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7일 설교
“내가 믿나이다!” (막 9:14~29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 21.2.7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천재화가 중 한 분인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가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성화를 그렸단다. 그 그림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윗부분 중앙에 예수님께서 흰 옷을 입고, 마치 춤추면서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이다. 그러고 양 옆에는 엘리야와 모세도 예언서와 십계명을 가슴에 품고 떠 있다. 그 아래 땅바닥에는 놀라서 엎드려 있는 세 제자의 모습인데 변화산 변형사건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반면에 그림의 2/3쯤 되는 아래편의 그림은 오늘 설교본문 말씀인 변화산 아래 동네에서 있었던 간질병 치유사건을 변화산 변형과 서로 대비시켜 그려놓았지요. 귀신들린 아이는 하얀 눈이고, 부모의 표정은 확연히 치료를 소원하였는데, 왼쪽 아래 한 제자는 성경을 보면서 해결책을 찾고 있지만,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하여 답답해하는 제자들이 역역하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모든 시선이 위를 쳐다보지 않고 있고, 답을 찾지 못해 소란한 표정이다. 그러는 중에 한 여인이 하늘색 가운을 걸치고 그 상황에 끼어들더니, 무릎을 꿇고 성경을 보고 있는 제자를 중심으로 제자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그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교회를 상징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교회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예수님께로, 복음으로, 생명세계로 인도하여주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리라.
오늘 설교본문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셔서 변형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체험을 시키신 후에 다시 돌아오셨을 때 있었던 일을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더불어 산에서 내려오시기 전까지 나머지 제자들은 너무나 난처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 처지를 좀 설명하면 이렇다. 어느 외아들이 귀신들린 후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데 간질병까지 심해졌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을 고쳐보려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지만 예수님은 안 계셨고, 예수님의 제자들 9명이 그 귀신을 쫓아내려고 온갖 씨름을 해봐도 소용없었다. 그러자 구경꾼들 중에서 서기관들이 시비하려고 논쟁을 걸었다.
서기관들은 평소에 예수님의 언행을 못마땅하게 여김으로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 정죄할 기회를 엿보던 나쁜 놈들이었으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홉 명이나 되는데 간질병자의 귀신을 내쫓지 못해서 쩔쩔매는 것을 보자 망신을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큰 무리 앞에서 제자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들 9명은 어찌나 곤욕스런 처지로 몰렸을지 쉽게 그려지는데 다행히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돌아오셔서 그 귀신을 쫓아내주심으로 예수님 덕분에 진땀나게 망신당한 일이 종료되었다.
그렇다면 이 간질환자의 사건을 통하여 마가는 무엇을 읽으라는 것인가?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증언설교를 직접 들어왔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치유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곤 하였다. 그렇다면 고후5:7에서 바울이 한 말씀처럼, 제자들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 할 때가 이미 지났지만 현실은 그렇게 못하고 있어서, 예수님 편에서 생각해보면 진실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부끄러움’은 일종의 양심반응인데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을 하고 그것을 시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소극적인 느낌의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인 삶의 용기이다. 부끄러움은 자각을 이루고, 겸손을 지나 새로운 결단을 선물한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를 좋아할 게 아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회가 건강하고 좋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회란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시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다운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신문이나 TV에 종종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분을 보통 죄인이라고 한다. 정의로운 땀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이기심과 게으름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아직 양심의 빛이 꺼지지 않았으니 소망을 가져도 된다. 자신의 욕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릴 줄 알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본문의 제자들도 부끄러움을 용감하게 시인하였다. 28절에 밝혀져 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6:12-13에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12-13)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은 이미 수많은 귀신들을 쫓아냈고 병도 고친 경력을 가진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실패했는가? 이 실패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실감나게 상기시켜준다. 첫째는 귀신이 들려 시달리는 사람이나 사회를 치유할 사명이 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떠나 계실 때 아홉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시비나 조롱을 당하는 한심한 처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교회의 이름만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 이름의 권능을 보여줌으로 영광 돌리는 일에 실패하지 말자는 것이다.
자 그러면 9제자들처럼 참담한 지도자로 시비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본문에 답이 있다.
1) 변론(16)
예수님께서 제자들 아홉 명에게 돌아오셨을 때 그들은 큰 무리와 서기관과 변론하고 있었다. 본문에 변론내용을 기록해 놓지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변론으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지적하셨던 게 '변론'이었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그만큼 변론은 불필요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 그랬을까? 변론상대가 바로 항상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였던 서기관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변론과 전도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우리는 전도가 아닌 변론이라면 피할 줄 알아야 한다. 아멘.
근심엽무(根深葉茂 뿌리가 깊으면 잎이 무성함. 비슷한 말로 樹大根深).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묻혀 있지만 그 역할을 첫 번째라고 한들 지나치지 않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얻어내고 그것을 모세관현상(毛細管現象)으로 뽑아 올려 보내서 나무기둥과 가지와 잎이 자라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만 뿌리가 있는 게 아니고 사람도 뿌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의 뿌리는 뭘까? 두뇌이다. 좀 자세히 살펴보면 두뇌의 주변에는 구멍이 7개나 있다. 눈과 귀, 코, 입이다. 이 7개의 구멍으로 사람은 누구나 보고 듣고 알아차려서 필요한 영양분을 몸으로 들여보내고 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먹고 말하는 것을 아무렇게나 하면 그 몸은 병들고 만다. 그래서 뇌는 그 수입을 조종하고 있는데 그 역할을 뿌리라고 하는 것이다. 변론을 분별하고 거절할 줄 아는 지혜로 신앙생활하길 축복한다. 아멘.
2) 믿음(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예수님의 진단이요 책망이었다. 마 17:20에는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해 놓았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생명력 있는 믿음인데, 섞임이 없는 ‘진실로’의 믿음이다(‘진실로’αμην 아멘 truly אמן 이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김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자식이 설명할 줄 몰라도 어머니를 완전히 신뢰하고 그냥 좋아서 품에 무조건 안기는 모습이다. 그 결과는 어머니는 모든 소유, 곧 사랑함과 보살핌, 먹임, 키움 등등 모조리 책임지고 그 아이에게 쏟아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야단치셨던 것이다. 그러자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그 자리에서 수정하고 시인하였다(24). 그러자 귀신은 떠났고 아들은 완치되었다.
우리 예수님은 좋은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니’(마 16:18)라고 가르치셨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은 마치 소금과 빛 같아서 그 교회는 속한 사회에서 짠맛이나 광명을 내어, 부패방지는 물론 병든 현상을 치료하는 기능까지 발휘한다. 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좋은 교회’는 3가지 조건으로 균형 잡혀 있었음을 사도행전과 중세 종교개혁이 잘 말해주는데, 그것은 첫째 말씀(Kerygma)이요, 둘째 사귐(Koinonia)이며, 셋째는 섬김(Diakonia)이다.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길 축복한다. 아멘.
3) 기도(29)
귀신추방 실패로 논쟁을 당해 난감했던 제자들이 그 실패이유를 예수님께 물어봤더니 예수님께서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셨다. “기도밖에 없다.” 이 대답이 또 우리에게 무엇을 웅변하고 있는가? 기도를 생략하고 마귀를 대항하면 딱 웃음거리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귀 앞에는 직분도 지식도 체력도 경력도 소용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들을 많이 내쫓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도를 생략했다가 간질귀신에게 패배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는지?” 이 대답을 알아야 한다. 이 정답은 마가복음 6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7) 그러고 8-9절에 보면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은 전도실습 파송하실 때 넉넉한 여행비나 준비물을 꼼꼼히 챙기라고 하시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명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되게 순종하는 일꾼은 전적으로 의지할 바는 오직 하나님뿐이고 임마누엘 하나님이 친히 해결하시도록 하는 일, 그것을 기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기도는 한때만, 1회용만 아니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저와 여러분에게 뚜렷하게 감동으로 다가온 믿음 신호등을 다시 확인하고 챙기자. 오늘 설교말씀은 귀신을 여러 번 쫓아냈지만 간질시키는 귀신에게는 패배한 제자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첫째는 기도부족이었고, 둘째는 아멘믿음에 불신앙이 섞였기 때문이며, 셋째는 변론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이 세 가지를 보았으니 저와 여러분은 자주 생각나고 반영하기를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