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5일 설교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까?” (막 11:15-25 ‘산 믿음과 죽은 믿음’ 21.4.25)
언제 누구나 반복해 읽어봐도 생각을 깨우는 글이라면 틀림없는 명문(名文)이다. 그러한 명문은 그저 미사여구의 배열에 치중하여 감정을 자극하려는 언어놀이를 철저히 거부한다. 오히려 숭고한 진리를 위대한 가르침으로 담아내는 적합한 말로 기술해간다. 예를 들면 독립선언문이다. 실제로 3.1운동은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이요 그 기틀마련의 원점이었다. 그 운동은 당장 일제강점으로부터 독립해내자는 역사 바로 세우기인 동시에 독립선언문에 나타나 있듯이 국민을 진정한 주인으로 삼는 주권재민운동으로써 세계적 평화를 표방한 홍익인간 또한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으로 당당하게 드러내놓을 수 있는 명문이다.
3.1운동의 역사적 유산은 이후 여러 독립의식에 영향을 주었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 역시 건국의 기초로 삼았음을 제헌헌법의 전문이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토지개혁을 시행하였고, 국가살림이 바닥난 실정인데도 의무교육을 시행하여 훗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실현에 기름진 토양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정신에 역행한 독재군사정권과 봉건수구세력의 집요한 훼방 속에서도 민주화투쟁과 더불어 산업화, 촛불항쟁을 성취시킨 그 원동력 역시 3.1운동의 역사적 유산에 뿌리를 두고 역어가는 대한민국역사인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그 값진 진주를 아주 쉽게 그리고 여전히 촌철살인(寸鐵殺人)처럼 새겨주고 있으니 명문이 분명하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2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3번이나 예언하셨던 것처럼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그때가 임박했을 때, 예수님이 유월절을 준비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시고 그 개탄하심이었다(11 εἰς το ἱερονς και περιβλεψαμενος 에이스 토 히에론 카이 페리블레파메노스<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봤다>. 성전과 마당 = ἱερον, 성소 건물 = ναος. περι = around. 예수님은 성전의 성소 건물과 성전 뜰과 마당까지 성전 전체를 여기저기 살펴보심).
설교본문의 성전은 헤롯성전을 가리키는데, 지성소와 성소, ‘이스라엘의 뜰’, ‘여인들의 뜰’, ‘이방인의 뜰’로 구분하였다. 그림을 얼른 그릴 수 있게 설명하면 우리 예배당의 강단은 지성소라고 할 수 있고, 교우들이 앉아 예배드리는 공간은 성소에 해당하며, 예배당 현관 입구는 유대인의 뜰이고, 마당은 여인들의 뜰이며, 울타리 밖 주차장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보면 된다. 본문의 성전청결사건은 바로 성전 담장 밖에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성전 밖에 이방인의 뜰에서 제사제물을 팔았고, 또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는 이방인의 화폐를 부정하게 보고 받지 않음으로 이스라엘의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소도 있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터무니없게 비싼 제물 값과 환전수수료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대제사장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많은 돈을 강탈하는 수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이라면 누구나 12절기 중 세 차례 절기를 매년 지키라(신 16:16)고 명령한다. 유월절(출애굽을 감사), 초실절(봄 추수감사), 장막절(가을 추수감사) 이 중에서 가장 중요시한 절기는 유월절이었다. 그래서 유월절에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왔다. 그런데 설교 본문을 흔히 ‘성전청결’이라고 부르는데 거의 폭력수준이었다. 예수님은 상을 둘러엎고 장사꾼들을 내쫓으며 통행금지 시켰으니 그토록 엄중하게 의분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충성하는 일꾼들을 ‘강도떼’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성전일꾼들이 죄 사함을 받으려고 성전으로 나아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억지제물 값으로 착취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죄 사함의 제사가 변질되어 본질을 벗어나 돈벌이 강도짓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유월절은 더욱 큰 수입을 올리는 성수기였겠지요. 이것은 저주형벌을 당한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똑같다고 예수님께서 평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순례자들 앞에서 공개심판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는 이런 말씀을 더 기록해 놓았다. 16-17절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우리는 어떤가?
제자로 들어온 재여(宰予)가 낮잠 자는 것을 보고 최고의 스승 공자가 이런 충고를 했단다. “후목 불가조야 분토지장 불가오야”(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 할 수 없다). 공자가 한동안 지켜봤더니 뛰어난 두뇌를 가진 재여였지만 게으른데다 志氣(의지와 기백)도 약해서 인물로 키울 수 없다는 책망이었다.
성경은 ‘많아짐’보다 ‘올바름’을 복이라고 밝혀준다. 올바름을 외쳤지만, 당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해 고독하게 살아간 선지자들의 삶이 ‘복’이라는 것이다. 많아지는 복보다, ‘바르게 함’을 복으로 선포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들을 그렇게 돌려놓기에는 너무나 물들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되어 아무래도 후목 불가조야(朽木 不可雕也). 우리 예수님께서도 끝장내시고 새판을 짜셨다.
자 그러면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은 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타락시켰는가?
1) 편리함(16)
‘이방인의 뜰’에서 아무나 물건을 들고 성전 안으로 다녔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성과 감람산 사이를 연결하는 지름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아무나 그릇을 들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편리한 변칙 이용을 봉쇄하셨다. 히 9:21에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성전에서 사용한 ‘그릇(σκευη 스퀴에 복수)’은 16절의 ‘물건’(σκευος 스퀴오스 도구, 기구, 그릇)과 동일한 단어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전제사 기구를 운반하지 못하게 하심인데, 그토록 중요한 죄 사함의 성전제사를 금지시킨 것이다. 하나님이 명하셨고 조상들이 지켜온 성전제사를 방해하는 일은 혁명적 사건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강도제물은 죄 사함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폭발이 아니었다. 미리 전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둘러보시고, 계획적으로 하신 일이었다(11-12, 15, 19). 예수님의 성전청결은 제사를 올바로 회복함 즉 예배개혁이었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어서, 노 선승을 찾아가 물었단다. “수행을 잘 하는 비결을 알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노승이 대답하기를 “나쁜 짓 하지 않고 대신에 선행을 하려고 애를 쓰게나.” “그런 사실이야 세 살 먹은 아이들도 아는 일이지요.” 그러자 곧바로 노승이 더 이상 묻지 못하게 대답을 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백 살 먹을 때까지 실천하지 못하는 노인도 많지.” 예배개혁도 마찬가지이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대충을 뺀 예배로 우리 하나님께서 받으시게 드리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대제사장(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것은 예배개혁을 올바로 하라는 말씀에 대한 반응이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셨다고 했다(17).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면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해서? 초신자라서? 결코 아니다. 위선과 탐욕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어서 차라리 올바른 지적을 없애려고 무서운 흉계에 빠져든 것이다. 엄청난 마귀 짓이요, 죄악이다.
본래 시작은 선했다.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돕는 배려였지요(“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신 14:24-26). “그는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한 마리를 드리되 곧 그의 힘이 미치는 대로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소제와 함께 번제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할지니”(레 14:30-31). 이러던 것이 엄청난 장사이득을 챙겼고, 그 이득은 성전 지도자들의 몫이었고, 삯꾼 짓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백부장처럼 고백해야 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 마귀는 끊임없이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을 등지게 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도록 속삭인다.
3) 믿음(22-23)
예수님은 믿음에 의심을 섞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 기도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렘 7:1-4에 대답이 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예배드리러 가는데 하나님의 음성(거짓말을 빼라)을 들려주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청종시키신 것이다. 청종은 듣고 따라함이지, 혼자 일방적인 고집을 반복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요구한 것을 기다리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을 따라 올바른 순종하길 기다리신다. 아멘.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자탄하게 된 근본 원인을 아는가? 그 이유는 기도만 봐도 나타나있다. 자기 말만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방통행기도를 합심으로 고함쳐대는 것을 잘한다고 착각시킨 결과이다. 그래서 여전히 기도자들이 현실의 이익만을 욕심껏 울부짖고 기다렸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을 사업처럼 시도하곤 했다. 기도응답만 기다리지 말고 이웃형제를 용서함으로 기도응답의 지연을 막자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마지막으로 다 같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성전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예수님은 봉사자들을 내쫓으시고 상을 뒤엎으시며 편리한 지름길을 통행금지시키고 계신다. 그런 후에 설명하셨다. 그 예수님을 곧바로 우리 예배당으로 모시고 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니 나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제발 쫓겨나지 말아야 한다. 뒤엎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