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5일 설교

“디모데라야!” (빌 2:19-24 “예수님의 일” 2021.12.5.)

돈을 빌려 쓴 집사님이 도망친 바람에 권사님이 시름을 이기지 못하여 새벽기도에 불참하고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하여 위로하고 기도를 해도 시름을 털어버리지 못하자, 목사님이 다른 권사님과 함께 심방을 갔는데 함께 간 권사님이 대뜸 이렇게 권면하더란다. “권사님, 하나님이 다 아셔. 권사님은 권사답게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해버려.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갑절로 갚아주실거라구. 아니 뭘 꾸물거려. 얼른 ‘아멘’ 하지!” ‘아멘’을 하지 못하는 권사님이 좀 안타까웠지만, 권면하는 권사님은 역시 ‘살아 실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목사님이 감격했고, 그런 후로 목사님은 심방을 갈 때마다 그 권사님을 불러 동행했단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그 권사님이 구역 집사님에게 보증사기를 당했다. 하도 ‘공장이 부도난다’라고 해서 보증을 서 줬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다. 그래서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몇 주째 예배당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목사님이 심방을 갔더니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 계셨다. 그럴지라도 목사님은 믿고 “권사님, 하나님이 다 아셔요. 권사님은 권사답게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하세요.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갑절로 갚아주실 겁니다.” 그러자 누워계시던 권사님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나는 용서 못 해요. 내가 왜 박 집사 빚을 떠안습니까? 끝까지 쫓아가서 그 돈 다 받아낼 겁니다.” 목사님은 작년에 권사님이 권면한 그대로 권면했는데...

몇 년 후에 그 목사님은 지방 도시로 교회를 옮기고 목회를 하는데, 어느 초신자가 교회등록을 하고 한참 은혜에 빠지더니 그만 같은 남선교회 집사님이 돈을 떼먹고 이사 가버렸다. 이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 한참 은혜를 받고 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가 된 격이었다. 목사님은 참으로 난감한 심정으로 일단 심방을 갔더니, 그 초신자가 먼저 이런 말을 하더란다. “목사님, 내 돈을 떼먹은 집사님을 용서하는 게 믿는 사람의 도리지요? 믿음으로 빌려줬으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려보렵니다.” 괜히 목사님의 얼굴이 화끈거려졌지만, 마음은 뿌듯하더란다. 사도행전의 진짜 그리스도인을 만났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설교 본문도 참으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을 곁에 두고 있어서 자긍심에 차 있는 사도 바울을 보여 준다(19-20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특사로 보낼 수 있음을 대단히 만족해하고 있음<ἵνα κἀγὼ εὐψυχῶ 히나 카고 유프쉬코 “that I also encouraged” -NKJV- εὐψυχῶ = to animate, encourage>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꼭 보내려고 하는 이유는 ➀ 빌립보 교회에 바울의 근황<近況>을 전하여 빌립보 교회를 위로하고 ➁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와 전해줄 빌립보 교회에 대한 소식으로 바울 자신이 활기를 얻는 것).

이러한 기대를 바울이 하게 된 것은 디모데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뜻을 같이하여 ισοψυχον 이소프쉬콘 same breath of life”<ισος 이소스 equal + ψυχη 프쉬케 soul, breath of life>. “생각할”<μεριμναω anxious> 디모데는 바울과 친밀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앙관과 그 삶이었음. 그래서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에 가면 바울 자신과 일치한 신앙지도를 잘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바울이 가졌던 것임.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οὐδένα γὰρ ἔχω For I have no one like him. “예수님의 일들”<οὐ τ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 일들”을 앞세우는 일꾼들은 많았음<21>).

故 함석헌 선생이 남긴 시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 사람’을 가졌다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든든해지고 무슨 위기에 몰린들 평정심을 갖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살아가면서 숱한 인간관계를 겪는다. 그 만남과 헤어짐이 상생이었기에 두고두고 그리운 추억으로 있는가 하면,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분노를 일으키는 배신은 아프고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인간(人間 사람과 사람 사이)이라고 부르잖아요.

자 그러면 디모데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사도 바울의 신임을 독차지하게 되었는가?

1) 연단(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δοκιμαζω 도키마조 to prove by trial, judge worthy, 製鍊).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특사로 디모데 만한 적격자가 없다는 근거로 디모데가 많은 연단을 통하여 갖추게 된 성숙한 믿음을 제시했는데, 디모데가 어떠한 연단을 받았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그 당시 빌립보 교회는 디모데의 연단과 그 다듬어짐과 충실함을 이미 목격한 바였다는 것이다. 빌레몬서 1장 1절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바울과 감옥살이 동지라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여러 가지로 강조할 수 있지만 저는 형통 훈련을 귀중히 본다. 요셉은 17살인데도 이복형제들의 잘못(רָעָ֖ה 라아 evil)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יָּבֵא 야베 bring 미완료). 그렇지만 아버지는 요셉만 채색옷을 입힐 정도로 편애하였다. 또 요셉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꿈(지도자로 쓰심)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자랑하기에 바빴다(וְהִנֵּה 웨힌네 behold 3번 반복함!). 그러니까 네 어머니의 이복형님들과 갈등 속에서 편애, 그리고 본인의 방정맞은 경솔함까지...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특이하게 애굽의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로 불순 기질을 다 뽑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동시에 임마누엘에 의한 형통 성품을 갖추게 하신 후에 애굽의 총리로 사용하셨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복음 증거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앞세우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처지를 먼저 기준으로 삼아왔다면, 그것은 신앙훈련 부족이요 연단에 의한 불순한 기질이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No Cross No Crown)고 하는 것이다.

2) 수고(22)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δουλευω 둘류오 노예처럼 일하다. 디모데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종이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복종하며 헌신했음을 말해 준다. 그러니 바울은 디모데의 순종과 충성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씀이다. 딤전 1:2에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밝혀놓았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 최후에 함께하고 싶어 찾았던 사람이 디모데였다(“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딤후 6:6, 9). 저와 여러분도 정말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하고 싶어 찾는 산 생명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시가 있는 아침’ 시의 시대 무정란​ -이창기(1959~ )

라면이 끓는 사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낸다. 무정란이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다. 누군가 그를 낳은 것이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그가 누굴 닮았건, 그가 누구이건 인 마이 마인드, 인 마이 하트, 인 마이 소울을 외치면 곧장 가격표가 붙고 유통된다. 소비는 그의 약속된 미래다. 그는 완전한 무엇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누군가를 애끓게 사랑했던 기억도 없다. 그런데 까보면 노른자도 있다. 진짜 같다.

암탉이 교배 없이 혼자 낳은 알이라서, 나중에 병아리로 태어날 수 없는 달걀을 무정란(無精卵)이라 하고, 암탉이 수탉과 교배하여 낳아서 병아리로 부화할 수 있는 달걀을 유정란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맛 차이는 없고, 영양분도 단백질이나 지방, 탄수화물, 칼륨 등 차이가 없다고 밝혀졌다. 가격 차이는 닭을 키우는 사육장의 환경 차이로 유정란이 더 비싼 것이다.

이창기 시인은 무정란과 유정란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듯이 시와 ‘시 못 되는 시’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고 외쳤다. ‘시 못 되는 시’가 넘쳐나는 세태를 꼬집는 시이다. 이 세상은 무정란이다. 생명이 없는 사회, 정치, 교육, 문화, 지식, 종교... 교회나 설교까지도 무정란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무리 설교를 품고 있어 봐야 생명으로 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정란 신앙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3) 보아서(23)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αφοραω 아포라오 αφο<from> + ὁραω<호라오, to see distinctly, fixedly, earnestly. “~에 눈을 고정시키다, 집중해서 주목하다.”> 바울은 곧 재판을 받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재판의 결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와 온갖 핍박에 시달린 채 없는 질병도 생겨나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이러한 고충 중에 따뜻한 손길이 절박할 텐데 바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디모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이런 속담이 있지요. “검은 머리 가진 짐승은 구제 말란다.” 사람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을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보험금을 노리고 부부도 살해하고, 피를 나눈 부모자녀라도 살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뢰받는 성도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춰보자. 히브리서 10:16-17에는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새 언약이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화목제물로 자기의 마음속, 중심에 자리 잡게 하여 항상 순종과 충성하는 삶으로 초지일관(初志一貫)하라는 것이다. 해당하길 축복한다. 아멘.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