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6일 설교
“달려가노라!” (빌 3:10-16 “바울의 믿음 푯대” 2021.12.26.)
이웃나라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우찌무라 간죠가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부자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받았단다. 그 부자는 평소에 우찌무라 간죠를 존경해왔기에, 음식을 정성껏 차려서 예의 바르게 대접하였다. 우찌무라는 식사를 다 마치고 집을 나서며 그 부자에게 이런 인사를 하였단다. “오늘 초대해준 저녁 식사 잘 먹었다. 이 돼지야!” 순간적으로 그 부자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겠지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그토록 존경한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식사 대접을 했더니, 기껏 인사란 게 돼지라... 분통을 억제하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우찌무라 간죠는 온 국민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그런 저속한 말을 자신에게만 했을까? 그분의 인품으로 보아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혹시 분명한 의도가 담긴 말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자기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그래, 내 삶이란 게 우찌무라 간조의 눈에는 돼지나 다름없게 보인 거다. 돼지가 뭔가? 매일 먹고 자고 하다가 죽어버리면 끝나는 짐승이 돼지 아닌가!” 다음날 그 부자는 우찌무라 간죠 선생을 찾아가 자신의 돼지 인생을 실토하고 그 인생을 청산하고자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잠깐 생각해보자. 우찌무라 간죠의 잘 알려진 식견이나 인품, 초대식사 등등을 참고할 때 몰지각하게 부정적인 결례를 함부로 범한 자인가? 아니면 신앙 식견을 양심적으로 밝힌 그리스도인인가?
오늘 설교 본문도 작심하고 자신의 신앙 중심을 내보이는 바울을 보게 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11 εἴ πως καταντήσω εἰς τὴν ἐξανάστασιν τὴν ἐκ νεκρῶν. 에이 포스 카탄테소 에이스 텐 에크싸나스타신 텐 에크 네크론 If/ by any means/ I might attain/ onto/ the resurrection/ the from/ dead). “이르려 하노니”<καταντήσω 카탄테소 ‘도달하다’ ‘획득하다’ ‘달성하다’> ‘에’<εἰς 에이스 onto 향하여 들어감> ‘가운데서’<ἐκ 에크 from 죽음에서 출발해서 부활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임>.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에 달성(達成)되기를 바라는 강력한 소망으로 신앙생활을 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설명을 잘 듣고 암기하고 이해한 인간의 지식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도마가 잘 보여주고 있다. 부활 신앙을 가지기 이전에 도마는 사실 증거주의자였다. 사실 증거주의는 의심을 잘하고, 의심은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는데 큰 방해를 한다. 도마는 꼭꼭 따지기를 잘하고 막히면 의심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어떻게 홍해가 갈라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어떻게 믿느냐?” “보지 않았으니 의심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면서 도마가 그랬다. 도마가 누구였는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분이었다. 그만큼 신앙훈련을 철저히 받았던 도마였지만 부활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만 행하신 구원사건이요, 믿음의 세계에서만 알 수 있는 신비한 일이다.
요한복음 14장 2, 5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실 것을 이렇게 말 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도마는 무슨 길인지 전혀 몰라,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 말씀이해의 난이도를 보고 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2-34)
그렇지만 부활 신앙인은 굉장히 다르게 신앙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느 한국인이 미국여행을 하다가 어느 마을에서 자기 고장의 야구팀이 지고 있는데, 모두 싱글벙글 웃으며 그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궁금해서 물어봤단다. “당신들의 팀이 지고 있는데, 왜 그렇게 즐겁게 시청하고 있습니까?” 그때 한 분이 설명해주었다. “아! 이 방송은 어제의 경기를 재방송하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팀이 계속 지고 있다가 9회 말 역전 홈런으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지금 지고 있어도 마지막에 멋지게 역전승할 것을 아니까 즐겁게 시청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영생 복락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 패배한 듯 보여 힘들어도 영생 복락에 이르게 될 그 날을 확신하고 환란 중에도 즐겁게 충성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낙심과 좌절, 포기할 처지에서도 소망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며,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바울을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부활 신앙 삶의 실제를 확인해 보고 필요한 것을 챙기자.
1) 참여(10)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τοῦ γνῶναι αὐτὸν καὶ τὴν δύναμιν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αὐτοῦ καὶ κοινωνίαν παθημάτων αὐτοῦ, συμμορφιζόμενος τῷ θανάτῳ αὐτοῦ) “알고자”(γνῶναι 그노나이 γινωσκω 기노스코, 단순히 두뇌로 아는 지식적 개념보다 친밀한 교제를 통한 인식이다. 그리고 “고난”(παθημάτων 파데마톤 복수, 많은 고난을 겪으셨음) “본받아” συμμορφιζόμενος 쉽모르피조메노스 ‘같은 모양을 가지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같은 모양을 가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런 고백을 볼 때, 바울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함이 부활에 이르는 방법임을 알았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 18:24-25).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1-2, 5-6).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바로 체험적인 인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백두산 천지”에 대해서 익숙하다. 우리나라 애국가에 나올 만큼 최고의 산이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대부분 백두산에 가보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은 믿음으로 말하면 백두산을 아는 게 아니라 백두산에 대하여 암기한 것이다.
흔히 교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독생자요,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과 그 권능의 크심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통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암기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은 확신이다. 명심하자.
2) 잊어버리고(13)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 말씀은 ‘기억하지 못함’이 아니라, ‘마음을 옛것에 묶지 않음’이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매 맞고, 돌로 맞고, 강도의 위험도 당하고 수없이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고후 11:22-27). 그는 재판받는 자리에서 복음을 밝혔고,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에게 예수님을 알려주었다. 유라굴로 폭풍 속에 표류하는 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그는 감옥에서 천리만리 떨어진 골로새, 빌립보,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에게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업적을 잊겠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행 26:16). 바울의 주인은 예수님이셨고, 그 종 인식이 살아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다 잊고 다음 일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는 주인되시는 예수님께 온통 집중하였다. 믿음의 진보를 가장 훼방하는 것은 자아 중심이다. 이것은 겸손을 병들게 한다. 나를 드러내면 제자 됨은 사라는 법이다. 교회를 영어로 church라고 하는데, 이 말은 ‘퀴리아코스’(κυριακός ‘주님의 것’ 즉 ‘하나님의 소유’)에서 만들어진다. 바울은 하나님의 소유됨을 잃지 않는 전도, 봉사, 헌신, 충성, 헌금, 기도, 찬양, 예배 ... 철저히 했다.
3) 달려가노라(14)
예수님에 대한 지식 말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부활의 권능을 소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할 일’을 잘해 상을 받으려고 “달려간다”는 것이다(“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διώκω εἰς 디오코 에이스 고대로마는 3가지 때(최단거리 200m 경주, 전차경기, 사냥) “διώκω!”(‘전력 질주!’ ‘최단거리!’ ‘All-in!’)라고 외쳤단다. 목표성취를 위한 적극성과 집중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운동경기자들은 준비훈련을 하는 동안 음식과 오락, 수면을 절제한다. 몇 분밖에 안 되는 경기를 위하여 몇 년 동안 자신과 싸우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그 결과물이 영광의 승리이다. 올바른 산모는 열 달 동안 태교로 준비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우리는 바울의 열정을 달라고 간구할 일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화살표를 다시 확인해 보자. “우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든지 지금까지 따른 법칙에 따라 계속 그대로 살도록 합시다.”(16 –현대인의 성경- “그대로” τῷ αὐτῷ 토 아우토 ‘그 자신에게’ 그 자신은 바로 ‘성경말씀’임. ‘by the same rule’ –NKJV- “행할 것이라”는 στοιχεῖν 스토이케인 ‘일렬로 나아가다’ ‘자기 행위를 맞추다’ 지금까지 지켜왔던 법칙을 흐트러짐 없이 지속해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신앙 삶은 과거적이든지, 현실적이든지, 미래적이게 된다. 과거지향의 신앙인은 지난날의 자랑에 치우치고, 미래지향적인 신앙인은 하나님의 언약과 평가에 맞추고 동참한다. 그러므로 ‘소망이 살아있다’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철저하게 미래지향이었다. 우리도 시도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