,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하였던 12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게 분명한 실제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영성인이요 사도였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선을 그어버렸다.

최근에 터키에서 아픈 새끼를 직접 병원에 데리고 간 길 고양이의 사연이 네티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고양이가 입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물고 터키 이즈미르의 병원의 병실에 놓고, 어미는 잠시 후 또 다른 새끼를 물고 왔단다. 병원직원들은 굶주려서 온 줄로 알고 음식을 주었지만 어미는 계속 울부짖었다. 간호사가 새끼들을 살펴보니 새끼 한 마리는 심각한 염증으로 눈을 뜨지 못했다. 간호사는 곧바로 안약으로 치료해줬다. 치료를 받은 새끼 고양이는 점차 회복해가더란다. 병원 측은 고양이들이 더 건강해질 때까지 보호하다가 분양공고를 낼 예정이란다. 어미 고양이가 병든 새끼 고양이를 고치려고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누리꾼들은 “짐승도 새끼를 이토록 아끼는데 제 자식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대체 뭘까?”라고 썼단다. 그렇지만 바디매오는 천덕꾸러기로 짐승처럼 살아갔지만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인생이 180도, 천지차이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꿔졌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생겼는가?

오늘은 그 이유를 저랑 같이 설교본문에서 찾아보자.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될 수 있다. 또 되어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1) 소리 질러(48)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외쳤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외쳤다(κραζω 크라조 exclaim, to cry for vengeance, klaxon)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메시야 구세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믿었고, 그 메시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사전에 듣고 이미 그 메시야가 예수님이라고 알고 그 사실을 몸부림치며 공개시인한 것이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49>).

믿음에서는 예수님 인식을 그토록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요 6:35에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니”(영혼의 양식) 10:7에 예수는 “양의 문”, 11절에 “선한 목자” 11:25에 “부활이요 생명이니” 14:6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5:5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 ‘나 자신은 ~이다’ 강조용법 사용함)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확신하였고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사실로 믿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1-22 확신예배에 구원이 따름!).

아는 믿음을 실행하려고 할 때 바디매오는 방해하는 장벽들이 주변에서 많이 생겨났다. 덜 제자들과 덜 믿는 자들이 가로막았다. 또 습관과 전통이, 생각과 사상이 방해한다. “너 같은 놈은 절대 안 돼!” “그래! 나 같은 놈은 자격이 없지!” 그래서 주저 않게 되고 기회를 놓치게 되고 결심을 미루게 된다. 이게 속는 것이고 지는 것이다.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2) 내버리고(50)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언제 그랬나?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였다(46). 같은 사건을 기록해 놓은 눅 18:35에 보면 그때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시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 중에 누군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말해주었다. 무슨 일이든지 기회가 있는 법이다. 사 55:6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바디매오는 곧장 울부짖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디매오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50절에 보면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옷 한 벌뿐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밤은 춥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겉옷을 이불로 삼곤 했다. 그렇다면 거지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귀중한 재산인 셈인데, 그런 바디매오가 그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로 곧장 달려갔다면, 이것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겉옷쯤이야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를 잡았을 때 목숨을 건 한판으로 충성(盡人事待天命)할 때 새 세계의 신앙반으로 진보해갔다. 아멘.

3) 보기를(52)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메오는 거지였으니까 원하는 게 누구보다도 많았겠지요. 그런데 그는 “보기를 원합니다.” 절대 필요만 말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대답을 들어보시니 우수한 믿음이었다. 바디매오의 믿음이 이미 눈을 고치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려주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 예수님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46절에 보면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 주변에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람들은 대부분 구경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원을 체험하지 못했다. 오직 바디매오만 소원성취 했던 것이다.

찬송가 305장 1절을 보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엄청난 변화! 새롭게, 기통 차게 밝아졌다. 바디매오가 그랬다. 눅 6:39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2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화 있을 진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 눈 먼 인도자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마 23:25-26). 눈이 멀어서!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사로잡힌 그 말씀을 챙기자. 남들이 감상을 하면서 감동감탄 할 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피눈물을 흘리곤 했다. 오늘날도 바디매오들은 성경과 악보를 천천히 볼 수 있지만 박물관이나 전시회, 일출과 석양노을, 밤하늘의 별들은 감상불가이다. 특히 “자세히 보았더니 예쁘다!” “오랜 동안 보니까 사랑스럽다!”는 말은 피눈물을 삼키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 와서 확신고백에 몰두하고 소망하면 엄청난 새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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