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1일 설교
“전파만 된다면!” (빌 1:12-18 “바울의 매임과 전도” 2021.10.31.)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졸업반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시간에 칠판에 그림 하나를 그리셨다. 높다란 담벼락이 빙 둘러싸여 있는데 출입문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출입문에 ‘곰’이라는 글자를 쓰셨다. 곰이 출입문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고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저 담벼락 안에 있다. 어떻게 하면 너희 모두 아무 탈 없이 밖으로 나올 수 있겠느냐?”
담벼락 입구에는 맹수의 곰이 버티고 있으니 입구로 나오려면 너무나 위험한 곰과 싸워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담을 넘든지 뚫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들은 어린아이들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무도 대답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이런 답을 알려주셨다.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학생이라면 그냥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단다. 단 질서를 지키면서. 여기 출입문에 써놓은 ‘곰’이라는 글자는 담 안에서 보면 ‘곰’이지만, 상대방 입장으로 돌려서 보면 ‘문’이 된다.” 이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한단다.
학생들이 “그렇구나!” “야 쉽네!” “왜 그걸 몰랐지?”라고 한마디씩 하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엄숙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제 너희가 졸업하면 이 그림과 같은 상황을 수없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성급하게 비관하고 포기하기 전에 꾸준히 독서한 지식으로 역지사지를 해 보고 존경하는 은사님과 어르신에게 자문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날 수많은 장애물을 ‘곰’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문’으로 생각하느냐 그 생각의 차이는 좌절과 역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너희 모두 명심하고 이 세상을 잘 헤쳐나가는 제자들로 살다가 다시 만나자.”
한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처럼 인생의 악조건을 기회로 삼고 기도하며 역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법인데 오늘 설교 본문이 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2.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βουλομαι(불로마이 to be willing, to choose, appoint, decree. 굉장히 확신에 찬 소망행위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알리려고 했던 바는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음전도 상황이었음).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힐 당시 로마시는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이 불탔는데, 네로 황제는 자신의 방화설 소문을 수습하려고 기독교를 범인으로 몰아 기독교 대학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니 바울은 자신의 사형판결을 예상할 수 있는데도 세상적인 원망 대신 자신의 감옥살이가 로마의 복음전파에 유익해졌으니 기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 εἰς προκοπην 에이스 프로코펜<군대를 진군시키기 위해 길을 개척함> “the thing which happened to me have actually turned out for the furtherance of the gospel.” -NKJV- = “나에게 일어난 그 일은 실제로 복음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바울은 딤후 2:9에서 확실하게 밝혀놓았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바울의 마음을 읽어보자. 바울은 감옥에 갇힌 일에 대한 손익계산을 점검한 후에 확실하게 유익이라고 판단한다. 그 증거는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유익은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된 일이다. 시위대는 로마 황제의 친위대인데, 로마의 엘리트 군인들이지요. 그들은 당번대로 매일 교대 근무하니 바울에게는 전도대상자들이 스스로 바뀌고 있었다. 바울은 죄수인데도 그 환경은 오히려 복음 전도의 황금 시기로 진전되어 있는 셈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제국을 복음화하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4:22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 가이사의 집은 왕궁을 의미함. 굉장한 유익임!). 또 시위대 밖에도 전도 열풍이 일어고 있었다(“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사실 바울은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하다가 시위대 감옥을 끌려갔다(행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생각해 보자. 매일 밤 쇠사슬을 차고 잠들어야 하는 것 자체가 ‘사도’라는 신분으로는 엄청난 수모이고 심리적인 고충인데;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고, 또 불결, 불편, 인간적인 무시당함은 분명히 큰 손실이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플러스도 보았다. 그게 뭐였죠? 전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손익계산서를 보고 ‘전체적으로 플러스’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자신이 당한 육체적인 고통에 ‘이 정도는 감당해야지!’라는 점수를 주었다. 그러므로 시위대 감옥에서 전도는 분명히 ‘수지맞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바울의 신앙 가치관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옥살이가 오히려 복음 전도의 도움이 되니 염려하지 말라고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하였다.
창 50:20에 있는 말씀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이 애굽총리로 있는데, 자신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넘긴 형들이 자기 앞에 꿇어 엎드린 모습을 보면서, 보복보다 형들의 악행을 선하게 사용하셔서 자신의 많은 친족의 생명을 구제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보는 올바른 눈(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바울도 감옥에 갇혀서 죽음이 예상되어도 복음 전도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소망을 살렸다는 거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생각해내는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가?
1) 그리스도 안(13)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τῷ 엔 크리스토 = not selfish. “that I am in prison because I am a servant of Christ.” -GN-. “I am a prisoner in His service and for Him.” -Amf-. 예수님과 관계를 유지하여 <관계가 살아있음, 예수님께 받은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中!> 구체적으로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 증거 때문에 감옥에 있는데, 그 감옥살이를 통해 감옥 안과 밖에서 복음 전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거다.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바울을 보고 듣고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 육군전투교범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투들을 분석하여 놓았는데 그중에 북군이 승리한 남북전쟁이 들어있단다. 남북전쟁을 분석한 결론은 이렇다. “남군에는 위대한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이 있었다. 하지만 북군은 병력과 무기 모든 게 열세였다. 그렇지만 북군이 승리했다. 그것은 북군에 기도의 사람 링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링컨은 이렇게 고백했단다. “북군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다. 우리에게 리 장군과 같은 유능한 장군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 불리함 때문에 더욱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감이 생기면 기도하지 않지요. 돈이 넉넉하면, 실력이 통하면, 건강에 자신이 생기면 기도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려면 하나님께 간구하는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2) 착한 뜻(15)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ευδοκιαν 유도키안, good will, purpose, intention. ‘충족’을 뜻하는 말로 다른 이와 유익한 관계를 맺고, 왜 복음을 전하는지 그 목적을 올바로 깨닫고 선한 목자로 복음 사역에 충성하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믿음 안에서 착함과 진리로 살아간다면 환난과 핍박과 조롱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유혹과 고난이 존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된다.
그래서 벧전 4:12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또 요일 3:13에도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롬 5:2-4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다. 환란 중에 착한 뜻을 이루며 복음이 전파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 도전하라는 것이다.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한 나머지 구덩이에 던져버렸다가 외국 장사꾼에게 팔아먹었다. 그래서 요셉은 외국에서 종이 되었고, 결국 누명을 쓰고 죄수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기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알려주신 계획을 신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셉은 진작 우울증에 걸렸을 신세였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그 은혜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기뻐하라(18)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이 감옥 안에서 밝힌 말이다(because of this I rejoice. Yes, and I will continue to rejoice, -NIV-). 바울은 몸으로는 감옥에 갇혀있고, 마음으로는 시기하는 자들에게 고통받고 있는데 그러한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였다. 바울은 믿음 중심을 자기 유익이 아닌 복음 전도에 맞추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전도자)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니까 사명 감당에 충실한 것이다.
16절에 “알고 사랑으로 하나”(οἱ μεν εξ αγαπης ειδοτες ὅτι “그런데 그들은 사랑의 출처를 알고” 이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전도자로 세우셨다고 깨달은 이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더욱더 애정을 갖고 동참하였음을 말한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하나님 축복의 통로였음).
우리는 현재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세상을 살아간다. 심지어 남을 탓하고 헐뜯으며 자신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스스로 책임지지 않은 한심한 모습을 자주 본다. 심지어 그러한 얌체 신앙인들도 보게 된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보다 자신들의 단체를 키운다. 교인들을 꾀어 데리고 간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은사를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탐욕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자신이 주인공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유혹이다. 사도 바울은 감옥이라는 육체적 고통과 자신을 시기하고 경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싶은 충동을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충실함으로써 이겨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인격이었다. 이 신앙인격을 갖추길!
자 이제 히 12:2를 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공한 일로 칭송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고난으로 칭찬을 받는다면 올바른 길을 선택한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여 고난이 영광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다면 참 그리스도인이다. 바울도 감옥에서 복음의 진보를 이뤘다. 시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