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4일 설교

“너희도 같은 싸움을!”(빌 1:27-30 “복음에 합당한 믿음생활” 2021.11.14.)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 팀의 토미 라소다 감독은 투수 오렐 허샤이저(Orel Hershiser) 선수가 정면 승부를 피하곤 하자, 그를 따로 불러 세우고 엄중하게 말했단다. “너는 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너는 마운드에 서면 잔뜩 겁먹으니까 네 실력껏 공을 던지지 못한 거야. 네가 상대하는 타자들이 전설적인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쯤 된다는 생각을 하나 본데, 그는 벌써 죽었잖아. 너는 엄청난 공을 충분히 던질 수 있어! 그렇지 않다면 너를 우리 다저스에 데려올 리가 없지. 그러니 공격적으로 공을 던져봐! 마운드에 올라서면 으르렁대는 불독처럼 행동하라구. 불독! 이제부터 너를 ‘불독’으로 부르겠다. 당장 오늘부터 그렇게 시작하자구.”

그런 후에 오렐 허샤이저는 구원 투수로 공을 던졌는데, 3회 동안 단 1점만 내줄 만큼 잘 던졌단다. 그러고 그는 현저하게 달라진 실력을 보여주었고, 2년 후 1985년 19승 3패의 성적을 거두고 이름을 알리더니, 이어서 1986년에 14승, 87년에 16승, 88년에는 23승과 5경기 연속 완봉승 그리고 59회 연속 무실점으로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우고, 매년 최고 투수가 받는 ‘사이 영 상’을 거머쥐더란다. 허샤이저는 은퇴한 후에 LA 다저스팀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면서 라소다 감독의 조언을 예수님의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에 비유하며 ‘마운드의 수훈’(Sermon on the mound)이라고 추켜세우더란다. 그만큼 라소다 감독의 충고가 소심한 투수에게 명품 투수다운 자신감을 심어준 처방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시민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해당하게 살아가는지? 물론 연약하여 빗나가는 죄를 짓곤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천국시민이다.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는 ‘내 증인’(행 1:8)이라도 무결점 신앙인을 의미하지 않는다(갈 1: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바울이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것임!).

오늘 설교 본문도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강권하고 있다(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오직”<μονον 모논 only, solitary ‘유일함으로 외롭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좁은 문으로 들어와서 협착한 길을 가는 적은 무리’의 삶이라서 외로운 점이 있다는 것임. 천국의 시민생활은 여럿이 몰려다니며 떠드는 삶이 아님>. 또 “생활하라” <πολιτευεσθε 폴리튜에스쎄 πολιτευω<to be a citizen>의 현재 명령형.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빌 3:20> ‘시민답게 살라’는 것임).

바울이 시민권을 강조하는 배경을 알아보면, 빌립보는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인데 동남쪽으로 16km 되는 곳에 항구 네압볼리가 있어 휴양지로 적합하였다. 그런데 B.C. 356년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필립 2세가 ‘크레니데스’를 점령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크레니데스’를 ‘빌립보’로 바꿔 부르게 하였다. 그러고 188년 후 B.C.168년에 빌립보는 로마의 한 주(州)로 소속되었고, 로마와 동방을 연결하는 육로가 있어서 군사와 무역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B.C. 42년에 빌립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이 캐시우스와 부루투스의 연합군에게 승리하였고, 11년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과 동맹 관계였던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시키고 스스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라는 뜻)라 칭하고, 아우구스투스는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지로 삼아 악티움 전투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하사하였다.

빌립보 도시는 그 당시 주 정부의 통치와 상관없는 최고의 자치권인 로마와 동등한 특권이 허락됨으로, 재산 소유나 거래, 그리고 민사 소송이 가능했고, 세금도 면제받았다. 그러니 빌립보에서 사는 로마 사람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은 막강하였다. 그들은 비록 로마와 멀리 떨어져 살지라도, 로마시의 법과 언어, 관습, 유행하는 옷이나 색깔을 그대로 따라했고, 로마인의 자긍심에 벗어난 행위를 엄금하며, 로마인의 신분과 품위를 뽐내고 살았다. 그래서 빌립보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성공자로서 긍지와 존경심도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말한 의도는 분명해진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천국의 시민답게 확실한 자긍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권한 것이다. 사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행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우리는 그 복음으로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 천국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이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으로 살아간다고 예수님이 가르치셨고, 사도 바울은 세상에 보내진 그리스도의 편지이고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역설한 것이다. 아멘.

그러면 교회가 복음에 합당하게 빛과 소금으로, 편지나 향기로 생활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1) 협력(27)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αξιως 악크시오스 suitably, worthy. “in a manner worthy” -NIV- 그런데 바울은 ‘협력’이라는 말에 ‘한마음으로’ ‘한뜻으로’라는 조건을 붙여 놓았다. 그 의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행위는 사람의 몸처럼 서로 연합하여 이뤄지기를 강조한 거다. 27절의 ‘한마음’과 ‘한뜻’(ἑνι πνευματι, μιᾆ ψυχᾖ 헤니 프뉴마티 미아 프쉬케 ‘한 성령’과 ‘한 몸’의 의미로 볼 수도 있음)은 복음에 합당하도록 성령의 보혜사 되심을 따라 순종하는 협력을 말하는데, 이게 바로 천국 시민들만의 특성이다. 아멘.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의 마음을 읽었는데, 빌립보 교회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답게 자긍심으로 살아가길 소원함이다. 지금 한국교회에도 절실한 삶인데, 과연 어느 교회, 누가 생각나나요? 27절 중간에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στηκετε 스테케테 to stand firm, to be approve. 전투병의 자세임,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13-14, 17). 히 2:1에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교회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 남녀, 나이, 직업, 학력, 생활 수준... 각 각 다르다. 그렇지만 복음에 합당한 천국의 시민권자답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공동체의 예배를 생명처럼 여기고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공동체 예배를 좋아했다. 그래서 정부와 불신자들이 교회의 예배 모임을 노골적으로 비난해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때도 감옥살이나 온갖 고문이 무서웠지만,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 교회는 허다했다. 지금처럼 통치자의 지시를 잘 들었더라면 누가 순교를 당했겠는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암기한 성경 지식이나 자랑하는 말쟁이가 아니라 합당한 삶인 것을 명심하자. 아멘.

2) 대적 인식(28)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대적하는 자들’ =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는 일을 훼방하는 모든 사람과 상황들. 그리고 ‘두려워하지’ = πτυρω 프튀로 to terrify, scare. 놀란 말들이 우르르 도망침). 안전한데도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지 못함은 병약한 믿음 때문인데, 대적자들이 연합하여 험악하게 방해할 때 두려워 핑계를 찾게 된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전지전능보다 눈앞에 보이는 대적이나 불가능을 더 크게 생각하는 태도를 두려움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믿음이 있다. 바울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게 “구원의 증거”라고 밝혀주고 있다. 복음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선 사람은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임마누엘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바로 이게 암기와 삶의 차이이다. 명심하자. 아멘.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가나안 정탐꾼의 보고는 10:2로 나누어졌다. 10명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한데 그 땅 주민이 장사들이고 성읍도 견고하고 심히 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보고를 들은 출애굽 백성들은 겁을 먹고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더니 결국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혈기를 부려댔다. 그들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출 15:3-4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을 찬송하고도 망각했다. 이러한 자를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 ‘믿음이 약한 자’라고 하였고, 이러한 교인들이 원망에 빠진다. 이유는 임마누엘을 암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제시한 해법은 ‘하나님의 언약 신뢰’였다. 이것을 성경 전문용어로 ‘믿음’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을 믿었던 바울과 실라도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여 지진을 체험하면서 간수를 전도하였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는지 살펴보자. 코로나가 무서워서 우리가 예배를 양보하고 기도회를 포기하며 성찬식을 빼앗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암기만 하는 병든 신앙이기 때문이다.

3) 은혜 인식(29)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바울은 ‘은혜’와 ‘고난’은 같은 짝꿍이라 했는데, ‘고난은 마귀 짓’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래서 ‘고난은 꿈에도 싫다’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εχοντες 에콘테스 εχω 에코의 현재분사 ‘너희가 가지고 있는’ ‘since you are going through the same struggle’ -NIV-)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은혜와 함께 따라오는 고난을 바울은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올바른 신앙인은 고난을 잘 겪으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믿음의 눈과 귀를 밝게 한다. 이 이치를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제 “믿었으니 편안한 축복만 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을 변질시킨 것이다.

사도행전을 곰곰이 읽어보면 성령충만한 사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이 떠나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가 고난을 겪는 것은 정상으로 보인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소망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복음에 합당한 순종의 징조이다. 고난의 징조를 갖춘 신앙 삶에 도전하길 축복한다.

자 이제 오늘 설교가 가리키는 삶을 살펴보자. 자기 신앙 일생을 감사하다고 말하는 교인을 쉽게 본다. 욕심껏 챙기는 데 성공한 분도 자기 믿음 삶을 감사하다고 하고, 정욕을 따라 번번이 실수한 분도 감사하다고 하며, 세상적인 명예욕을 따라 살고도 감사한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 합당하게’가 아니라 ‘복음에 합당하게’ 그러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쉽게 동화되는 믿음의 무분별함과 차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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