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7일 설교

“소망따라 살자!”(빌 1:19-26 “기도와 조화되는 삶” 2021.11.7.)

한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열풍에 휩싸이고 있다. 드라마의 핵심소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노상 해봤던 게임들인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순으로 진행된다. 옛적에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놀이’였는데,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는 현대인의 병폐인 ‘한탕주의’의 기회로 지옥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드라마는 참가자 456명의 목숨을 각각 1억 원으로 책정하고, 6게임을 하는 동안에 탈락하면 당장 개죽음을 당하고 그 사람의 몸값 1억 원은 다음 게임의 총액에 포함되는데, 최종까지 살아남는 자가 456억 원을 몽땅 받는 조건이다.

첫 게임에서 절반이 탈락하고 그 돈은 다음 게임에 포함되는데, 그것은 한탕주의에 걸려들었다가 첫 단계에서 목숨을 빼앗긴 사람이 228명이나 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살아남은 참가자들이 노발대발하고, 당장 게임을 중단하자고 항의하지만, 결국 엄청난 큰돈의 유혹에 자기 목숨을 담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게임을 계속 진행하게 된다. 남은 참가자들은 그 게임을 이기려고 단합과 폭언, 속임수, 협박, 살인까지 점점 험악해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려고 온갖 계략이나 편법, 흉계도 가리지 않는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처절하게 혼자 살아남아 팔자 고칠 그 456억을 차지했지만, 그 큰돈은 통장에 입금되어 있을 뿐... 자신은 10,000원을 구걸하며 집에 왔더니 어머니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주인공은 왜 그 많은 게임 상금으로 행복하게 살지 못할까? 게임을 6번 하면서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죄책감이 인생을 진정 재미없게 하는 핵심요인이었으리라.

인간차별은 시대마다 다르게 존재했다. 물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왕과 노비는 지금도 차별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과연 1억 원 정도가 정당한가?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지금도 사회에서 비교적 존중받는 의사와 목사도 모두 1억으로 책정했고, 그 의사는 게임에 지고 죽은 이들의 장기를 적출하는 일에 가담하더니 결국 사망을 당하고, 목사님 역시 사망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먼저 죽이고 자신이 살아남아 게임 상금을 챙기는 게 하나님의 뜻인 양 기도함으로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게 묘사되었고, 누구든지 사람의 이름이나 직함을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번호로 인간을 통제함으로 인간을 국가나 회사의 부속품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정당화했다. 이 흉악한 게임 극은, 막판에야 나타나는 재벌 노인이 벌린 황금만능 짓이었으니, 솔로몬 왕이 전도서에서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폭로한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생활구조를 보게 한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이며 예수님의 향기로 살아가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이가 성경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같은 맥락인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21 “εμοι γαρ το ζην χριστος” 에모이 가르 투 젠 크리스토스 to me, because, to live, Christ. “For what is life? To me, it is Christ. Death, then, will willing more.” -GN- 바울의 신앙관이 돋보이게 번역하였음. 중요한 점은 자신이 빠져있다는 거다. 덧셈이나 곱셈이 아닌 ‘뺄셈’이다. 바울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바울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니, 이것은 바울의 삶 전체를 예수님이 통치하심으로 진실과 사랑, 소망, 순종, 전도됨…. 모두 삶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바울은 로마서 14:8에도 같은 고백을 해 놓았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뺀 채로 살아가는 게 순종하는 믿음이라는 거다. 이게 사실은 ‘오직 예수’이다. ‘나가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의 정도가 아니라 ‘내 삶 자체가 예수님’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올바른 믿음의 기도를 알고 있지요.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이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면 ‘내가 하나님을 시켜 먹는 짓’이다.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결정권을 주권자 하나님께 맡기는 게 옳은 해결책이다.

다윗을 보자.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삼하 12:21-24).

우리가 환란을 당했을 때 명심할 바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결재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에 믿음이 시들고 불안과 의심에 빠진다. 그럴 때 확신하는 말씀과 기도로 강권하는 게 필요하다. 바울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겼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어떤 것인가? 자기 인생의 핸들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바울이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았던 것은 주님이 바울의 삶을 운전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인들은 주님을 조수석에 태워놓고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은 음주까지 하고 운전을 고집하다가 좌로 우로 박치기를 해 댄다.

자 그러면 바울처럼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가능한지 설교 본문을 함께 살펴보자.

1) 아는 고로(19)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γαρ 가르 For 왜냐하면. ‘아는’ οιδα 오이다, 배워서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알아차림. ‘구원’<σωτηρία 소테리아 현재 감옥에서 석방되어 사도답게 지속적인 사역의 연장과 미래의 영혼 구원까지를 말해 줌> = 바울의 구원인식).

바울은 당시 감옥에 갇혀있으니 남들에게 수치로 생각할 수 있고, 또 심리적으로 약해질 수도 있지만, 바울 자신은 감옥에서 풀려나든 그냥 사형판결을 당하든 하나님의 심판법정에서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복음 증인이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은 주님의 품에 함께 있게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마치 욥이 세 친구들의 비난과 책임추궁을 당할 때 고백한 모습이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바울이 이렇게 확신한 근거는 ‘빌립보 교회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이었다. 바울은 믿음의 기도가 엄청난 응답을 받게 한다는 것과 성령의 보혜사 됨을 철저히 믿었다(요 15:7-8, 13. “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ελεγξει convict, expose>.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신앙 지식을 생활화(신앙관의 실천). 아멘.

2) 기대와 소망(20)

“간절한 기대소망을 따라”(ἀποκαραδοκία 아포카라도키아<ἀπο 아포 from> + κάρα<카라 목> + δέχομαι<데코마이 receive, take, appear. ‘목을 길게 올려 앞에 있는 것을 바라봄’ 간곡히 예민하게 바램, expect. ἐλπίς(엘피스, 기독교의 영생복락에 대한 관심과 복음의 진전<advance> 그리고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속성취).

바울은 오직 예수님께 영광되도록 살아왔고, 재판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복음 증인이길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 재판 결과,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든지 아니면 사형판결을 받든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소망했다(μεγαλυνθησεται 메갈뉜쎄타이 μεγαλυνω의 미래 수동태 Christ will be magnified and get glory and praise –Amf- 바울의 삶이 그리스도를 크게 만듬). 이것은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체념의 뜻이 아니라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날부터 로마 감옥까지 천국의 기대와 소망으로 사역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최후에 하나님 앞에서 가려질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확신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또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도 밤중에 실라와 함께 기도하며 찬송하다가 지진을 체험하고 간수와 그 가족을 전도했다. 하지만 오늘날 주님의 일을 한다는 종들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기대와 소망은 무엇인지 냉정히 점검해 볼 일이다.

3) 자랑(26)

“예수 안에서 너희의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καύχημα 카우케마, glorying, rejoicing) 우리는 선택의 연속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자주 선택한다. 교회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기준으로 삼느냐는 것이다. 복음신앙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계산대로 자기 유익을 위한 선택을 해버린다. 내게 좋은 것이 아니라, 네게 믿음의 진보되도록 더 필요한 것을 자신이 희생한다면 복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이다. 바울이 그랬다. 바울의 고민이 22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 일의 열매”(μοι καρπος εργου 모이 카르포스 에르구 the fruit of my labor). “나는 알지 못하노라.” 바울이 무식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신중히 정성껏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말을 더듬는 어린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을 친구 목사님이 핸드폰 화면으로 보내왔는데, “하나님 아부지, 이 악한 코로나에서 나를 구원해서 교회도 잘 가게 해주시고 우리 가족도 다 가게 축복충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더군요. 이 아이의 기도를 바울이 들으면 ‘덧셈기도’로 볼 것이다. 이 아이는 이제 서너 살 정도지만 ‘나’를 위해 사는 방식을 이미 익힌 것이다.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러한 교인은 “예수 안에서 너희의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는 암기 지식으로 끝내버린다. 우리 자신을 저울질해 보는 기회이기를 축복한다.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신앙중심을 보게 한 그 말씀을 챙기자. 우리는 그날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의 일생에 대한 평가를 받을 때 얼마나 기대하며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가? 부끄러움이 예상된다면 그 이유는 그날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성질대로 욕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러한 순간마다 그날을 생각하면서 줄곧 살아왔다고 말한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이 말은 시종일관했음을 입증한다.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믿음 삶을 시도하고 그날을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해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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