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1일 설교

“당할 일!” (막 10 : 32 – 34‘예수님의 십자가’ 21.3.21)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조병화 시인이 자신의 어머님 묘 옆에 세워둔 시비(詩碑)에 새겨놓은 짧은 시이다. 이 시에서 ‘어머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그 사람은 충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즉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나 사도행전의 제자들과 말세의 끝부분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 당했던 신앙인들이 그들이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시대에 이 나라에서 태어나 복음증인으로 살아갈 사명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심부름하다가 딴 일에 한 눈을 판다면 그 심부름은 부실하고 지연될 수밖에 없는데, 후회하며 통곡한들 소용없는 자리를 반드시 거치게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바란다. 아멘.

히 12:2에 있는 말씀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Let us fix our eyes on Jesus.”) -NIV-. 찰스 H. 스펄젼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단다. “달팽이는 인내 하나로 방주에 도착하였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모든 동물이 들어갔음으로 분명히 달팽이도 방주에 들어갔기 때문임. 그러면 달팽이의 속도는 얼마였을까? 시속 12m이다. 달팽이는 방주승선을 위하여 오로지 총력전을 벌렸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거기서 당하실 일, 결국 십자가형벌과 부활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일인데, 이미 두 번이나 가르치신 바 있다. 그러니까 설교본문은 세 번째 가르침에 해당한데 가장 상세하고 또 생생하다. 사실상 십자가의 형벌은 사망심판이었고, 부활은 십자가형벌의 역설이었는데, 인류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다. 이렇듯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은 예수님공생애의 최종목적이요 본질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깨우치고자 애를 쓰셨지만 안타깝게도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교인들은 성경공부를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신앙의 본질을 알아차리기까지 대부분 더디고 오래 걸리는데도, 의외로 착각하는 교인이 많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의 12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음을 복음서에서 여러 번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판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 수자만 해도 5,000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시면 자신들의 삶도 풍부하게 될 것으로 속단하였다. 그럴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오병이어 기적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새번역). 누가복음 24:25에는 더 노골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다른 분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피신하는 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5살, 3살 된 아들과 함께 살면서 철길 옆에 있는 신발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두 아이들을 맡길 수 없어서 부인은 매일 출근할 때 함께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형제끼리 놀게 하고 엄마는 일을 했단다. 따뜻한 늦봄에 두 아이들은 방에서 노는 게 답답하여 엄마 몰래 철길에서 놀고 있었다. 애들이 방에 없다는 말을 동료 직원에게 듣고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두 아들이 철길에서 장난치고 있었다. 그런데 기차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밀어버리는 순간 기차는 엄마를 치고 지나갔다. 그 엄마의 장례는 동네사람들이 치러주었고 두 아이는 고아원신세가 되었다. 두 아이가 어른이 된 후에 어머니의 무덤에 이렇게 써 놓은 묘비를 세웠단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본질은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일당 몇 푼을 받으며 일하였던 그 노동일까? 아니면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자신은 굶주리고 아이들을 먹이며 입혀주었던 그 배려일까?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들의 생명을 살려내느라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버렸던 그 희생에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랑의 절정도 우리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형벌에 있다. 찬송 작사자 F. R. Havergal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라고 찬송하였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깨닫고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고 주님의 목숨을 버려 영혼을 살려주셨으며 지금도 중보기도하시며 함께하고 계신다는 실존 때문인데 그 본질적인 결정체가 십자가인 것이다. 아멘. 하지만 예수님 당시 12제자들까지도 십자가를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가르치셨다.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32).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깨우치시려 하셨던 십자가의 핵심은 무엇인가? 설교본문을 보면서 함께 찾아보자.

1) 하나님의 뜻(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이 당당하였다. 특히 34절을 보면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성공도, 출세도, 부자도 아니고 십자가 제물로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인류구원을 완성함이었다. 구지 성공이란 말로 표현한다면 십자가에 제물로 받쳐짐 즉 그 ‘화목제물’ 됨이 하나님의 뜻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성공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목적지는 같았는데 그 목적은 너무나 달랐다. 제자들은 출세나 권세, 부를 잡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당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앞서 가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하셨다. 요 6:38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돌림으로 보았다(요 15: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7:4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을 믿고 똑같은 교회를 다닐지라도 그 목적은 엉뚱할 수 있다.

미국인과 한국인이 죽음에 대하는 입장은 너무나 다르단다. ‘자다가 죽는 것’과 ‘암 병으로 죽는 것’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하면 한국 사람은 90%이상 자다가 죽기를 원하는데, 놀랍게도 미국인은 90%이상 암 병으로 죽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미국인들의 답변은 “암 병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다. 본인이 준비하니 가족들도 따르고 그래서 준비된 죽음이라서 암 병을 복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의 영향이란다. 그렇다면 우리자신은 성경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점검해볼 일이다. 아멘.

2) 순종(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예수님은 앞장서서 가시고, 제자들은 놀라고,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였다고(‘놀라다’ ἐθαμβοῦντο 에쌈분토 θαμβεω 쌈베오의 미완료 수동태 astonish, awe-struck. ‘두려워하다’ ἐφοβοῦντο 에포분토 φοβεω 포베오의 미완료 수동태 terrify, to be fearfully anxious. 공포심에 사로잡힘이 서로 비슷함. 예수님과 너무나 상반됨). 그랬을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당할 일’ 때문이었다. 똑같은 ‘당할 일’인데도 예수님께는 확신을 주었고,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하였으니, 그래서“보라(ὅτι Ἰδου 호티 이두 왜냐하면 보라!) 이 차이의 이유는 말씀 깨달음에서 생겼다(“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2-34.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22).

중국어성경은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를 이렇게 번역하였다. “야소 재 전두 주 문도”(耶蘇 在 前頭 門徒라고, 걸음 보<步>가 아니고 달릴 주<>로). 예수님이 앞에서 달려가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장인데도 확신 때문에 달려가실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고통과 장애가 많은 사회에서 베드로는 위험해지면 당장 도망치기 좋게 멀찍이 따라갔다. 저와 여러분도 ‘멀찍이’를 점검해보자. 아멘.

3) 자원하심(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올라가다 ἀναβαίνω to climb, to go on board, to grow up as plant. 도착을 위한 전진, 자랑스러운 승진을 암시). 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실제로 고난과 사망이었다. 예수님의 영광은 왕좌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십자가형틀에서 이루어졌다. 얼마나 크나 큰 모순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순을 다 아시고도 앞장서서 가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중에 이렇게 가르쳤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님께서는 그 고된 십자가 구원의 길로 제자들을 강압적으로 떠밀어 넣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시고, 제자들에게 본을 이루시고 자원순종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아멘.

찬송가 324장을 생각해 보자.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오라고 하신다. 저와 여러분은 어디로 가는 중인가? 찬송가의 후렴에서는 무어라고 하나요?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 저와 여러분은 주님과 같이 가는 게 진심이라고 고백하는 찬송을 하는가? 찬송가대로 어디든지, 겟세마네 동산까지, 피땀 흘린 동산까지,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님과 같이 가는 저와 여러분이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에 비춰진 우리 자신을 보자. 다 공포심에 사로잡혔는데 십자가형장으로 당당히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 때문에, 깨달음대로 순종하심 때문에, 자원하는 순종 차이 때문이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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