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0일 설교
“부탁을 지키라!” (딤전 6:20-21 ‘벗어나는 믿음생활’ 22.11.20.)
공자 맹자를 따르는 유학(儒學)과 기독교가 인간을 이해하는 바를 보면 확연히 다르다. 그 차이점을 ‘주택마련’으로 설명하면, 헌 집을 점점 수리하면서 살아가자는 이론이 유학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헌 집을 완전히 철거하고 새집을 지어 살아가자는 이론이다. 유학의 경전은 사서삼경(四書三經; 大學, 論語, 孟子, 中庸. 時經, 書經, 周易)인데, 대학에 올바른 선비로 지향하는 길을 한 마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인격을 다듬어 훌륭한 선비의 자질을 갖춘 다음에, 가정을 가지런히 하고, 그런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생각)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유학은 헌 집을 점점 수리하자는 이론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완전히 다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십자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수양하고 수리해도 새로워질 수 없는 법이니, 아예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다시 새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군대에 포위되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말씀을 선포하였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그러자 나라의 장관이 엘리사에게 쏘아붙였다.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문을 여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리요?” 그때 엘리사가 대답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그 장관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의심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교인은 보기는 해도 먹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기(읽기, 쓰기, 듣기)만 하는 신앙생활이 있고, 보고(읽고, 쓰고, 듣고) 그러고 먹기까지 하는 신앙 삶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보기(읽기, 쓰기, 듣기)만 중요시하는 신앙생활과 보고(읽고, 쓰고, 듣고) 그러고 먹기까지 하는 신앙생활을 확실히 식별하여 거리를 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 20절이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목양하는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목회지침을 권면하는 그 편지의 마지막에 한 번 더 당부한 것인데, 거짓 가르침이요 이단설교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그만큼 거짓 설교가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 설교자들은 자기가 더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럴듯하게 자신을 정당화함으로, 교인들은 속아 넘어가곤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 디모데야”라고 감탄사 Ω(오메가)로 설교본문을 시작했다(Ὦ Τιμόθεε, τὴν παραθήκην φύλαξον, ἐκτρεπόμενος 오 디모데에 텐 파라쎄켄 퓔라크손 “오! 디모데야, 내가 맡긴 것을 지키라. 피하면서” = 현재분사)
바울은 부자지간의 사랑을 담아 직접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귀중한 것을 넘겨주고 유언을 남기는 그러한 분위기로 편지를 마치고 있다. “부탁한 것”(παραθήκην 파라쎄켄 παρατιθήμι 파라티쎄미 곁에 둔다. 맡긴다. ‘맡은 사람은 잘 보관했다가 주인이 요구할 때 그것을 원형 그대로 돌려주는 것’ 구체적으로 복음의 뼈대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구원<“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1:15,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3:16> 그러므로 대단히 장엄한 순간이기 때문에 바울은 감탄사를 사용하여 “오! 디모데야”라고 불렀던 것임).
19세기에 미국에서 전도자요 목사님으로 유명하였던 무디 목사님의 일화이다. 무디 목사님의 교인 한 분이 양조장을 크게 짓고 양조장의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무디 목사님을 모시고 개업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기도와 설교를 마치고 이제 축도로 예배를 마치는 시간이 되었다. 무디 목사님은 두 손을 들고 축복 기도를 이렇게 했단다. “오! 하나님, 이 양조장은 오늘 개업예배를 드린 후에 내일 사업을 시작한답니다. 이 양조장의 문이 열리지 않게 하옵소서! 이 양조장 문이 열리면 여기서 생산되는 엄청난 술로 수많은 청소년이 이 술을 마시고 타락할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술을 먹고 취하여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제발 오늘밤 이 양조장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내일 이 양조장의 문을 열지 않게 하옵소서.
예배 후에 축하 파티를 하려던 사람들이 당황하여 자리를 뜨기 시작하였다. 양조장의 주인은 밤새껏 고민했다. 그는 잠을 설치다가 새벽에 조용히 기도했다. 그리고 양조장을 안 하겠다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그 양조장은 나중에 무디 신학교가 되었단다. 보고(읽고, 쓰고, 듣고) 그러고 먹기까지 잘 피해야 순종이다. 아멘.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 목사님에게 신신당부하며 맡겼던 그 십자가 구원의 도를 원형 그대로 잘 간직하고 또 잘 활용하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되는가? 바울의 당부에 귀를 기울이자.
1) 피함(20)
“피함”(ἐκτρεπόμενος 현재 분사. 에크트레포메노스 avoiding ἐκτρεπω)은 상대하지 말고 도망가라는 뜻도 있지만 오히려 방어하고 적극적으로 물리치고 이겨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디모데 목사님이 피할 게 무엇이었는가? 3가지 “망령되고”(βεβήλους 베벨루스 profane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무시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자는 설교는 천국에 있을 곳을 예비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짓임), “헛된 말”(의미 없는 잡담, 탁상공론, 설교 중에 괜한 농담이나 자랑...), “거짓된 지식의 반론”(복음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주장, 이단교리, 진화론)
디모데 목사는,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실행하고, 가르치고, 교인들이 실천하도록 도와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중책을 맡은 사명자들에게 하와처럼 반드시 유혹이 찾아온다. ‘대충 그 정도는 괜찮지! 뭐...’ 이런 말을 무시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시는 디모데뿐만 아니라 교우도 마찬가지이다. 피하기도 잘하는 믿음생활을 해가길 축복한다. 아멘.
2) 벗어남(21)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교회에 소속된 교인들이 거짓 충동에 속아 교회를 떠나 이단을 따라갔으니,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망령되고 헛된 설교를 하고 가짜 뉴스처럼 거짓말을 하는데도 그것이 좋은 줄 알고 교인들이 따라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한심한 병폐는 좌파들은 좌파가 하는 말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찬성한다. 우파들도 우파가 하는 말이 올바르든지 빗나갔든지 따져보지 않는다. 교인들도 목사님의 설교가 바른말인지 헛된 말인지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아멘!’으로 화답한다면 맹신이다. 이단의 교주들은 아무리 망령된 말을 해도 이단 교인들은 무조건 ‘아멘!’ 하며 따른다. 분별없이 무조건 따르는 교인들은 이미 믿음에서 떠난 어처구니없는 맹종파들이니 불쌍할 뿐이다.
교회는 천국 백성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교실이다. 그런데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교회활동 자체가 좋아 교회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교인들이 있다. 이런 교인들은 더 재미난 교회의 프로그램과 시설을 만나면 그냥 옮긴다. 하나님은 교회활동에 성공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계획실현에 동참하길 기다리고 계신다. 아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통령 때 연로한 노 선생님들을 초청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담소하던 중에 노 스승 한 분이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권해봤단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천국 신앙생활을 시작해 보세요.” 그러자 박 대통령이 대답하길 “그 점을 늘 아쉽게 생각합니다. 내가 어려서 주일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가르쳤더라면 좋은 신앙인이 되었을 텐데... 이제 와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봐도 잘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겨자씨 만한 복음이라도 심어놓은 교회학교였더라면... 박정희 어린이를 가르쳤던 교회학교 교사가 아이들을 대충 마구잡이로 가르치지 말고 복음 심기에 절박한 마음으로 헌신했더라면 천국 시민 박정희 대통령이었을 텐데... 두고두고 아쉬워질 수밖에 없다.
3) 은혜(21)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으라고 기원하고 축복하였다. “너희”는 디모데에게만 아니라 에베소교회 성도들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은혜가 함께 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받을 가장 위대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는 크고 고귀한데도 값을 치르라고 하시지 않고, 어떤 자격도 갖추라고 하시지도 않는다. 거저 베풀어 주시는 사랑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어마어마한 순종과 충성을 할 수 있다(“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다른 사람들은 다 시집, 장가가는데 노아가 방주를 지어냈던 것은 은혜받았기 때문이었음!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0-31 마리아가 성탄에 동참하는 헌신은 은혜받았기 때문!>, 스데반<“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6:8>,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2-4).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와 천사가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주여,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For with God nothing will be impossible.” -NKJV-(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삶을 만드는 with God!
자 이제 사도 바울이 디모데 목사에게 마지막으로 맡긴 보물을 챙길 시간이다. 그것은 ‘복음에 다른 교훈을 조금도 섞이지 않게 보존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서 빗나간 가짜였다. 바울의 그 복음이 교회에서 왜곡되지 않게 선포되고, 교육되고, 실행되어, 모두 구원받는 게 복음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것은 교회가 맡은 핵심 사명이다. 사도 바울이 부탁한 것에 우리 교회들이 정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라면 올바른 교회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붙잡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정통하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