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 설교

“한 몸이 될지라!”(막 10:1-12 ‘성경이 의미하는 결혼’ 21.2.28)

의학적으로 효과가 없는 사실이 분명한 물질을 효력이 좋은 약으로 알고 섭취하면 통증이 완화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효과도 없는 것으로 약을 먹고 사람은 좋아졌다고 느끼는가? 대부분의 경우 플라시보 효과는 지속적이지 않아서,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의 몸은 완화된 통증을 경험한다. 그럴 때 사람의 몸은 ‘조금 낫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느낌은 사실상 착각이다. 이처럼 우리는 착각을 하지만, 착각을 하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약이 효과가 좋다는 말을 듣고 그 약을 먹었을 때,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는 뇌는 그 ‘좋다’는 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게 하고, 통증을 완화되도록 몸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착각의 긍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착각은 사람마다 자기수준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어린 아이가 해변에서 놀다가 엄마에게 달려와서 엄마의 손을 끌고 놀던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갈매기가 죽어있었다. “엄마, 새가 왜 이러고 있어?” “응∼ 새가 죽었네. 새가 그만 살고 싶어서 하늘나라로 올라간 거야.” 아이가 잠시 새를 보면서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시 집어던졌을까?” 새의 생명이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설명을 그냥 사실로 받아들이고, 왜 하나님은 그 새를 다시 해변으로 집어던졌느냐고 궁금해 하는 것도 아이의 생각수준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자신들의 착각을 행패버릇으로 예수님에게 억지 부리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누구인가? 바리새인들(2)이라고 밝혀놓았다. 설교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시험하려고 이혼이 합법적이냐고 묻고 예수님께서 대답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2-3).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이혼에 대한 주장은 두 학파로 나누어졌는데 랍비 샴마이 파는 보수주의로 이혼의 이유는 간음뿐이라고 가르쳤고, 랍비 힐랠파는 자유주의로 개방적이어서 남편이 얼마든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혼사유를 보면 ‘아침밥을 태웠음으로’ ‘반찬에 소금을 많이 넣었음으로’ ‘집안 청소가 형편없었음으로’ ‘남편에게 말대꾸를 심하게 했음으로’ ... 이다. 그 당시에 이혼은 얼마나 흔했겠는가?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방법 중의 하나는 현장에 참관하는 것이다. 설교본문도 자주 복음서에 나타나는 논쟁형식인데, ① 율법의 권위자들(바리새인, 서기관 등)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위험한 질문을 하면 ② 예수님은 즉답 대신 특이한 질문을 하시고 ③ 예수님은 그들의 대답을 듣고 그 대답을 활용하여 처음 질문에 답을 하신다. 설교본문도 똑같다. 시험하는 질문을 걸어오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질문을 새로운 관점에서 모세율법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단순암기만 하지 말고 스스로 그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차리게 도와주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율법말씀의 신앙생활화를 깨우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하셨고(“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사도 바울도 율법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말씀으로 그 자체가 거룩하고 선하며 의롭다(“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모세 때 이혼을 허용하신 것도 선한 의도로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신 24:1-4)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계명의 선함은 인간의 완악함을 예방함(재결합불가 신중)에 있다(5).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자체만 많이 읽고 암기를 자랑할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율법의 의미를 살리는 신앙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가? 우선 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을 잘 살펴보면서 배우고, 또 성령의 보혜사 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가장 조심할 바는 성경구절자체만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 자기 욕망을 채우는 억지이다. 실례를 하나 들면 “성경에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없잖아요.”하는 것이다. 아마 바리새인들도 이럴 수 있었다. “율법에 이혼하지 말라고 한 게 없잖아? 도리어 모세는 이혼하라고 허락했다구. 그러니 이제 난 네가 싫으니 이혼한다!” 이런 모습은 굉장히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완악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공개하면 다툼을 일으킬 소지가 큰 경우에 ‘불편한 진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분명한 사실을 쉬쉬하며 듣는다면 ‘그 사실’이 바로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불편한 진실을 덮어두고 쉬쉬하면 당장은 조용할지라도, 결국 도저히 해결할 수 없게 곪아터져 큰 난리를 만든다. 그러면 교회에서 불편한 진실은 무엇일까? 아마도 첫째가 일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죄를 덮어두고 쉬쉬한다. 하지만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불편한 진실로 만들지 않는데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불편한 진실로 덮어가서 예수님을 안타깝게 하였다.

자 그러면 성경을 끼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철저한 죄인으로 살아버린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그렇게 빗나가게 하였는가? 오늘 설교를 통하여 이것을 깨달으면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

1) 이혼증서(4)

이혼질문을 받았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고 전한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라고 하여 율법을 찾게 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에 기록된 대로 “이혼증서를 써주어 이혼을 허락했다”고 대답했다(“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이혼’ αποστασιον 아포스타시온 go away from, separate, let alone). 유대인의 결혼현실은 여자를 한낱 물건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런 생각이 완악함이다. 이혼증서는 장려보다 억제방책이기에, 자기욕심성취는 ‘성공’도 ‘성장’ ‘승리’도 아니요, 비극적인 불순종이다. 사무엘은 자기성취에 빠진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다(삼상 15:22) 바울도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라고 역설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14:11-12) 그렇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안’만 있다.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을 수도 없다. 둘 사이에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바깥’이 없다. 그렇다! 우주에도 ‘바깥’이 없다. 따라서 천지만물이 ‘안’에 있다. 안에 구름이 있고, 천둥번개가 있고, 산과 바다가 있고, 광산이 있고, 인간이 있고... 모든 게 있다. 맞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도 ‘안’만 있고 ‘바깥’은 없다. 바깥으로 나가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음부의 세계 지옥이다. 인간은 '바깥'이 없는 세상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다만 이 창조이치를 깨달아 알아차린 그리스도인에게만 그렇다는 것이다. 아멘.

2) 한 몸(8)

결혼은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음으로 한 몸(하나 됨)을 이룬다는 것이다(“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 로다.” 창 2:24 קבד 다바크 cleave, adhere, pursueָ, overtake) 사도 바울은 한 영이라고 강조했다(“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이니라.” 고전6:16-17). 이것은 따로 떼려 하여도 뗄 수 없도록 하나가 된 불가분리의 연합관계를 말한다.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하나로 결합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이 한 덩어리로 일체가 된다는 말이다(“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엡 5:31-32). 첫째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러니까 한 남자에 여러 여자로 창조하시거나 여러 남자에 한 여자로 창조하시지 아니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이혼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자기들 두 사람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결혼으로 남편과 아내는 한 몸으로 된다고 했는데, 자식은 부모의 모든 것을 섞어서 한 몸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부부가 이혼하는 것은 자녀의 몸을 둘로 쪼개는 짓이다. 그만큼 자녀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미국 명문 사립고에서 단 한 번이라도 컨닝을 들키면 퇴학당하는데 단, 한국 유학생들만 재시험의 기회를 줬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컨닝습관을 당장 끊기 어렵다고 배려했기 때문이었단다. 참으로 수치이다. 두뇌는 세계적이라 하면서 속임수로 이렇게 놀림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수한 두뇌로 부지런히 연구하고 분석하면 뛰어날 텐데 구태여 게으름을 속여서 정당화시키려하는지 안타갑기만 하다.

3) 간음(11)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산상수훈인 마 5:31-32에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하는 것은 간음죄라고 하셨다.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다. 또 간음죄를 남녀가 똑같이 해당된다고 하신 것은 남존여비 사회에서 혁명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혼불가’라는 대답을 확신하고 2가지 함정을 팠던 것이다. ① 무리를 분산시킴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거기에 모여든 무리를 간음한 자로 전락시키게 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항하면서 예수님을 등질 것으로 바리새인들이 예측했다는 것이다. ② 예수님을 죽일 기회였다. 막 3:6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 살해를 의논했는데, 예수님이 계셨던 요단 강 건너편(1)은 베레아였다. 그 당시 베레아는 분봉 왕 헤롯 통치하였다. 그런데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목 베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알지요.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막 6:18) 헤롯 왕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재혼하였다. 예수님의 대답대로 간음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겠는가? 바리새인들은 분봉 왕 헤롯의 손으로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함정을 팠던 것이다.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사로잡힌 말씀을 챙기자. 오늘 말씀은 이혼함정이다. 억제를 정당함으로, 한 몸 곡해로,

이혼을 간음으로 해석함을 역이용하여 살해시키려는 함정이었다. 성경도사라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자주 생각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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