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1일 설교

“하나님께 영광 돌려지게!” (빌 2:1-11 “그리스도인의 마음” 2021.11.21.)

창세기 1장과 2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창조물마다 각별한 특성을 주셨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상아를, 곰은 쓸개를, 순록은 뿔을 요긴하게 하셨다. 또 녹차는 연한 새싹을 요긴하게 하고, 산삼은 뿌리를, 꽃은 향기와 색깔, 모양에 따라 가치가 확 달라진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만 가지고 있는 보물은 마음(心)이다. 마음을 인격(知情意)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과 선택, 행위는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데, 질병도 마음의 병으로부터 생기는 게 많다. 그래서 육신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게 마음의 병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 마음을 감찰(δοκιμαζοντι δοκιμαζω<제련>의 현재분사>하시는 하나님”(살전 2:4)이시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καθαροι ‘pure’)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으며, 잠언 4장 23절에 “생명의 근원이 이 마음에서 나온다.”라고 기록하여 마음의 건강과 건전, 건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멘.

그런데 한자는 마음(心)의 상태를 글자에 담아놓았다. 쉼(息 : 쉴 식, 自+心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 감사(感 : 느낄 감, <모두 함>咸+心 사물의 반응을 모두 하는 것), 기쁨(悅 : 기쁠 열, 心+兌<바꿀 태> 마음의 호전반응), 화냄(忿 : 분할 분, <나눌 분>分+心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함), 슬픔(悲 : 슬플 비, <아닐 비>非+心 마음이 서로 등지고 있음), 은혜(恩惠 : 因+心 조심<惠>할 만큼의 이유가 마음에 간직되어 있음). 그러므로 마음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느냐 아니면 서로 틀어져 시끄러우냐가 그 사람의 현실상태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하나 같이 마음으로 공감하고 시인하는 신앙공동체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10-11,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하자. 즉,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이 3가지에 해당한 영광은 억지로 하는 선동이나 강요를 따르는 게 아니라, 내용을 알아차리고 자발적으로 함. 실례를 보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1:13-14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한참 들은 후에 돌로 맞아 죽을 각오로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에 동참하고, 이미 성령 충만하여 초자연적으로 생활하던 엘리사벳과 친교 하다가 말 구유에서 성탄을 성취하자, 천군 천사가 부른 찬송임>. 이렇게 삶으로 영광을 만들어 하나님께 올리는 일에 합당한 감사 반응은 신중한 판단을 요함<살전 3:8-10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 신앙생활은 기쁨이라는 기쁨은 모조리 동원할 만큼 훌륭하니, 어떠한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야 옳은지 몰라 주야로 심히 간구한다는 것임. 핵심은 영혼 구원과 그 신앙 삶에 해당한 감사를 찾으려고 기도한다는 것임>. 이런 올바르게 함을 배우고 실천함은 엄청나게 중요함!).

야곱은 형 에서에게 극도로 시장함을 악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후에 속임수로 장자의 축복기도를 받고 밝혀지자 외가로 도망쳤다. 그러고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살면서 결혼까지 하고 양 떼 부자가 된 후에, 귀향길을 떠났지요. 야곱의 가족이 얍복강에 이르렀을 때 형 에서의 보복공격을 받았지만, 극적인 화해로 반전시키고 세겜으로 왔는데 그만 몰살위기에 몰렸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세겜 추장의 아들이 야곱의 외동딸 디나에게 반해 성폭행하고 결혼을 간청하였다. 그때 야곱의 아들들은 복수를 다짐하고, 세겜의 남성들에게 할례를 하면 결혼 간청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하여, 할례 사흘 후 그 남자들을 다 칼로 죽였다. 세겜 주민이라고 당하고만 있지 않겠지요. 당장 합동군으로 기습해 복수할 게 뻔해졌다. 풍전등화처럼 몰렸을 때 야곱은 어떻게 대처하였던가? 창세기 35장에 보면 핵심내용에 집중했다. 집단몰살을 눈앞에 두고 야곱은 하나님 체험을 반영하여 벧엘로 올라갔다(“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3-7, 11). 야곱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역전시키시며 미래보장까지 임마누엘 하셨다. 이래서 올바로 함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다운 영광을 올바르게 돌려서 체험하려면 착안할 점은 무엇인가?

1) 한마음(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φρονητε, την αὐτην αγαπην εχοντες, συμψυχοι, το ἓν φρονουντες 프로네테<to take thought>, 텐 아우텐 아가펜 에콘테스<the same love having>, 쉼프쉬코이<the same breath>, 토 헨 프로눈테스<the one taking thought>. 한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네 번이나 다르게 말하였음. 협력을 잘 유지하는 생명체!).

그래서 교회에서 ‘권면’이나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 등등 이러한 것을 할 때, 협력을 잘 조화시키는 생명체처럼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 되는 교회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셨지요, 그 하나 됨의 수준을 요한복음 17:11절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조화 수준!

우리가 ‘오직 예수!’ 하면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존중하고 따를 때 정직한 ‘오직 예수’가 된다. 12제자를 생각해 보자. 서로가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경쟁했고, 열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었고,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였다. 남은 제자들도 열심히 도망쳤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예수님은 감탄고토(甘呑苦吐)하는 혼자만의 사랑을 아직도 가지고 설치는지 다시 확인하신 것이지요. 변화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계속 소속해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2) 겸손(3)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αλλα τᾖ ταπεινοφροσυνη 알라 테 타페이노프로쉬네 = 그런데도 ‘낮음’의 생각을 가짐). 그런데 헬라어 성경 2절은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4 끝)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2-4절의 내용에서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를 가장 강조하여 명령한 셈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실토를 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 하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고충이 얼마나 험악했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하였을꼬! 자꾸 교만 하려는 바울 자신을 낮추고 낮추기 위한 특수장치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로 괴롭힘을 당하며 사도로 살아가게 하셨다는 거다. 그래야 자신을 낮추고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으로 다툼이나 허영이 없이 순종이든 충성을 하고 그 은혜는 능력이 되고, 사명완수도 순종이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겸손은 최고의 은사요, 최고의 축복인 것이다. 아멘.

3) 예수의 마음(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빌립보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은 예수의 마음인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겸손’이다. 우리가 명심할 바는, 예수님의 마음은 감정의 눈물로 끝내는 게 아니고, 행함이라는 사실이다. 그 행함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죄인 가운데 살아가심’ (Incarnation 성육신)이다.

성육신(Incarnation)을 설교본문의 내용으로 좀 더 설명하면 첫째는 ‘비워’(7 εκενωσεν 에케노센 empty)인데, 권능이 실제로 있지만, 전혀 없는 것 같이 낮추는 삶이다. 둘째는 ‘되셨고’(γενομενος 게노메노스 Becoming)이다. 찾아가 동참하고, 자신을 주며, 그 죄인과 같이 되어버림이다. 셋째는 ‘복종’(8 ὑπηκοος 휘페코오스 노예적인 복종, 사랑과 믿음으로 따르는 순종,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런 게 하나님이 보실 때 진정한 겸손인 것이다.

길거리 가게에 쇼 윈도우가 있지요. 모델같이 몸매가 좋은 마네킹에 옷을 입혀 놓고 그 멋진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려 가게로 들어와 그 옷을 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에 쇼 윈도우를 설치하셨다. 그게 교회이다.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아무리 설명해도 그게 뭔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면 쉽고 빠르게 알아듣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쇼 원도우로 존재하라는 게 예수님의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들이나 우리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알아차리게 하라는 것이다. 마네킹에 더럽고 찢어진 옷을 입혀 놓은 모습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싸우고 찢어지면 누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겠는가? 그렇다면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올바로 생활하는 교회가 곧 예수님의 마음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믿음의 신호등을 다시 확인해 보자. 오늘 설교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복음에 합당한 신앙생활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위하여 제발 한마음의 협력과 겸손한 행함과 예수님의 마음을 실행하자는 것이다. 그리하면 천국에 지극히 높은 상이 예비 된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난 후에 다시 본향으로 돌아갈 일은 많았지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고, 결국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데까지 순종하고 범사에 복을 받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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