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4일 설교

토론한 게 무엇이야?(막 9:30-37 ‘예수님께서 원하신 제자’ 21.2.14)

지금도 우리나라는 총리나 장관으로 발탁되면 굉장히 자랑되는 일이라서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장관’을 영어로 minister라고 하지요. 그런데 minister라는 단어는 목회자라는 뜻도 있는데, 봉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하는 일이 봉사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장관이 된 후에 봉사하는 일보다 부정을 저질러 들키고 감옥에 가 계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되지요. 그 사람들은 장관을 서열의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궁금해 하던 게 뭐던가? 나이이다. 또 학번을 따져보고, 동성동본이면 촌수를 따져본다. 서열을 정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형님을 결정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직분은 철저하게 봉사직이지만, 한국교회는 서열계급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인의 명함에 간혹 ‘장로’라고 기록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런 명함은 한국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로는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꾼이기에, 교회 밖에 알릴 필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 웃기는 모순 중에 하나가 바로 ‘당회장’이라는 말이다. 당회장이란 단어는 본래 당회의 회의 때 사회를 보는 의장이라서 서열과 무관하다. 그런데 ‘목사님이 근무하는 방’을 ‘당회장실’이라고 표시해놓는데, 당회를 하지도 않는 빈 방이 어떻게 당회장실이 될 수 있는지... 또 ‘목사님’이라고 하면 되는데 ‘당회장님’이라고 부르고, ‘노회장’, ‘총회장’은 더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직분을 굉장한 감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선조들은 동문서답(東問西答 동쪽을 물었더니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으로,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대답함)이나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은 자리에 누워있어도 각자의 꿈이 다르다)이라고 했다. 같은 길을 가면서 같은 자리에 있어도 생각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교회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나의 가치관과 삶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포장하는지 판가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자훈련 마지막 단계 때, 예수님과 너무나 빗나간 꿈을 꾸고 있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35.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맨 끝에서 시중을 들고 있어야 마땅할 사람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니 한심한 모순! 이라는 것임). 꼴찌가 첫머리로 자리바꿈 좀 했던 게 그토록 심각한 일이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은 오늘날도 재현될 수 있는 일로 교회의 비극이며 암 같은 망조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큰 권능의 비밀이 기도에 있음을 은밀하게 알게 되었고(29), 검증된 권능의 은사도 기도생략으로 무능해진다는 원리를 깨달았다. 이것은 굉장한 믿음의 진보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십자가죽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처음 들었을 때처럼 수박겉핥기로 듣고 항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깨닫지 못하고도 혼날까봐 묻지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제물은 예수님의 공생애 구원사역의 근본이었다(​“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죽음의 핵심인 ‘섬기는 제자도’를 깨우치고 계신데도, 제자들은 여지없이 정반대인 ‘누가 크냐’의 성공에만 몰두해 있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왕으로 취임하실 텐데 그 전에 서열정리를 잠정적으로 해두어야 그때에 혼란과 분열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림자도 그릴 수 없는 신앙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돈을 많이 벌어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가 풍부해지면 겸손해지고 하나님께 가깝게 하던가요? 세상과 가까워져서 교만해지던가? 대부분 돈을 많이 소유할수록 세상으로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겠지요. 사업을 기울어지게 하셔서, 직원들을 내보내다가, 회사를 폐업처리 시킨다. 그러고 어느 날 아파트가 압류되고, 경매처리 된다. 사장은 응급실로 실려 가더니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퇴원한다. 그럴 때 그 사장은 세상으로 빠지던가요? 하나님을 찾던가요? 두 손 들지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셔서 성공하게 되면, 하나님을 무시할까 봐 하나님이 여기 끝으로 오게 하셨군요. 감사합니다!” 하면서 하나님께 바짝 다가간다. 그때 이렇게 설교할 수 있다. “망한 게 복이라고... 망하지 않았으면, 정말 망한다!”라고. 이 세상에서 사업은 망할 수 있다. 그러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망한 게 아니다. 하지만 풍부하게 살아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사망의 삶이다. 제자들이 사망신앙의 습관을 아직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

자 그러면 사망신앙관을 십자가에 못 박고 순종하는 제자로 충성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1) 깨달음(32)

깨닫지 못함은 어떠한 현상을 가리키는가? 예수님의 말씀 듣고 문장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막 8:17-19) 오병이어 기적 때 ‘열둘’을 보고 듣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ἦν το ῥῆμα τοῦτο κεκρυμμενον απ αυτῶν και οὐκ εγινωσκον τα λεγομενα

was(ing) saying this hid from them and not they understood the things which was said

산고의 고통을 언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자만큼 그 실체를 알고 깨닫는 것과 다르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학식을 갖춘 유대인의 관원. 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깨닫지 못함. ‘거듭남’이란 사전적 의미는 알아들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을 자신의 지식논리 경험사고로는 어머니의 모태로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사탄의 사고방식이라면 예수님과 동상이몽을 한다!

2) 잠잠함(34)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서 다투었는데 예수님이 물어봤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다 아셨지만 그들의 토론이 잘못됐음을 깨우치려고 물어본 것이다(επηρωτα αυτους τι εν τῇ ὁδῷ διελογιζεσθε. επερωταω(ask)의 미완료, διαλογιζομαι(dispute. doubt)의 미완료, σιωπαω(to keep silence)의 미완료(εσιωπων) 계속 논쟁하고, 계속 물어보고, 계속 입을 다물고(제자들은 오랫동안 서로가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임, 그 토론내용은 누가 크냐<34>. 잠잠할 만 했지요. 떳떳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양심반응이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 23:5-7 말씀처럼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위선 사고방식이 아직도 제자들에게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연설을 마치면 통상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데, 테레사 수녀가 미국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을 때 이상하게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고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것은 숨 막히는 감동이 미국 국회원들의 가슴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박수칠 여유를 갖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테레사 수녀가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단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하면 잠잠하게 되는 법이다. ‘누가 크냐’고 한참 논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다. 아멘.

3) 영접(37 εμε δεχηται οὐκ εμε δεχεται αλλα τον. δεχηται he shall receive, δεχεται he receive)

한글성경 35절 끝 부분을 “되어야 하리라”(ἔσται he shall be)라고 번역해 놓았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주시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되리라’로 번역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교만의 결과’를 밝히 보여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첫 자리만 차지하면, 심판 때 그 사람은 뭇 사람의 꼴찌 시중꾼으로 강등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바로잡으시고, 겸손한 일꾼에게 보상하시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높였던 바리새인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춘 세리는 높여주셨다. 그렇다. 유대인의 인생 교훈서 잠 16:18 말씀과 같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했다. 설교본문 37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 아이는 나약한 존재였다. 35절 말씀처럼 표현하면 ‘뭇 사람의 끝’이다.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 앞에서 겸손한 섬김을 실체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다.

한국교회의 초기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이 새로 도착한 후배 선교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사회는 모든 게 권력구조이다. 그래서 윗자리와 아랫자리를 잘 구분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방은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이 있으니 잘 살펴봐야 한다.” 그러자 신참 선교사가 물었다. “그러면 한국인의 방에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이라는 표시가 있습니까?” “그러한 표시는 없다. 분위기로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방언의 은사를 너무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활용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방언을 주신 이유를 알자는 것이다. 방언기도로 교회의 유익을 이루면 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2, 4). 하나님은 신앙생활로 자기의 덕,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자주 생각나기를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나 자신의 화살표로 감동시킨 그 말씀을 챙기자. 오늘 설교는 제자다운 가치관과 그 섬김 삶을 보여주시고 깨우치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셨다(깨달음, 잘 못 시인, 영접의 현재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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