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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31일 설교

“주의 마음에 든지라!” (왕상 3:4-13 “송구영신”) 21. 12. 31. 11:30.

제가 어린 시절에는 동네 어머니들이 절 입구의 개울에서 새벽에 그 차가운 물로 온몸을 씻고 부처상 앞에서 삼천 번 절을 올리거나 집 장독에서도 빌었다. 그들은 그렇게 힘들게 하면 지극한 정성이고, 부처나 조상신이 감동하여 문제의 질병이나 고민, 가난을 해결하여 준다고 생각하였다. 또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종이학 천 마리 접기가 유행이었다. 색종이로 종이학을 접어 큼직한 유리병에 모아서 예쁘게 포장하여 평소에 좋아해 오던 이성 친구에게 선물로 주면서 간절한 마음을 전하였다. 그러면 그 지극 정성에 상대방이 감동하리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색종이를 접기 대신 꽃가게에 가서 장미꽃 백 송이, 나중에는 천 송이를 배달해서 사랑 고백을 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부처 조각 상에게 하는 삼천 배나, 종이학 천 마리나, 장미꽃 1000송이를 바치는 것에서 결국 한 가지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눈물겨운 정성으로 상대를 감동시키겠다는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이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지성감천의 문화 속에 살아와서 그런지, 애절한 정성 행위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는 일이 교회에서도 심심찮게 이루어지곤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십일작정 금식기도’ ‘일천번제’라는 헌금이다. 물론 ‘사십일 작정 금식기도’나 ‘일천번제’ 그 용어 자체는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의 정황과 우리의 현실이 너무 다르고 겨우 용어만 긍정할 수 있는 정도라는 점이다. ‘일천번제’의 경우, 그 원조는 솔로몬의 일천 번제이겠지요. 헌금 봉투에 ‘일천번제’라고 인쇄하여, 소원하는 기도제목을 적을 수 있고 심지어 몇 번째 헌금인지 표기할 수 있게 만들어 교회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교회는 ‘일천번제 새벽기도회’ ‘일천번제 예배’ 등등을 진행하고 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를 정직하게 깨닫는 밤이기를 축복한다. 설교 본문은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3대 왕으로 통치하다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구하게 하시고 결국 ‘지혜와 총명, 부귀, 영광’까지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선 질문부터 해 보자. 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축복을 풍성하게 주셨는가? ① 일천번제 때문에 ② 장소 때문에 ③ 구하는 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④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러면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는 그 현장으로 가보자.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4) 우선 띄어쓰기를 알고 읽자. ‘일천, 번, 제’가 아니다 (‘일천 + 번제’<일천 마리의 번제 예물들 a thousand burnt offerings> ‘일천 + 번 + 제’<일천 횟수의 제물 thousand times offerings> 한자의 번역도 ‘一千 燔祭’<태울 번, 제사 제>이지 번<番 순서 번>이 아님. “Now the king went to Gibeon to sacrifice there, for that was the great high place: Solomon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 on that altar.” -NKJV- 부정관사 ‘a’로 번역한 것은 1000마리 희생물을 ‘한 번’에 드린 제사로 보았기 때문에 단수로 표현한 것임. אֶלֶף עֹלֹות יַעֲלֶה 엘레프 올로트 야알레 offered/ burnt offering/ a thousand. “올라”<עֹלָה 번제, ‘제단에서 온전히 태우는 제물 제사’ an offering burned completely on alter>. 이 번제는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수단이 결코 아님. 범과를 용서받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제사는 화목제였음). 솔로몬 왕이 드린 제사는 ‘1000마리의 번제’였지 ‘일천 번의 제사’가 아니었다. ‘일천’이라는 숫자만 생각하고 ‘아멘!’ 한다면 솔로몬 왕과 전혀 상관없는 제사를 만드는 짓이 된다.

또 솔로몬의 나이는 20살쯤으로 본다(1 “혼인”). 솔로몬은 다윗과 불륜관계로 맺어진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이의 두 번째 아들 서자이고, 이방 여인과도 결혼하였으며, 나중에 후궁을 700명이나 두었다(“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왕상 11:3, 9-10). 솔로몬은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에 빠질 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별명으로 ‘흑백’을 생각나게 한다. 솔로몬의 지혜는 명 재판과 열왕기상 4장에 기록된 대로 거룩한 성전건축, 잠언 3000, 시 1005편, 식물과 동물의 지식, 전도서로 추앙받는 것은 분명히 ‘백’이지요. 그러나 솔로몬이 여인의 치마폭에 빠져 하나님을 떠난 통치로 자기 아들 대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게 하고, 천국의 상도 날려버린 것은 ‘암흑’이 선명하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금 수저’나 ‘흙수저’를 다 살아봤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강조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 적격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젊은이 2명이 심하게 말다툼을 하더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50대의 아저씨가 참다못해 두 젊은이에게 꾸지람하는 말이 “어이 청년들, 싸우려면 교회로 가서 싸우지 왜 지하철에서 싸워?”라고 하더란다. 교회를 싸움터로 인식시킨 장본인은 누구일까? 누구를 따져보기 전에 우리의 교회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리 교인들이 대충 교회라는 글자 정도만 알고 감으로 교회를 다니지 교회의 실체를 배우고 인식하지 못하니까 동내 아저씨들이 교회를 엉뚱하게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교회로 가서 싸우라’는 말이나 ‘일천번제 헌금봉투’나 빗나가기는 다 똑같다.

자 그러면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를 더 살펴보고 우리는 올바로 시도하고 솔로몬 왕이 받은 복을 기대하자.

1) 기브온(4)

솔로몬 왕은 일천 번제를 일부러 기브온으로 가서 드린 이유는 분명하였다.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대하 1:1<"견고", "창대">, 6 번제답게 드릴 수 있는 곳!)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크다’는 말씀을 오해하지 말자. 사실 솔로몬 왕이 바친 번제물 천 마리는 큰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쓰는 하루 먹거리는 잘 빻은 밀가루 서른 섬과 거친 밀가루 예순 섬과 살진 소 열 마리와 목장 소가 스무 마리와 양 백 마리이고, 그 밖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다.”(왕상 4:22-23 새 번역). 이렇게나 솔로몬 왕의 하루 식사가 엄청났다. 천 마리라면 솔로몬에게 열흘 식사 정도인데, 지극 정성으로 바쳐서 크다고 한다면 억지이다(대상 29:4, 7에 보면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7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하여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만 다릭 은 만 달란트와 놋 만팔천 달란트와 철 십만 달란트를 드리고” 금 102t + 190t = 292t, 은 280t + 380t = 660t).

그런데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10km 거리였다. 솔로몬 왕은 통치하는데 정권이 견고하고 나라가 창대한데, 번제가 그렇게 필요했을까? 하지만 예배를 중요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대단히 크게 보신다. 성경에 보면 1년간 홍수가 끝나자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도 번제였고,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와서 거처를 옮길 때마다 번제부터 드렸다고 했다. 우리가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일은 한 주간의 첫날이니 자신의 삶에서 예배를 제1순위로 삼고, 첫 시작을 예배로 하나님께 드림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배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면 아직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1순위가 아니라는 실증이다.

굿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게’ 맞지만, 예배는 보는 게 아니라 바침이 핵심이다. 목사님은 예배드리고 교인들이 예배를 본다면 그 예배는 공연이나 쇼지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만인 제사장 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분이 각각 제사장이라는 것임. 구약 때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뵙던 대제사장처럼!).

2) 큰 은혜(6)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하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내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시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대하 1:8-9) 그러면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은 삼하 7:12, 16에 밝혀져 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오신 것은 일천 마리나 되는 번제 제물에 감동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중요시하는 솔로몬 왕이기에, 잘하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충분히 보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는 맹목적인 탐욕대로 하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예수님의 십자가를 ‘화목제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롬 3:25-26).

3) 듣는 마음(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 (“The speech pleased the LORD, that Solomon had asked this king.” -NKJV-).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언약하신 그 왕, “종은 작은 아이”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 “듣는 마음”(לֵב שֹׁמֵעַ 렙 쇼메아 Listening Heart 청종 聽從 “an understanding heart” -NKJV- “a discerning heart” -NIV- “지혜와 지식”<대하 1:10>,

지혜로운 사람은 귀와 마음이 열려있어서 곧잘 타인의 말을 잘 들어 온전해가지만, 어리석은 자는 귀와 생각이 꽉 막혀서 대부분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고집을 앞세우기 때문에 답답함) 자기의 경험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솔로몬 왕은 겨우 20살이었으니, 사실 세상 물정이나 왕의 통치철학을 갖출 나이는 아니지요. 그러면서도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고 자신만만할 철부지 나이였다. 그런데도 솔로몬 왕은 자신을 낮췄다. 겸손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솔로몬은 왕다운 통치 사명(“Solomon had asked this king.”) 충실하려고 열심히 듣겠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간청하였는데, 그것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וַיִּיטַב הַדָּבָר 와이이탑 핫다발 the word, and pleased).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응답하신 이유는 확실하셨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12-13) 이제 솔로몬 왕은 독보적인 통치를 할 수 있게 됐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은혜의 원리를 터득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이 가리키는 신호등을 확인하자. “하나님께서는 주께 순종하는 것이 희생헌물보다 낫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 양의 기름보다 낫다.”(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왕위를 박탈할 때 한 말임. 삼상 15:22). 또 (미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인본주의 열심을 순종이라고 착각에서 깨어나 하나님께서 찾오시는 열심을 순종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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