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8일 설교

“때를 이루자!” (막 11:11-14 ‘순종하는 신앙생활’ 21.4.18)

6명의 자녀를 둔 주부가 변호사 사무실의 비서로 일하면서 무용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녀의 삶은 부유했지만, 40대 초반에 갑자기 근육무력증에 걸렸다. 머리카락은 거의 빠지고 스테로이드 과다복용으로 온 몸이 부어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기도하는 사람도 마음속으로 ‘오래 살지 못할 텐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짐이 된 게 싫어서 심장이나 호흡 장애가 생길 때마다 그대로 숨졌으면 하고 생각하곤 했단다.

부활절 때 찬양대원들이 문병하려고 그녀에게 와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부르고 합심하여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럴 때 그녀는 하나님을 확신하였다. 오랜만에 하나님께 참으로 병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였다. 그런데 찬양대원들이 돌아간 후, 그녀는 다시 문병이전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무력해지면서 죽고만 싶어졌다. 그럴 때 이런 생각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찬양대원들이 그토록 뜨겁게 기도하였고 나도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게 다 무엇인가? 그냥 헛일인가? ‘내가 집사니까 그러려니 해야 하는가?’ ‘나도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들었으니 백부장처럼 행동을 해야 하지 않는가?’ 백부장은 예수님에게 호소하고 병세의 호전만 기다리지 않았으며 지시를 원했다. 그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동하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집사님은 결심을 했단다. 일어나서 움직이는 게 너무 힘이 들었지만 우선 자리에 누워있지 말아야 하겠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자꾸 불가능이란 생각이 들지만, 물리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들을 생각했단다. 남편, 자식, 교회, 친구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찬송과 기도, 성경 읽기... 점점 생각이 밝아졌다. 몸이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라고 남에게 사랑함과 친절을 베풀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을 바꿨다. “내 생명이 꺼질 때까지 사랑을 나누자!” 그녀는 힘들어도 휠체어타고 문병에 동참했다. 이상하게도 차츰 몸이 회복되었다. 다시 글을 쓰고 연단에서 강의를 하고, 50중반 때 교회 사무를 도왔고, 무용강습도 다시 시작하였다.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녀가 한 말이다. “나는 알았다. 기도를 사용하는 비밀을! 마치 은행에 맡긴 돈을 다시 찾아 쓰듯이, 하나님께 드린 그 수많은 기도의 말을 다시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예수님과 연결된 우리의 벨트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시는 예수님을 실감나게 볼 수 있게 해주는데 저랑 같이 살펴보자(14, 21).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라고 선언하셨더니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일반적으로 3월에 잎이 나기 시작하여, 열매를 맺는 것은 잎이 무성해지는 때인 6월경이고, 추수는 8월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셨던 유월절은 4월 중순이니 무화과나무 잎이 막 피어날 때였는데, 그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해 있었으니 너무나 유별났다. 하지만 잎사귀가 무성했다고 해도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할 시기인데 예수님은 이 시기를 몰라서 저주하셨는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분명했는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단순히 베다니 근처의 무화과나무를 가리켰던 게 아니라, 구약성경처럼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상징하신 것이다. 미 7:1-2이다.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당연히 번영해 있을 무화과가 없음을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경건과 정직이 끊어지고, 도리어 불의와 포악을 대신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실 것을 예언 선포하였다. 결국 설교 본문에서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당장 저주하신 일도 당시 이스라엘의 알맹이 없는 신앙 삶을 혼내신 것이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만 풍성한 것은 종교적인 행사는 화려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성취가 없어 위선과 탐욕으로 이루어지는 제사를 책망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됐던 것처럼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과 이스라엘은 실제로 A. D. 70년 로마에게 파멸당하는 역사적 현실로 되었다. 그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다(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은 망할 징조가 전혀 없는 형편인데,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기 때문이었다.

어느 부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참 이상하지.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유언해두었는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구두쇠라고 비난만 할까?” 친구가 대답했다. “내 말을 잘 새겨 듣게. 어느 날 돼지가 암소에게 불만을 털어 놓기를 ‘사람들이 욕심쟁이를 욕할 때 왜 돼지 같은 놈이라고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항상 사람들은 암소를 부지런하고 온순하다고 칭찬하잖아. 물론 너는 밭을 갈고 송아지를 낳지... 나도 너만큼 사람들에게 희생하잖아. 베이컨과 햄, 심지어 족발까지.’ 그러자 암소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네. ‘맞다. 너나 나나 인간에게 희생하는 건 똑 같지. 하지만 한 가지만 달라. 넌 죽고 나서 하지만 난 살아 있을 때 시작한 거야.’ ”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동참한 순종을 찾고 확인하신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동참하는 그 열매를 맺게 되는가?

1) 무화과나무(13)

무화과나무는 꽃을 볼 수 없지만 과실을 맺는다고 해서 무화과(無花果)라고 부른다. 그래서 열매가 주목적인 나무이다. 꽃을 볼 수 없으니 향도 없어 관상용도 부적합하고, 많은 가지 때문에 건축재목도 못 된다. 열매가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어 마땅히 제거하게 된다. 그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우리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무화과의 때가 아님”에 있다. 무화과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를 하신 일은 무화과나무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억울하지요.

그런데 시간을 헬라어로 말할 때 ‘호라’(ὥρα time), ‘크로노스’(χρονος spending time 흘러가는 자연의 때), 그리고 ‘카이로스’(καιρος 하나님의 시간으로 의미 있는 시기, 하나님이 언약성취를 하시는 때)이다. 그런데 13절 끝의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ὁ γαρ καιρος οὐκ ἦν συκων 호 가르 카이로스 우크 엔 쉬콘. = 왜냐하면 무화과의 그때가 계속 아니었다. “because it was not the right time for figs.” - GN - = 식물이 열매를 맺는 철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위한 언약성취나 심판의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세기 때 성당의 그림을 그리게 된 화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림을 완성하려 하지 않고 그저 산이나 바다로 돌아다니며 스케치만 열심히 하더란다. 그 스케치는 사람의 근육과 뼈의 생김새, 새가 날거나 앉는 모습, 그밖에도 오늘날의 비행기나 자동차 같은 것도 있었다.

사람들의 실망은 야단났다. “저 사람은 결국 그림을 그리지 못할 거야. 왜 저런 자에게 성당그림을 맡겼지?” 하며 빈정대는 사람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리려는 대상의 본질을 알아내려고 스케치를 하곤 했는데, 그의 진정한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화가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단다. 성경의 순종의 본질도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동참함이다. 순종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잎사귀 외(13)

예수님께서 시장하실 때 찾으셨던 바는 ‘잎사귀 외’의 것이었다. 그렇다고 잎사귀는 필요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무성한 잎사귀는 분명히 좋은 장점이다. 그런데 시장하심(πειναω 페이나오 hungry, long for)은 실제로 배고픔을 의미하지만, ‘갈망하여 찾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 잎사귀뿐일 때 심각해진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마지막 장자재앙 중에 살아남은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순종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 아니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유월절을 정하셨다. 이것은 유월절이라는 행사를 반복하라는 게 아니라 유월절의 의미를 간직하라는 뜻이었다(“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출 12:26-27).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 유월절이면 성전에 모여 어린 양의 피로 인한 구원감사를 빠뜨린 제사형식 자체에만 강조하고 있었다. 성전제사 자체가 하나님백성의 자격을 유지시킨다고 확신하였던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죄 용서도, 감사도 다 사라진 제사만 드리는 일에 열중했을 뿐이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 종교의식만 행하였다. 이런 종교생활은 바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것이니 저주로 심판받을 대상임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바였다.

3) 베드로(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αναμνησθεις 아남네스쎄이스 αναμιμνησκω 아나밈네스코의 수동태, <하나님께서!> 생각나져서 =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관계와 순종을 의미함. 여기서 우리가 베드로에게 배울 점은 생각남을 물어보는 모습임<확실하게 깨달음! = 신앙지도자다움, 눅 13:7> ≠ 18절)

통솔하는 기술을 아이젠하워 장군이 실로 설명하였는데, “실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실을 당겨 봐. 그러면 실은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그 실을 밀면 아무 데에도 가지 못한다. 사람을 이끌 때 방법도 이와 똑같다.”

그렇다. 지도자는 두목과 확실히 다르다. 사람들을 두목은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이끌고 간다. 그래서 두목은 ‘나’를 강조하지만 지도자는 ‘우리’를 강조한다. 두목이 복종을 강요할 때 지도자는 존경을 모은다. 두목은 자주 회초리를 사용하여 겁을 주지만 지도자는 설명하여 희망을 준다. 두목이 ‘가라’고 명령할 처지도 지도자는 ‘가자’고 권한다.

지도자는 역지사지하지만 두목은 자기 생각을 절대화시킨다. 지도자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만 두목은 자기 말도 바꾼다. 지도자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하지 않는데 두목은 자기약점을 숨긴다. 지도자는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자도 자기 옆에 두지만, 두목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없애버린다. 예수님은 지도자를 ‘선한 목자’라고 하였다. 선한 목자는 양떼를 무성한 잎사귀로 키우지 않는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가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을 확인해보자. 자신의 신앙생활을 저울질해 보라는 것이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풍성한 열매도 가능했다. 그러나 열매는 전무했다. 부족(無花果인식! 무화과 의미! 지도자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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