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4일 설교

“원하노라!”(빌 1:9-11 “바울의 기도” 2021.10.24.)

인도나 중국에서 차와 황금, 비단, 도자기, 종이 등등이 6천4백km나 되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유럽으로 전해졌는데, 유럽인들의 호기심으로 점차 수요가 많아져서 값이 폭등해 갔다. 그래서 ‘새로운 무역로’를 갈망하게 되었고, 드디어 1492년,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뱃길을 찾아내었다. 그는 바다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해상경험을 쌓으며, 특히 마르코 폴로가 쓴 인도의 보물들에 관한 글을 탐독했고, 지구는 둥그니까 “대서양에서 서쪽으로만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그는 항해서적들을 읽으면서 10년을 준비한 후, 스페인 왕에게 달려가 그림처럼 왼쪽으로 계속 항해하여 인도에 도착하면 엄청난 수량을 수입하여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의 승낙을 받아 1492년 8월 3일, 선원 120명과 배 3척으로 역사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출발 후 3일째 되는 날, 선원들은 항해를 중단시키려고 키를 부러뜨렸고, 항해를 계속할수록 선원들의 불만을 달래는 일이 콜럼버스에게 가장 중요해졌다. “육지를 제일 먼저 발견하는 사람에게 스페인 왕이 약속한 1만 마라베디(1만x1만4000달러=1억 4천 $)와 명주옷을 주겠다.”라고 약속했단다. 그러고 5일 후, 1492년 10월 12일 아침, 선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육지다! 육지야!” 미국 플로리다 밑에 있는 작은 섬인데, 콜럼버스는 인도에 속한 땅으로 착각하고 땅에 입을 맞춘 후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곳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거룩하고 소중한 땅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산살바도르’ (San Salvador = 스페인어로 ‘성스러운 구세주’)라고 부르도록 한다!” 콜럼버스는 이틀 후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두 번째로 발견한 섬이 오늘날 쿠바였고, 세 번째로 발견한 섬이 아이티였단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섬 일대를 탐사한 후, 1493년 3월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499년부터 2년 동안 중남미 일대를 두루 탐험하여, 콜럼버스가 발견한 섬은 서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로 부르게 된 것이다.

용기가 때로는 놀라운 기적을 만든다. 지구가 둥그니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대모험의 항해를 시도한 분이 콜럼버스였다. 선원들이 지치고 병들어 포기하려 하자 콜럼버스는 확고한 신념으로 선원들을 설득했다. 물론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 원주민들을 인도사람 곧 ‘인디언’이라 불렀고, 현재까지도 착각한 말을 그대로 ‘인디언’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북아메리카는 현재 스페인의 땅이 아닌 영국 성공회의 신앙박해를 피해 피난 갔던 청교도신앙인들의 땅이 되어 현재의 미국이다. 역사는 지식을 행동한 대로 흔적을 남긴다.

설교본문도 지식과 조화를 이루는 신앙 삶을 무척 소원하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설명할 게 많음. 9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ἵνα ἡ αγαπη ὑμῶν ἔτι μαλλον και μαλλον περισσευῃ εν επιγνωσει και πασῃ αισθησει. NKJV는 “that your love may abound still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all discernment.”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분별력 안에서 여전히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도록>”으로 번역함. 이제<ἔτι 에티>, 현재형<περισσευῃ 페릿슈에. 기분에 따라 한 번씩 하는 게 아니고, ‘점점 더 풍성하게’가 지속하는 中>. 뭐가? 사랑이. 왜 그런가? 지식과 분별력에 의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품위 있게 함. 그런데 ‘지식’<επιγνωσει 에피그노세이 ≠ 일반학문의 축적. 창조와 타락,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구속에 대한 인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령한 지식’).

지식과 분별력에 의한 사랑이 적고 많고는 의식주의 빈부와 또 다른 문제이다. 이 사랑이 풍성하면 마음이 넉넉함으로 이웃들에게 시간과 지식, 기술, 물질로 헌신봉사 하는 게 어렵지 않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한 기도는 의식주(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살까)를 놔두고, 수준 높은 사랑 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바울을 두고 신앙관 차이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사랑이 없는 방언은 소리 내는 징과 꽹과리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큄발론’(κυμβαλον)이라는 악기를 꽹과리로 번역하였는데 자기들의 신을 초대한다고 노래 곡도 없이 아무렇게나 소리만 내는 악기였다. 전혀 내용도 없이 떠드는 소음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방언은 시끄럽게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또 있다. 예언과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믿음, 구제, 자기 몸을 불사르는 엄청난 희생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왜 그렇게 평가하느냐고요? 사람은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무엇을 사용하든 자기 유익이나 자기 과시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식과 분별력과 조화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헌신봉사를 쉽게 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래서 예수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사람이 지적인 사랑을 상실하면 탐욕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동물이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자연을 즐기는 마음씨를 인간에게 심어 놓았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서로 감사하며 질서를 즐기는 삶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선악과 범죄 이후 사랑의 마음씨는 부서졌고 감사 대신 불평과 원망, 책임전가 하는 탓이 생겨나고... 점점 흉하게 변질되었다.

자 그러면 바울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면 빌립보 교회는 어떠한 신앙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살펴보자.

1) 분별(10 δοκιμαζειν 도키마제인. 돌에서 순금만 뽑아내는 제련)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so that you will be able to choose what is best” -GN- 지식과 총명으로 된 사랑이 풍성해지면 선별할 수 있게 되는데, 인식하고 판단해내는 실력이 생김. 무슨 실력인가? “지극히 선한 것”을 선별해내는 능력. “what is excellent”<RSV, NKJV, Amf>. 구약성경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טֹוב 톱 하나님의 계획실현에 동참하는 신앙생활을 잘하게 해달라는 것임>. 그렇다면 ‘지식’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라면, 총명은 사랑을 실행하는데 꼭 필요한 분별력<“depth of insight” -NIV- 깊은 통찰력>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그 지식과 통찰력을 풍성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임).

그런데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는 지식은 느낌으로 터득되던가? 아니다. 두뇌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령한 지식은 창조와 타락, 구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호 4:6)라고 했고, 요일 5:20에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히 5:14에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런 말씀처럼 하나님이 지각을 주시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흔히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어진다고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깊은 통찰력을 갖추면 오히려 가장 올바른 게 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어디에 동참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식별할 수 있으니, 논어의 ‘도’(中庸之道)도 넉넉하게 행할 수 있다. ‘할렐루야!’이다.

2) 진실(10)

진실하여”(εἰλικρινεις 에일리크리네이스 εἵλη<헤일레 햇빛 + κρινω 크리노 판단하다. 햇빛에 비추어 본다. 흠이 드러남. 영어 성경은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았다는 pure로 번역. 다니엘의 진실함은 굶주린 사자굴에 집어던졌지만 아무렇지 않음으로 입증됐음). 그리스도인이 늘 진실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작은 이익과 체면 앞에서 너무나 쉽게 거짓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런 처지에서 신앙양심을 따르는 게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실이다. 그런 진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현 사회에서 조롱을 당하지 않나요?

우리나라의 초대교회 때 진남포의 아주머니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평양에 와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수레를 타고 귀가하는 중인데, 갑자기 수레가 덜커덩하더니 돌멩이 하나가 수레바퀴에 튕겨 나가 지나가던 노인의 눈을 때렸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됐다. 재판장이 두 아들에게 물었다. “누가 수레를 몰았느냐 ?” “제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형도 아우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난처해진 재판장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당신의 두 아들이 서로 자기가 수레를 몰았다고 합니다. 형제 우애는 칭찬해주고 싶으나 진실한 재판을 해야 하니 어머니가 솔직하게 밝혀주세요.”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저는 개가를 했습니다. 아우만 제가 낳았습니다. 그러니 아우에게 벌을 주십시오.” 재판장을 더욱 당황하며 물었다. “도대체 아주머니는 뭐하는 사람이요?” “저요?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처음에는 이렇게 이웃을 감동시켰다. 명심하자. 아멘.

3) 열매(11 “말미암아” = δια Ἰησου Χριστου εις δοξαν και επαινον θεου)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중 하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NIV-, “which only Jesus Christ can produce,”-GN-)라는 말씀을 눈여겨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기는 의의 열매는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이루는 믿음 삶을 가리킨다. 이러한 믿음생활은 하나님이 영광과 찬송으로 받으신다. 현재 그렇지 못한 한국교회는 솔직히 태반이다. 이 태반이라는 설교를 부정적으로 봐야 하나요? 아니면 진실한 현실로 봐야 하나요?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믿음의 왕자병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내로남불’(我是他非)하는 신앙생활을 고집하게 된다. 한국사회는 물론 교회에도 내로남불의 사례는 많지요. 그것은 착각이나 고집을 묵인해오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물론 사랑은 참고 용서하며 포용한다. 그럴지라도 때로는 개인적인 지적과 두세 사람의 증인을 동참한 책망, 그리고 교회공동체 앞에서 징계함도 훌륭한 사랑이라는 지식을 갖추자. 아멘.

이제 바울이 기도한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에 풍성을 거듭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가 응답되면 어떠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게 되는지 그 그림을 저와 여러분은 그릴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풍성한 사랑으로 선을 선별하고 진실하며 가득한 의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리는 신앙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올바른 임마누엘이다. 히스기야 왕처럼 성전에 나아와 편지를 펴놓고 예배하고 기도할 때 가능해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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