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1일 설교

맛을 내라! (막 9:38-50 ‘사명감당하는 신앙인’ 21.2.21)

독일의 실존철학의 선구자 니체가 “인간의 정신발달에는 3단계가 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동물로 비유하여 아주 쉽게 설명했는데, 첫째가 낙타의 단계이다. 낙타는 덩치에 비해 겁이 많아서 귀에 파리 한 마리만 들어가도 난리소동을 편단다. 그렇지만 사막길에서 태양 볕과 지열 그리고 모래바람이 불어대도, 무거운 짐을 지우는 주인에게 대들지 않고 묵묵히 앞에 가는 낙타의 뒤를 따라갈 만큼 참아내며 복종을 잘한단다. 낙타에게 불평과 분노가 실제로 쌓이지만 주인에게 반항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낙타는 마지못해 복종하는 것이니 스트레스는 쌓여만 간다. 조선의 남존여비시대의 어머니들처럼 먹고 사려고 회사에 충성하는 월급쟁이들과 비슷하다. 둘째는 사자의 단계인데, 사자는 자신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당하면 누구에게나 대들만큼 용맹하고 위엄을 발휘한다. 문제는 자주 혼자 있고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지를 못한다는 점이다. 협력하는 일은 가끔 사냥 때뿐이다. 인간이 사자와 달리 만물의 영장으로 있는 것은 서로 합심하여 ‘상생 공동체’(相生共同體)를 이루기 때문이다. 독불장군은 혼자 똑똑한 것처럼 착각하기에 결국 고독한 외톨이로 남게 된다. 셋째는 어린아이의 단계이다. 어린아이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쉽게 잊어버림과 자신이 하는 일을 즐김이다. 어린아이들은 장난감을 차지하려고 서로 밀고 때리고 울다가도 언제 싸웠냐는 듯이 다시 손잡고 어울린다. 또 아이들은 고무줄 하나, 구슬 한 개를 가지고도 하루 종일 재미지게 논다. 이게 바로 애들의 일상이다. 지혜로운 사람 역시 뭐든지 마음에 꽁하게 담아 두지 않는다. 이것은 선택과 집중을 말한다. 이것저것 일만 벌리지 말고 한 가지라도 잘 선택하고 집중을 즐기라고 예수님도 마르다에게 권하였다. 즐기면서 집중하는 사람들을 당해 낼 방법은 궁색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진정한 지도자라면 “자신에게 명령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단다. 상관의 명령을 싫어하면서도 싫은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끌려가는 낙타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이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고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이지요. 머릿속에만 담아둔 지식은 잔소리꾼으로 전락시킬 뿐이고 실천할 때 성취를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자의 단호한 거부정신으로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을 즐기는 어린아이가 되어 집중해 보자. 그게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는 비결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우리 예수님께서 간절히 바라셨던 ‘섬김의 제자도’에서 멀어져 있는 12제자를 잘 보여주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38). 예수님을 믿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 제자공동체에 속하지도 않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병을 고쳤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제자의 특권이 침탈당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39-40)은 의외였다. 예수님 이름의 권능을 의지하고 귀신을 쫓아낸다면 제자가 아닐지라도 허락하라는 것이었다. ‘의탁한다’(επι 에피 )는 이름을 알고 실행하는 근거로 삼는 거다. 비록 제자훈련을 못 받았으나 주님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보혜사 되심에 잘 순종하는 성도인 것이다(“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또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전에 귀신들을 내쫓다가 간질병 외아들에게 낭패를 당하였지요. 자신들은 서툴면서 남들이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웃기는 열등의식이요 편 가르기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와 너무나 상반되는 옹졸파이다. 이런 옹졸파들은 자기들끼리도 권력쟁탈전만 심각하지 십자가 앞에서는 무능 그 자체이게 된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무엇이라고 정의했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아멘.

인도의 성자로 존경받는 간디가 “나라를 망치게 하는 사회의 큰 죄악 7가지”를 역설했는데(1934년) ① 원칙 없는 정치 ② 도덕 없는 상업 ③ 노동 없는 부 ④ 인격 없는 교육 ⑤ 인간성 없는 과학 ⑥ 양심 없는 쾌락 ⑦ 희생 없는 신앙이다. 한 마디로 군림하여 착취함을 적대시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선진국력은 어떻게 생길까? 많은 학자들이 미국정신의 뿌리는 청교도 신앙과 서부 개척정신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행동하는 그 위에 미국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미국화폐인 달러에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밝혀놓았는데, 미국만 유일하다. 하지만 미국국력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시 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라고 밝혀놓았다. 아멘.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구상하신 하나님의 자녀 삶의 주인공으로 좀처럼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천국백성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되는가?

1) 물 한 그릇(41)

예수님은 어린 아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가르치셨다. 영접이란 환영하며 잘 대접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사소한 일이 엄청난 평가를 받게 된다고 하셨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속한 자에게 그릇이라도 주면 정녕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거라고 밝히셨다. 예수님은 동전 두 푼을 헌금하던 과부를 보시고 헌금을 많이 하였다고 칭찬하셨고, 또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도 충성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다윗은 조그만 물맷돌 하나로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에게 승전하였다. 나아만 장군은 흙탕물에 7번 들어갔더니 문둥병이 순간적으로 완치되었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한 소년의 1인분 도시락(떡 5덩이와 물고기 2마리)을 놓고 감사기도 하여 사내장정 수만 세어도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하였다. 그러니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위로와 격려의 말 한 마디가 자살을 막아낼 수 있다. 가난하고 병약한 이웃들에게 국수 한 그릇, 속옷 한 벌, 냉수 한 컵, 그까짓 것 같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하면 예수님은 아주 귀한 일로 평가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전도여행을 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건 어렵지만 내 집 근처나 친척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할 수 있다. 우리가 신학교 교수처럼 성경을 가르칠 수 없지만, 어린 아이들이나 포장마차에서 볼품없는 과일을 사 주면서 예수님을 말해줄 수는 있다. 이게 물 한 그릇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길은 일방도로이다. 단 한 번만 지나가는 인생행로에서 가난과 병고, 고독과 억눌림에 붙잡혀있는 이들을 지나치게 되는데 그때 예수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을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길 축복한다. 아멘.

2) 실족(42)

σκανδαλιση ἕνα των μικρων τουτων των πιστευοντων εις εμε ... και βεβληται εις την θαλασσαν. 스칸달리세 헤나 톤 미크론 투톤 톤 피스튜온톤 에이스 에메 ... 카이 베블레타이 에이스 텐 쌀라스산. 나 자신을 믿는 이 작은 자의 하나를 실족시키면 ... 그리고 그는 바다에 던져짐을 당했다(σκανδαλιση 스칸달리세 σκανδαλιζω 스칸달리조<길에 을 놓다, 걸려서 넘어지게 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 단수. βεβληται βαλλω의 완료 수동태 he was thrown into the sea. 자살이 아닌 타살!<‘작은 자’가 죽음>).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였다면 작은 자의 목에 연자맷돌을 달아 바다에 던진 게 낫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만큼 실족시킨 죄가 크다는 뜻이요 반대로 전도를 막중하게 평가하신다는 사실이다. ‘작은 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도 포함된다. 로마서 15장 1절에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새번역)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혹시 나의 말과 행동 때문에, 주일 예배당과 엿새 동안 세상에서 모습이 너무 달라서 다른 사람의 신앙에 갈등을 준 일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묶고 물에 빠뜨릴 정도로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3) 소금화목(50)

ἔχετε εν ἑαυτοις ἁλα και εἰρηνευετε εν αλληλοις 에케테 엔 헤아우토이스 할라 카이 에이레뉴에테 엔 알렐로이스 너희 자신 속에 소금을 지녀라. 그리고 서로 화평하라.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우리도 소금의 의미인 하나님의 정의 유지를 살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금의 의미는 실제로 성령의 보혜사 역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사람을 유지함('화평')이다.

영생의 길을 무조건 방해하는 자는 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단호한 결단을 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 결단은 죄를 범한 육체의 그 부분을 절단할 만큼이다(43-47). 그렇지 않으면 죄의 유혹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저는 다리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καλον εστιν σε 칼론 에스틴 세 “너에게 좋다(good, beautiful, excellent, worthy, right, virtue)” 43, 45, 47 불구자 양산을 의미히지 않음). 신체의 장애는 당사자에게 불편과 불만, 불행이다. 하지만 그 장애의 고충과 영생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된다는 것이다.

송나라 때 한 농부가 밭에서 쟁기질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토끼 한 마리가 쏜살같이 뛰어오더니 나무 그루터기에 ‘꽝!’ 하고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하였다. 농부는 얼른 그 토끼를 잡았다. 그런데 그 불로소득이 문제였다. 여러분도 예상하지요? 그 후로 농부는 쟁기질을 하지 않고 ‘또 멍청한 토끼가 오지 않나?’ 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렸단다. 이 예화는 중국 송(宋)나라 때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蠹 나라를 좀먹는 다섯 가지)에 나오는 수주대토(守株待兎 지킬 수, 그루 주, 기다릴 대, 토끼 토)의 우화이다. 요행으로 과거에 성공한 전략을 안일하게 또 사용하면 바보 된다는 것이다. 죄는 늘 요행심리를 충동질한다.

자 이제 오늘 설교가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을 확인하자. 올바른 천국일꾼은 특권차별을 하지 않는다. 오직 물 한 그릇으로 천국 상을 만들고, 나 자신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게 하고, 나 스스로 죄에 민감하며, 하나님의 언약은 살아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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