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9일 설교

“오직 하나님의 의!”(빌 3:1-9 “그리스도인의 가치” 2021.12.19.)

급히 돌아가는 길은 원심력 때문에 바깥쪽이 높아야 차가 제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도로 면의 경사가 덜하면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은 길을 돌다가 이탈하고 만다. 입체교차로 입구 1km 이전에 ‘속도제한 40Km’라는 표지판을 세워놓았지만 도로 면의 좌우 경사가 완만해 수시로 대형 트럭이 전복사고를 냈단다. 전복한 차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입체교차로를 고치려면 엄청난 돈이 드니까 못 고치는가 보다. 도로를 만들 때 좀 올바로 잘할 것이지...”

그런데 그 입체교차로에서 전복사고를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차들이 대부분 속도를 지키고 천천히 돌아가니까 전복사고는 사라져갔다. 그렇다면 ‘속도제한 표지판’은 예전에도 뚜렷했는데 왜 그렇게 자주 전복사고가 났을까요? 운전자들이 속도제한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면 운전자들이 왜 갑자기 속도를 지켰을까요? 교차로 입구에 카메라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소액의 카메라 한 대가 골칫거리였던 거액의 공사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탈함으로 자신도 고통을 당하고 남에게도 큰 피해를 준다. 어떤 피해는 평생 고통을 주는 것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는가? 해답은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이다. 목사님이 북한을 방문한 후에 이런 말을 했단다. “북한에 가서 지낸 날들이 내 평생 가장 거룩하게 산 나날이었다.” 왜 그랬을까요? 북한에 갔더니 감시자가 24시간 따라다니더란다. 감시자가 지켜보니까 목사답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임마누엘 하나님이 24시간 함께 계신다. 이 사실을 시인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항상 하나님 뜻을 철저히 순종하게 된다. 그러니 임마누엘을 시인하면 되는데 대신 암기로 끝내려는 신앙생활이 큰 문제인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위장 신앙생활에 속지 말라고 애써 강조하는 바울을 보게 된다. 바울은 설교 본문을 “끝으로”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현대 교인들은 옛날과 달리 긴 설교를 싫어한다. 그래서 설교 중에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면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라는 말을 해놓고 설교를 금방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에는 ‘last but not least’라는 말이 있다. ‘마지막이지만 덜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뜻인데, 연설할 때 마지막 중요한 내용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바울이 설교 본문을 ‘끝으로’라고 시작했는데, 옛 개역 성경은 ‘종말로’라고 번역함으로 바울이 ‘심판의 종말’에 관하여 말하려는 것으로 오해해서 ‘끝으로’라고 바꿨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 Finally이다. 그런데 ‘끝으로’라는 말은 ‘금방 끝난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설교 본문은 빌립보서의 절반에 위치한다. 바울은 대단히 논리적으로 성경들을 기록하였다. 끝으로 한 마디만 더하겠다고 해놓고 성경의 절반을 더 써가는 그러한 모순을 범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끝으로’라고 말한 것은 한마디만 더하고 끝내겠다는 뜻이 아니라, 엄청 중요한 내용을 말하겠다는 것이었다.

바울이 밝히려는 중요한 내용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이었다. 이 ‘기뻐함’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에게 권능과 위로를 공급받고 반응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85)처럼, 고난으로 힘들어 지칠 때 예수님이 나의 중보자로 도와주시니 산 소망으로 찬송하며 밝아지고, 우울해질 때도 우리의 목자 예수님께 나아가면 다시 열정을 회복하지요. 이것이 ‘주 안에서 기쁨’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충성수준을 높일 수 있다. 반대로 불평과 짜증 중이라면 순종과 충성은 너무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뻐함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 믿음 생활을 우리에게 가능하도록 만든다. 하박국 선지자도 말했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이 ‘주안에서 기쁨’을 망쳐놓는 나쁜 놈들이 빌립보 교회에 끼어들었다. 그 나쁜 놈들은 바로 거짓 교사들이었다. 2절에 보면 바울은 “개들”과 “행악자들”로 호칭했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두 짐승은 돼지와 개이다. 그것은 부정 때문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유대주의, 율법주의자였기에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 싸인이었다. 싸인 없는 계약은 무효지요.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백성 됨을 계약하고 보증으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남겼다. 화가의 낙인과 같았다. 이 계약보증은 아브라함의 후손 대대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갓난아기에게 할례를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을 경외심으로 감사했고, 그 소중함의 인식은 최고조에 달했겠죠! 그러니 이스라엘인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의 필연이었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은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서도 정정당당하게 할례를 강요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를 생각나게 한다. 자 그러면 바울이 그토록 ‘개들’이요 ‘행악자들’이라고 비판하였던 가짜들에게 속아서 기쁨을 상실한 신앙생활을 예방하려면 무엇을 잘해야 하는가? 바울의 설명에 주목하자.

1) 삼가라(2 Βλέπετε τοὺς κύνας, βλέπετε τοὺς κακοὺς ἐργάτας, βλέπετε τὴν κατατομήν.)

“삼가라”(Βλέπω 블레포, 관찰+知+조심 ≠ 보인대로 인식함<유대주의 율법주의자들을 대충 살펴봄>). 그들은 육체의 할례만 있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의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바울은 전혀 달랐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그래서 빌립보 교회는 혼동과 갈등으로 기쁨을 잃게 됐다. 그 소식을 들었던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개들”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며 삼가 살피라고 하였다. 우리도 비슷한 실태를 볼 수 있다. 임직 일자부터 계산하여 ‘성직자 몇 년’이라고 칭송하는 경우이다. 성직자답게 충성한 그 일들과 시간을 따져보지 않는 것은 할례 표시만 중요시하는 ‘개들’과 다를 바 없다.

어느 술꾼이 밤에 만취하여 비틀거리며 귀가하는 중이었다. ‘갈지 자’로 비틀거리는 걸어가다가 그만 어느 할아버지와 부딪히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넘어져 ‘쿵!’ 하더니 엎드려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중상이라는 생각에 “하라부지, 일어나 보세요.” 할아버지는 엎드린 채 꼼짝 않고 아무 말도 없었다. 술꾼은 너무 황당해서 조심스럽게 그 할아버지를 업고 자기 집으로 갔다. 그러고 할아버지를 침대에 눕히고 자기도 쓰러져 잠들었다. 술꾼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웬 KFC 할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더란다.

만취로 술꾼의 판단력이 바닥난 것이다. 그런데 술만 판단력을 떨어뜨리는가? 탐욕도 사람의 판단력을 흩으러 놓기 일쑤이다. 또 누군가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좋지만, 그분에게 종속되어 맹종하는 것도 이 술꾼이 저지른 실수나 마찬가지이다. 사상이나 이념, 정치적 성향, 종교 모두 마찬가지이다. 사랑과 정의를 외면한 판단이라면 무시해도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코를 꿰어서 끌고 가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조사하고 연구하며 고민과 함께 기도하는 과정에 함께하시며 묵묵히 도우신다. 아멘.

2) 배설물(8 )

바울은 육체적인 자랑거리가 풍성했다. 로마시민권, 가말리엘이라는 최고의 학벌, 출생 8일 만에 할례받음, 베냐민 지파(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베냐민 지파), 바리새인(분리주의자, 차별화).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보니, 예수님 밖에서 최고의 스펙들이 예수님 안에서는 부끄러운 배설물로 보였다(“배설물로 여기다” ἡγοῦμαι I count). 가치관의 대변화이다. “고상하다”(ὑπερέχον 휘페레코 현재 분사, ὑπερ + έχω 탁월하다, 능가하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모든 별이 사라짐처럼). 골 2:3에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라고 밝혀놓았다. 그 감추어진 비밀을 맛보면 ‘보화’의 인식이 바뀌고 삶도 바로 복음 체질로 변한다. 그러면 유대주의는 아주 하찮아지고, 지금도 살아서 보혜사 하시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임마누엘에 충실하게 된다.

3) 의(9)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ἀλλὰ τὴν διὰ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τὴν ἐκ θεοῦ δικαιοσύνην. ἀλλὰ 알라 강조, διὰ 디아 수단과 방법, ἐκ 에크 출처)

유대주의자들은 자기 것 자랑과 자아의 열심이 강하여 특별히 자신 돋보이기 명수였다. 그렇게 되면 새로 생겨난 예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옛 유대교로 되돌려서 새 복음을 유대주의 교회라는 헌 부대에 담으려는 짓을 했던 것이다. 우리도 예수복음의 새 시대를 거부하는 보수주의가 있다. 고집일 뿐이요, 바리새인 교회로 둔갑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은 절대 필요이고, 그 의미를 따라 순종하면 된다. 이러한 순종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으로 행한다고 예수니께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아멘.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공감을 얻고 있다. 누구나 1만 시간을 노력하면 유능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론이 생긴다. 평생을 밥해온 부인들은 왜 반찬 맛이 똑같은가? 일류 학벌들이 국회에 들어가는데 왜 국회는 조금도 변화하지 못하는가? 그 비밀한 대답은 그들 모두가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을 생략한 탓이다. 이 말은 부족한 부분을 고치려는 집중훈련은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능한 전문가를 꿈꾸고 1만 시간만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올바로 계획한 연습 시간을 채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매 주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똑같이 반복하면 믿음의 진보는 그대로이다. 설교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 옛 체질과 옛 습관을 새롭게 갱신해갈 때 유능해지는 것이다. 그 갱신은 과감하게 도려내고 또 확실하게 붙잡기도 하는 것인데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움이다. 이게 설교 본문을 통해 바울이 강조한 바이다. 저와 여러분의 정답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하자. 한국교회는 아직도 보수주의의 자랑이 먹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7~80년대 산업화 발전에 따른 가시적 번영의 흐름이었다. 본질이 아닌 그 번영을 오늘의 교회들이 “삼가라”(Βλέπω 블레포, 관찰 + 知 + 조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바울의 용어로 ‘해로운 배설물들’을 추려내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버리려고 했던 것은 유대주의이고 세상적인 자랑이며 쉽고 편하다는 가짜 은혜였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예수교가 아니었다! 명심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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