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1일 설교

“주가 쓰시겠다!” (막 11:1-10 ‘십자가의 동참’ 21.4.11)

천재적인 작곡가 베토벤은 괴테처럼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8.15~1821.5.5)을 열렬히 지지하였단다. 포병장교 출신 나폴레옹이 왕정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공화주의를 지향하자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깊은 흠모와 기대를 가진 나머지, 그에게 헌정할 위대한 교향곡을 5년에 걸쳐 완성하였단다. 그러고 곡 이름도 나폴레옹의 이름을 따서 ‘보나파르트’로 정하였는데, 이 곡은 베토벤이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합창’과 더불어 가장 큰 자부심을 가졌던 교향곡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줄 알았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격분하면서 악보표지에 친히 써 놓았던 ‘보나파르트’라는 글자를 북북 지워버렸고 그 흔적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베토벤은 이런 말을 했단다. “그도 역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 이외의 모든 인간 위에 올라서서 독재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 교향곡의 이름도 ‘보나파트르’를 교향곡 3번 ‘에로이카-영웅’으로 바꿔버렸단다. 역사 속에 화려하게 등장한 영웅들이 기가 막히도록 실망을 안겨준 경우는 많다. 왜 그런가? 그들은 황제의 자리에서 사명완수 대신 욕망군림을 택했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왕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신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참된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그 모습은 여러 가지로 이상했다. 첫째는 작은 나귀새끼인데, 천하의 명마인 천리마나 적토마도 아니고 황금마차도 아니었다. 또 나귀를 끌고 오는 일은 도둑질로도 볼 수 있는데 두 제자는 이무런 짜증 한 마디도 없이 순종하였다. 그리고 또 나귀를 가져가라고 허락한 사람들도 이상했다. 나귀는 휴지조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겉옷을 펴드린 사람들이다. 겉옷은 밤이면 이불이기 때문에 중요한 재산이었고, 벗으면 속 알몸이 드러나는데 그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희생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나귀 또한 참으로 이상하였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는 나귀 새끼”라면 성인남자 예수님을 처음 태우는 나귀였기에, 승마에 너무나 미숙했을 것이다. 그리고 키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도 발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하려고 다리를 들고 있으려면 대단한 고충이겠지요. 또 많은 사람들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찬송하였는데도 나귀는 흥분하지 않고 잘 훈련 받은 것처럼 묵묵히 걸어갔기 때문이다.

이토록 의문투성이인데 성경기록자 마가는 본문을 통하여 성경독자들에게 무엇을 깨우치려고 애를 썼는가? 그것은 마가복음 1장 1절에 밝혀놓은 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αρχη 아르케 begining, to be first, head, chief, originally, wholly)라는 그 사명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마가를 우리 성경독자는 잊지 말고 반영해야 한다. 이 의문투성이 본문이지만 마가는 복음의 시작(αρχη to be first, head, originally, wholly)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멘.

히틀러통치 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골라 다른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기로 결정했단다. 그래서 사람을 불러내면 그게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유대인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호출 당하자 “나는 불쌍한 처자식이 있습니다. 나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애원하였단다. 그러자 간수가 너를 대신해서 죽어 줄 사람이 있으면 살려 주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감옥 동료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손을 들고 그 사람 대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가뭄에 콩 나기였겠지요. 하지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나는 처자식이 없으니 죽어도 됩니다.” 그 사람은 폴란드 프란시스회에 소속 된 막스 밀리안 콜베 신부였다. 그 신부는 그 유대인을 대신하여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결국 한 명씩 불려나가 억울하게 일생을 마감하곤 했다. 그럴 때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독재통치의 개죽음으로 여겼지만, 그 콜베 신부의 죽음만 값진 희생으로 존경받게 됐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우리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값진 순종에 이름도 없이 동참한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값지게 순종하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설교본문에 나타나있는 대로 저랑 같이 찾아보자.

1) 예언 성취(2)

“아무도 타보지 않는 나귀새끼”를 예수님께서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언약성취를 위함이었다. 슥 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끌어오게 하심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성취로 오실 왕이 예수님임을 입증시켜주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은 언약성취를 이루며 33년 일생을 살아오셨다. 실제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초라하게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요 19:30) 하시고 죽으셨다. 이러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성취대로 된 것이다. 이렇게 언약성취에 동참함이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명품순종이다. 우리도 자주 시도해보길 축복한다. 아멘.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이제 필수로 통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에 굉장한 의미를 둔다. 그래서 시골 목사님이 방탄차를 타고 다닌다면 조롱걸이가 되겠지요. 그러나 만약에 문재인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방탄차를 타고 교포를 시찰한다면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걸어 다닌 것은 상관없다. 지금은 대통령이시니 미얀마라면 방탄차를 타야 한다. 테러를 당하신다면 국가의 망신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타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직분과 사명에 일치하게 결정되는 법이다.

그래서 왕이신 예수님은 사람을 태워 본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세상논리라면 왕이신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탈것은 천리마나 황금마차가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맞춘 것이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것을 배우고 실행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믿음의 실천(6)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일을 시작하였다. 4절에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남의 나귀를 푸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3절에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두려움을 이겨내는 순종은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려는 용기가 살아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인식하고 삶으로 순종할 때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법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이 말씀 붙잡고 집도 바치고, 땅도 바치고 첫 월급도 바치셨다. 그러고 그 성전에 자신의 마음도 두었다.

하나님께서 더 크게 보시는 바는 능수능란한 재주보다 거룩함이었다. 민수기 19장 2절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세고 승마에 익숙한 나귀를 고르신 게 아니라 정결하고 흠이 없는 나귀를 선택하셨다. 아멘.

3) 순종하는 중심(8-9)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군중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였다(요 12:13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אָנָּא יְהוָה הַצְלִיחָה נָּא׃ אָנָּא יְהוָה הֹושִׁיעָה נָּא 아나 예흐와 호쉬아 나 아나 예흐와 하츨리하 나 = I pray/ Jehovah/ save/ now// I pray/ Jehovah/ make to prosperity/ now/). 그래서 그들은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 헬라어로 ιησου 예수)를 외쳤던 것이다.

종려나무는 사막의 오아시스에서도 아주 크게 자라 대추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맺기도 하는데, 학명이 피닉스 닥티리페라(phoenix dactylifera. phoenix 불사조)이다. 종려나무는 다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 자라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력 때문에 유대인들은 종려나무를 승리와 부활로 상징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었음은 예수님을 승리와 부활의 메시아로 시인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열광적인 환영은 금방 변질되었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하며 흉악한 강도와 바꾸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할 때 그냥 묵인했고 도망쳤잖아요.

왜 그들은 돌변했는가?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또 행하시길 기다릴 땐 더욱 열광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구원의 길을 이루며 회개를 요구하실 땐 냉랭해졌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풍부하게 하시려고 오신 게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천국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오신 게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누리는 게 참 은혜요 성경이 말하는 지혜이다. 아멘.

오늘 설교본문에는 숨겨진 멋진 신앙인들이 많다. 특히 제자들을 능가한 신앙인이 있다. 누군가? 바로 나귀의 주인이다. 나귀를 “주가 쓰시겠다”는 대답에 아무런 짜증 한 마디 없이 헌납했다. 그 이유는 슥 9:9 성경말씀 성취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자신이 사는 동네가 예루살렘이었고, 자기 집에 나귀새끼가 있었는데, 자기의 나귀새끼를 주님이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고 하니 ‘완전 아멘! 할렐루야!’였다. 참으로 말씀언약에 투철한 신 앙인이었다. 저와 여러분도 성경을 많이 읽고 쓰는 것을 긍지로 삼기보다 말씀 한 절이라도 그 의미를 올바로 묵상하는데 믿음비중을 두는 신앙생활로 바꿀 필요는 충분하다. 또 성령님께서 나(내 것)를 쓰시겠다고 감동감화 시키면 그때 어떻게 할 것인지 자문자답하면서 성경읽기와 기도하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하다. 명심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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