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2일 설교

“에바브로디도처럼!” (빌 2:25-30“바울의 동역자” 2021.12.12.)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뉴저지 주에서 한인 목회를 하다가 아프리카의 서부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후배 선교사님이 메일로 보내온 사연이다. 자기 지역에 거주하는 선교사님들과 교제를 시작하면서 처음 만나는 선교사님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머뭇거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저절로 머리 숙여 존경할 정도로 선교사역을 하는 성실한 선교사님들이 계시는가 하면, 한편으로 ‘선교사’라는 호칭과 부적합한 삶을 살아가는 가짜들도 적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재물에 묶이고, 자녀에게 묶이고, 고국의 부모님께 묶인 삶을 살면서도 고국에 가면 교회 강단에 서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 헌신하는 삶으로 선교하는 것처럼 설교하곤 하는데, 그것은 둔갑에 능한 전형적인 삯꾼 선교사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믿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추상화처럼 모호해지는 무엇을 믿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기에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타했고, 예수님도 저주에 가까운 진노로 대하셨음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일하심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발견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배나 기도의 행위로만 대신할 게 아니라, 일상 삶으로 자연스럽게 생활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이 세상 삶에서 실체화하는 중에 예배로 구체화시킬 때,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허상일 뿐, 삶과 별개인 신비주의 논리로 전락하게 된다. 자신이 성경을 통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언약성취를 믿음의 삶으로 살아가지 않는 교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인과 많이 빗나간 종교인이다. 아멘.

오늘 설교 본문도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굉장히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살펴보자(25 上, “필요한 줄로” Ἀναγκαῖον 아낭카이온 necessary, right, closely connected 디모데 대신 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내는 게 단순한 공감 정도가 아니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따른 불가피한 일로 판단했음<28>).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그만큼 훌륭하게 본 이유는 ① 성경을 많이 읽고 씀 ② 설교를 많이 듣고 암기함 ③ 성경이 보여주는 순종을 잘하는 믿음 생활 ④ 그냥 이쁘고 부자라서. (제 설교 중에는 자주 3번이 정답이라고 했음)

설교 본문 30절에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는 바울의 도우미를 그리스도의 일로 알고 순교도 각오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 보자. 세상살이에서 할 일은 많다. 나름대로 돈을 벌고 싶고, 성공도 하고, 출세하고 싶은 게 누구나 타고난 성품인데...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의 일을‘그리스도의 일’로 알고 자기의 목숨까지 내놓고 바울을 도와줬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하고 그 댓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조 투쟁까지도 하는데,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게 댓가라면 댓가였다. 그야말로 바보나 정신병자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헌신 정도’나 ‘믿음 수준’을 일방적으로 동일시할 수 없음을 에바브로디도가 믿음 생활로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믿음 생활의 이치를 가르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순신 장군도 불신자였지만 “必死則生 必生則死”(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라는 가치관으로 조국에 충성을 다 했다.

스펄젼(Charles H. Spurgeon) 목사님이 런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느 집사님이 주일마다 예배 후에 목사님의 방으로 찾아와서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받아가더니 매일 아침 그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였단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별세하게 되자 스펄젼 목사님이 그분의 장례예배 때 이런 말을 했단다. “사랑하는 집사님이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할 때 주일마다 예배 후에 제 방에 와서 첫 예배자들의 이름을 받아들고 가서 매일 기도해 왔습니다. 제 목회를 나누어 짊어진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저에게 참으로 든든한 일꾼이었습니다.” 숨어서 목회를 돕는 스펄젼 목사님의 목회 일원(牧會一員)이었다는 것이다. 에바브로디도 역시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우미였다.

자 그러면 오늘은 유능한 믿음 도우미 에바브로디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바를 챙기자.

1) 함께 수고(25)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5가지로 호칭했는데(‘형제’, ‘함께 수고’, ‘함께 군사’, ‘사자’, ‘돕는 자’ 모두 값진 호칭임) 그중에 하나가 “함께 수고하고”(συνεργὸν 쉬네르곤 companion in labour. ‘동역자’<同役者> ‘synergy’라는 말이 파생됨)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하여 복음 사역을 하면 상승효과를 뚜렷하게 이루는 친밀한 관계였는데, 이런 경우는 대부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예수님께서 전도훈련을 시키실 때 12제자나 70명을 “둘씩” 내보내시는 것을 보아도 확실해진다. 어떤 교인은 믿음 생활을 혼자 하면 좋아하는데, 서로 건강한 신앙공동체를 이루도록 협력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그러한 교인은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아 강해져 있는 자아 때문에 그렇다. 고집이지요.

아기를 출산한 어머니는 양 젖가슴에 아기가 먹을 젖이 저장되기 시작한단다. 그래서 아기는 먹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젖을 팔아먹고 건강하게 자라게 된다. 그러나 젖을 잘 먹던 아기라도 병을 앓게 되면 그 아기는 입에 넣어준 젖꼭지를 혀로 내밀어내며 젖 빨기를 거부하는데, 그러면 아기 엄마는 젖가슴의 통증으로 고충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목회에도 생긴다. 건강한 교우라도 시험에 들면 영혼의 양식을 거절하기 시작하지요. 그러면 목사는 설교를 준비하고 증언하는데 무척 고통스러워진다. 그러한 날이 점점 길어질수록 목자의 심령은 지치고 상해 간다. 그렇지만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목자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받아먹는다. 그러고 그 설교의 깨달음을 믿음 생활에 반영하며 상호 협력한다. 밝고 맑은 교회는 교우들이 항상 영혼의 양식을 갈망하고, 목사님은 영혼의 양식을 준비하는 즐거움과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법이다. 설교를 잘 흡수하는 성도나 증언하는 목사님이 함께 행복해할 때 성령의 보혜사 되심에 잘 순종하는 교회이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잔뜩 기대한다. 아멘.

2) 돕는 자(25)

“내가 쓸 것을 돕는 자”(λειτουργὸν τῆς χρείας μου 레이투르곤 테스 크레이아스 무 he that ministered = ‘제사장의 직무’/ the need/ my.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꼭 필요한 도우미로 보냈다는 것임). 에바브로디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빌립보 교회에도 ‘꼭 필요한 일꾼’이었고 바울에게도 ‘꼭 필요한 일꾼’이었다.

일본 선교사님이 동경 어느 도서관에서 일제강점기 때 조선 땅에서 벌어진 일들을 일본제국에 보고한 내용을 발견하고 살펴보니까 이런 내용도 있더란다. 평양 경찰서에서 어느 동네 파출소로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잡아내라”는 지시문을 내렸더니 그 파출소에서 질의서를 올렸다. “누가 참여했는지 어떻게 알아내서 잡아냅니까?” 경찰서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잡아다 심문해라. 그들은 거짓말할 줄 모른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알고 있던 평양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얼굴이요, 신용장이었다. 엄청난 신임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의 교회들은 어떠한 평을 받고 있나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거짓말 잘한다.” “돈 잘 떼 먹는다.” 이러니 전도가 되겠는가?

저와 여러분은 성경을 쓰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인정받아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3) 근심(26)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ἐπειδὴ ἐπιποθῶν ἦν πάντας ὑμᾶς 에피포돈<미완료 was longing> 갓난아이가 젖을 간절히 원하는 것(벧전 2:2) “For he longs for all of you” -NIV-.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강렬한 열망으로 사모했는지를 보여준다. 또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회가 들은 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27절에 “죽게 되었으나”라는 말씀은 심각한 병세를 말해 준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에게 근심거리가 됐다고 생각하고 심히 근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27) 에바브로디도의 죽을 병을 하나님이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그럴 때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의 병으로 근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받을 충격을 근심하였다. 하지만 에바브로디도의 치유는 바울이 시달리던 이중근심(“sorrow upon sorrow” NIV)을 날려버렸다.

디모데후서 4:10에 보면 사도 바울이 목회자요 아들인 디모데에게 가슴 아픈 말을 남겼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바울과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선교했던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남아서 함께한다고 했다. 반드시 필요하여 초청받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나 하나님의 일에 다 귀하고 값진 것이다. 우리는 필요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낸 신앙생활의 본보기를 챙기자. 그 본보기는 에바브로디도였고, 에바브로디도는 평신도였다. 그는 성공을 포기하더라도 자신의 희생을 선택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수고는 빌립보 교회의 심부름꾼과 바울의 도우미로 요약할 수 있다. ‘평신도’를 영어로 Laymen이라고 한다. 어원은 헬라어 λαος(the common people, ὁ λαός the people of Israel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다. 그런데 교회는 평신도가 99%이다. 따라서 평신도의 협력 없이 교회의 건강이나 부흥을 기대할 수 없다. 목사가 평신도를 무시하면 병든 교회이고, 평신도 역시 목회자를 견제해도 큰 탈이다. 목사와 평신도는 악한 세력과 함께 싸우는 군사들로 각각 맡겨진 역할을 잘할 때 교회는 존경을 받는데, 에바브로디도와 바울이 그랬다. 우리 교회의 본보기이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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