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7일 설교

“참여하며 사는가?” (빌 1:3-8 “그리스도인의 기쁨 근원” 2021.10.17.)

바람을 피우고도 오히려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있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아내에게 짜증을 낸다고 술을 마시고 때리고 욕을 해댔다. 그 아내는 인간적으로 당장 남편과 헤어지고 싶지만, 구원의 확신 때문에 아내는 울부짖어 간구하며 회개하는 남편을 기다렸단다. 그러면서 아내는 작은 방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 그대로 십자가 나무에 못을 하나 박고 눈물로 기도하기를, “주님, 남편을 미워하는 이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없으니 해결해 주세요.” 하지만 십자가의 못만 점점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그 십자가 나무를 들고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그 못들은 당신이 내 속을 썩일 때마다 불타오르는 미움 때문에 나무에 못을 박아놓고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나무에는 수많은 못이 박혀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았던 남편은 못 박힌 십자가 나무를 껴안고 주저앉더니 엉엉 울었다. 그러고 남편은 돌변하였다. 아내를 사랑하며 아껴주던 연애시절로 돌아왔다.

몇 해를 보내고 아내가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제 끝났어요!” “뭐가?” “당신이 고마워질 때마다 못을 하나씩 뽑았더니 이제 십자가에 박힌 못을 다 뽑았네요.”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다. “여보, 아직 멀었소. 못은 없어졌지만 못 자국들은 남아있소.” 아내는 남편을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남편이 자기에게 고통을 줄 때마다 아내는 십자가의 대속제물을 생각하며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토록 변화되지 않던 남편이 십자가에 박힌 못을 알아듣고 변화되어 가정이 회복되는 신비를 맛보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를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전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대로 신뢰하고 살면 그 사람의 삶을 하나님이 조정하시게 된다. 아멘.

은혜로 성도 여러분, 복음말씀의 내용을 올바로 알고 참여하면 이 세상사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건을 체험하고 감사하게 된다고 설교 본문에도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3).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εὐχαριστῶ τῷ θεῷ μου 유카리스토 토 쎄오 무, εὐ + χαριστῶ<forgive, acceptance, free gift, graceful. 현재형 지속 중 = “생각할 때마다”> μου<개인적인 친밀감> 살아있고 실감나서 북받치는 감사!). “간구할 때마다”(παντοτε εν παση δεησει μου 판토테 엔 파세 데에세이 무 always, in, every, request, mine. δεησει = to tie, to need. ‘특정한 결핍을 채워달라고 긴급간청하는 절박함’을 말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만큼 좋아하고 아꼈는지 공감하게 하는데, 구태여 말로 설명하면 그저 ‘최고로’ ‘지극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실제상황이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8). 그런데 7절 중간에 “나의 매임”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감옥에 갇혀 있음을 말해준다.

6.25 직후, 미국 로터리 클럽의 회원들이 나라도 나병환자 수용소를 방문하였단다. 그때 미국에서 온 여자 선교사가 나병환자의 상처에서 고름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한 방문객이 그 장면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이렇게 말했단다. “이것은 백만 불짜리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백만불을 주고 이 일을 시켜도 나는 못 할 것이다.” 그래서 여자 선교사님이 그 사업가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 일은 저도 못 합니다.” 그분이 황당해하면서 반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그 일을 해내는 거요?” 선교사가 대답하였다. “예수님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 놀라운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자신을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며, 영생복락의 길로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악조건에도 믿음 사랑 소망 생활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바울이 그랬다.

바울은 어떻게 그토록 빌립보 교회를 믿음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설교 본문을 살펴보면서 저랑 같이 정답을 찾아보자.

1) 확신(6)

다시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면,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계획하시고 시작하시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완성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마다 금주 금연보다 훨씬 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렇다면 “착한 일”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로 삼으시는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까지라는 긴 기간 동안 이루어지고, 대부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면서 가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속성으로 이루는 성숙은 탈 나기 마련이다. 사람이 어른으로 되려면 몇십 년을 필요로 하고, 잘 익은 과일도 한 계절로는 어렵다. 오렌지나 바나나를 현지에서 먹어보면 아주 달고 맛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 먹으면 왜 그 맛이 아닐까? 그것은 한참 덜 익은 과일을 수확해서 화물로 싣고 오는 동안에 억지로 익혀지기 때문에 모양과 색깔은 똑같은데 시고 떫은 맛을 버리지 못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을 이루어내는 계발(啓發) 역시 한꺼번에 완성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령님은 신앙인격을 점진적으로 성숙시키기 때문에 세월이 걸린다. 우리가 빨리 되기를 걱정하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을 얼마나 건전하게 하는지 살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 삶을 면류관 쓴 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신다.

오늘날 인터넷문화는 속도에 집착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속도보다 강도와 성취의 질에 더 비중을 두신다. 우리는 지름길로 가거나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찾아내 효과를 빠르게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를 고통에서 구출시켜 주는 말씀이나 안수기도를 원한다. 그런데 진정한 성숙은 그 경험이 아무리 감동적이고 강력하더라도 단 한 번으로 종료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번에 성장하는 생물을 창조하시지 않았잖아요. 더구나 성숙은 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게 창조하셨음을 명심하자. 아멘.

2) 참여(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 교제, 공유, 참여.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협력관계를 향상해가는 것. 그래서 영어성경은 fellowship<NKJV, RSV. 끈끈한 우정관계>, partnership<NIV, 잘 협력하는 공동체 관계>로 번역함). 그런데 어떻게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이 친밀관계로 맺어졌을꼬? “첫날부터 이제까지 구원의 복음 안에서 친교”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시작부터 복음을 위한 관심, 협력, 동참 관계를 지속해 왔던 것이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으로 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하며 “거룩한 공회(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교제)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하고 끝맺는다. 그런데 그냥 외우지 말고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같은 공동체라는 마음으로 성령의 보혜사 되심을 따라 복음을 위해 좋은 동역자로 지속한다면 믿음 사랑 소망이 건강하고 건전해진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그랬다.

불과 몇십 년 전처럼 가정문제를 목사에게 이야기하고 교회 기도제목으로 내놓고 함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도제목을 겉으로만 내놓은 시대가 돼버렸다. 생활하느라 바쁜 것도 있지만 부담된다는 생각도 있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드러내는 게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사실상 목사는 양 떼의 목자이다.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개인심방도 요청하고, 성경공부도 하자하고, 살다가 고민되는 신앙의 문제도 상담해서 풀어가야 한다. 그래야 목사는 성경을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기도하고,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씀해 준 것처럼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있는 관계,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교회로 존재하게 된다. 한쪽만 아무리 잘한들 50%밖에 안 되잖아요. 동참하길 축복한다. 아멘.

3) 마음(7)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καθως ἐστιν δικαιον εμοι τοῦτο ... δια το ἔχειν με εν τῇ καρδια ὑμᾶς “Just as it is right for me this. ... because I have you in my heart”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 자신의 생각은 공정하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빌립보 교회는 실망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후원을 끊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바울이 한 말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내가 감옥에 있을 때나 복음을 지키고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는 그 모든 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빌립보 교회가 인격적인 신뢰로 불타는 사랑과 존경과 의리를 확실히 지속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니 이러한 빌립보 교회를 바울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어떻게 개척하였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주는지, 지금 좋은 땅으로 자라가고 있음을 보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지! 바울을 볼 때 ‘마음을 차지하는 열쇠’인 것을 보게 된다. 저와 여러분도 이웃들에게 감사와 기쁨의 원천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이것은 복음을 위한 동참으로 가능하다. 아멘.

자 이제 우리의 믿음 삶을 돌아보자. 복음의 진수,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승리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가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진입한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조정하는 게 급선무이다. 히브리서 11장 38-4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진짜 축복은 천국에서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수준에 도전해 보자. 아멘.

힘든 일을 당하면 낙심하지 말고 바울과 빌립보 교회처럼 기도의 자리로 찾아가고 복음전파에 동참하자. 찬송가 361장 후렴처럼 “기도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라고 간증하게 하자. 우리의 낙심꺼리는 하나님께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복음동참으로 인도하는 화살표임을 알아차리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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