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5일 설교
“목자들의 성탄을 이어가자!” (눅 2:15-20 “성탄의 영향”) 06. 12. 24, 90. 12. 23, 21. 12. 25.
제임스 심프슨(James Simpon 1811-1871)은 마취제를 발견했던 영국 의사이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교의 외과 의사요 교수로 재직하면서, 환자들이 수술 중에 비명을 지르는 고통에 통감하였다. 그러다가 창세기 2장 21-22절을 읽으면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갈비뼈 하나를 떼어 내는 것은 의사의 식견으로 볼 때 큰 수술이었다. 그렇게 큰 수술을 받는 동안 아담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잠들어 있었고, 잠에서 깨어나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환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프슨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재우셨듯이 환자를 잠재우고 수술하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결국 1847년 11월(36세)에 ‘클로로포름’(chloroform)이라는 마취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 황실은 그가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빵집에서 태어난 서민이나, 모든 수술 환자의 고통을 덜어준 공로를 칭찬하고 의사로서는 최초로 ‘Sir(경)’이라는 칭호를 허락했단다.
심프슨은 말년에 한 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단다. “선생님, 의사의 생애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발견은 무엇이었습니까?” 학생의 대부분은 당연히 ‘클로로포름’이라고 대답할 줄로 생각하였는데, 심프슨은 이렇게 대답했단다. “나의 가장 큰 발견은, 내가 큰 죄인이며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남이 그렇게 소중했을까? 우리 다 같이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우리 자신도 심프슨 의사처럼 생각하는지?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이 그토록 큰 의미를 주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심프슨처럼 예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바로 오늘 설교 본문에서 보여주는 목자들이 그랬다.
목자들은 양 떼를 돌보고 있었다. 사건은 밤중에 생겼는데, 밤중에 갑자기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고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탄생한 사실을 알려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목자들이 천사에게 들었던 소식을 요약하면 3가지였다. 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② 아기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③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심은 큰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저랑 같이 목자들이 당했던 그 사건 현장으로 가보자. 목자들은 밤중에 천사에게 새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전해준 처사는 떠나고 없다. 이제는 새 소식을 들었던 목자들과 양 떼만 들판에 어제오늘처럼 남아있다. 그럴 때 목자들은 어떻게 하는 게 정답인가? 이런 정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슷하게 생기기 때문이다. 목자들의 반응은 15절부터 17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대로, 목자들은 당장 중대한 결심을 하고 행동에 옮기자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베들레헴까지 가서 천사가 알려준 새 소식을 직접 점검해 보는 것’이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 밤중에 꼭 그렇게 필요한 일이었는가? 그것도 밤중인데 지키던 양 떼를 놔 두고!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는가?
베들레헴은 대도시도 소문난 명소도 아니었다. 더구나 신앙적으로 신성한 곳으로 유명한 신온성도 예루살렘도 이스라엘 수도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시골 동네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왜 하필이면 그 밤중에 양 떼를 지키다 말고 베들레헴까지 가야만 했는지? 이렇게 목자들의 중심이 궁금해지니 성경을 보면서 직접 확인해 보자.
1) 이루어진 일(15)
목자들은 그 밤중에 베들레헴까지 갔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명한 결행이 되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베들레헴에서만 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언약성취 때문이었다. 오늘 설교본문에는 ‘이루어진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선언하시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자기 종들을 보내며 예언의 말씀으로 반복하셨는데 드디어 베들레헴에서 실현 성취하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사건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생명의 말씀 사건이 베들레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창세기 1장 3절처럼 “빛이 있어라”라는 말씀에 조금도 틀림없이 빛이 생겨나는 말씀 사건!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말씀이 베들레헴 촌 동네에 있다는 것이다(하나님의 언약 성취 He story, history). 이제 목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목격하게 될 것이니 “참 잘~한 것이다!”
올해 우리는 성탄절을 통하여 무엇을 체험해야 하는가? 요란한 캐롤송? 찬란한 츄리? 풍성한 선물? 망년회를 겸한 회식? 이것들은 성탄의 곁가지들이지 본질이 아니다.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진 성탄은 오히려 초라한 시골 동네의 사건답게 소박했고 순수했지만,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심을 핵심으로 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상 삶에서 이루어질 때 올바른 성탄절이다. 영으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사고방식, 습관, 성질)에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 예수님이 없는 요란함이나 휘청거림은 성탄의 헛것이다. 목자들은 성육신의 현장, 하나님의 언약실현의 현장, 믿음이 생겨나고, 강화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진보하는 그 사건에 동참하느라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아멘.
2) 전하니(17)
목자들이 밤중에 베들레헴까지 가서 했던 일은 또 무엇이었는가?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라.”(17) 전혀 나무랄 데 없이 알뜰한 전도였다. 천사에게 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그대로 전하는 게 명품 전도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하려고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갔고, 가서 잘 해냈다. “전도하게 하는 체험!” “전도하게 하는 성경공부” “전도하게 하는 예배”가 올바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전도 없는 예배, 전도 없는 교회 생활이 은근슬쩍 자리 잡았다. 왜 예수님은 말 밥통까지 오셔야 했는가? 대답은 많겠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우리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보좌를 떠나 이 땅 죄인 소굴, 인간 세상으로 오신 핵심적인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전도’였다. 그러므로 전도 없는 교회 생활, 전도 없는 성탄절은 목자들의 성탄절과 많이 빗나간 풍속도인 것이다.
목자들을 보자(19). 그들은 마리아의 마음 밭에 천사의 말을 심어놓았다. 양 떼를 지키던 일을 중단하고 그 밤중에, 찾아가서, 전도했다. 우리는 이번 성탄절에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가? 바울은 이 ‘전도’를 하지 아니하면, 하지 아니하면, 하지 아니하면 “화!”라고 인식하였다. 선지자 요나는 이 ‘전도’를 거역하다가 지옥(‘스올’ 욘 2:2) 같은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전도하다가 순교를 당한 성도들은 천국에서 제단 옆에서 세마포 옷을 입고 찬송한다고 성경(계 6:9, 11)이 말해 준다. 그렇다면 우리라도 전도되는 성탄절로 바꿔나가길 축복한다. 아멘.
3) 찬송(20)
눅 2:9의 무서움과 20의 찬송, 이 차이는 무엇인가? 왜 겁쟁이가 대장부로 돌변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바로 성탄체험의 핵심이요 필요성이다. 성경에 보면 모세, 다윗, 다니엘, 베드로, 사도 요한, 바울 등등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살았던 사람은 많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원천은 사실상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생겨났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이러한 권능을 얻는 기회여야 한다. 20절에 “인하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일”을 들었고 또 보았을 때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요 1:14에도 아기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밝혀져 있는데, 그 은혜를, 그 진리를 체험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송하는 삶이 가능해진다. 대충 겉치레나 형식적인 행사로 끝내는 성탄절은 이제 그만하고, 은혜의 본질을 목격하고 소유하는 성탄절을 실현해야 한다. 목자들이 그랬다. 성탄은 목자들에게 확신에 찬 기쁨을 주었고, 감사와 감격 때문에 저절로 찬송을 드리게 됐다.
자 그러면 목자들에게 물어보자. 당신들처럼 성탄을 통하여 좋은 영향과 변화,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성탄은 목자들에게 정말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도 성탄절을 그러한 기회 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현미경으로 목자들을 살펴보자. 목자들은 천사를 만났을 때 무서워 벌벌 떠네요. 그러나 천사의 말에 관심을 보이고, 찬성하고, 확인해 보자고 180°로 달라지네요. “서로 말하되” “빨리 가서” 이러한 모습은 천사의 말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는 모습이고, 평소에 교육을 받아 알고 있는 내용일 때 가능해진다. 결정적인 단서는 “주께서”(15)라는 말이다. 목자들은 ‘우리 주님이 보내신 천사를 우리가 만났다‘라고 판단하는데, 이것은 사전교육을 입증해 준다. 목자들이 당장 기가 막히게 성탄에 참여한 것은 즉흥적으로, 우연의 일치로 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충분한 설명과 예견과 기다림으로 된 일이었다. 그래서 신앙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위대한 전도자요 성직자이며 찬송가 작시자인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6살 때 목사로 키우려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11살 때 학교를 중단하고,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배에서 살았다. 그는 배에서 선원들로부터 온갖 나쁜 행위를 보고 배웠다. 그러다가 20살 때 선장이 됐다. 그 배는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는 배였다. 뉴턴은 노예를 상어에게 먹이로 주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단다. 그렇게 3년 후 대서양에서 큰 폭풍은 만나 파선 직전으로 몰렸고 배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럴 때 뉴턴은 무릎 꿇고 간구했다. 그 기도로 폭풍을 벗어나게 됐다. 그러고 뉴턴은 배에서 독학했고, 39세에 성공회 성직자가 됐다. 그리고 54세 때 자기 간증을 ‘놀라우신 은혜’(Amazing Grace)라는 찬송가를 작시했다.
문제는 뉴턴이 그 폭풍 속에서 어떻게 기도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6살 때 돌아가셨던 어머니의 기도 삶이었다. 뉴턴의 어머니는 기도 생활로 하나님을 만나곤 했지만, 아들에게는 교육이었다. 이 삶의 교육이 목자들에게도 있었고 결정적일 때 삶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자. 우리는 성탄절에 베들레헴에 꼭 가야 한다. 베들레헴은 ‘떡집’(밥집, 양식이 있는 집, 말씀의 집, 교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설교가 있는 성탄절! 목자들처럼 설교의 말씀을 목격하고, 체험하며, 확인하는 성탄절의 주인공이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