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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0일 설교

“은혜와 평강의 근원!” (빌 1:1-2 “은혜와 평강” 2021.10.10.)

유대인의 아버지가 저녁 식탁에서 어린 자녀에게 종종 들려준 이야기이다. 생각하며 들어보자. “동물 중에서 영리하기로 소문난 여우 한 마리가 해변으로 갔단다. 그 여우는 바다의 물고기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속삭였다. ‘물고기 여러분, 바닷속은 위험하니까 육지로 올라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어부들이 그물을 쳐놓고 여러분을 잡아가고 있잖아요. 또 큰 물고기들도 여러분을 잡아먹으려고 노리고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육지에 올라오면 그런 위험은 완전히 사라진답니다.’

물고기 대표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다. 여우는 영리한 동물이니까 그 말을 믿어도 된다는 주장부터 시작해서, 바닷속 환경이 위험한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전통이라는 반론까지 한참 동안 여러 의견이 쏟아졌고, 물고기들은 오랜 기간 토론하였지만, 결국 여우의 친절한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그래서 물고기 대표가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여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우님, 우리를 생각해 주는 친절은 고맙지만 그래도 우리는 바다에서 살아온 전통을 지키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려준 유대인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한단다.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아이는 ‘물고기가 육지로 떠나면 당장 죽어요.’라고 대답을 한다. 그때 아버지는 ‘바로 그거다! 어떠한 유혹을 받든지 유대인을 떠나 유대인답게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단다.’”라고 이야기를 끝맺는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마음을 흔들어 놓는 감동과 다짐을 간직하게 하는 엄청난 교훈을 간직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교훈들로 유대인은 유대인다운 신분과 민족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의식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점점 키워가며 자란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아주 짧지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명심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종” δοῦλοι 둘로이 slaves, 노예들, 從놈들! 그 당시 ‘노예’는 자신의 소유권, 생활권, 생사권까지 일체가 그 주인에게 있었다. 그래서 예속됨과 복종함과 비천함의 그 자체였기에, 노예는 자율의견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선택권이 없는 존재’였다. 노예의 의견은 전적으로 자기 주인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비천한 칭호로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를 소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 자신과 디모데가 한결같이 예수님에게 소속해 있는 일군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바울이 쓴 고전 6:19-20>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3>). 이 말씀들은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사셨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는 도무지 없고, 자기 주인인 하나님을 죽도록 섬겨야만 하는 종으로, 바울이 인식하였음을 확인시켜준다. 빌 3:7-9은 더 정확하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αλλα μενουνγε και ἡγουμαι 알라 메눈게 카이 헤구마이. but doubtless and I think. 현재형. 바울이 육신적인 굉장한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김은 여전히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음! “Indeed I count” -RSV-).

일제강점기 때 만주 연길에 종성동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은 함경북도 종성 사람 100여 명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침례교회도 설립했단다. 그런데 1932년 10월 14일 공산당원들이 이 마을을 급습하여 동네 사람들을 예배당에 몰아넣고 불신자는 좌편에, 교인들은 우편에 갈라서라고 지시하였다. 그때 한씨 부인이 오른쪽으로 가면서 “나는 죽더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외치자 성도 60여 명이 따라나섰고, 공산당원들은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김영진 목사를 끌어다가 옷을 벗기고 쇠사슬로 결박한 후에 교인들 앞에 세우고, 면도칼로 양 발목부터 가죽을 벗기다가 칼을 목에 대고 “너 이래도 예수쟁이 하겠느냐?”라고 협박하였지만, 김 목사님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 예수님!” 하였단다. 그래서 공산당원이 목사님의 생식기를 잘라버렸고 끝내 김 목사님이 순교하자, 공산당원들은 “너희도 예수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렇게 죽이겠다.”라고 겁을 줬다. 그런데도 우편에서 엎드려 울부짖고 기도하던 성도는 한 분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한다. 신앙관대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용인에 가면 한국선교 백 주년 순교자 기념관이 있는데 기념관 3층으로 올라가면 한국에서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와 우리 한국인 순교자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마지막 사진은 사진틀만 있는데 사진 대신 거울이다. 이제 그 사진틀의 거울에 비친 자신이 순교할 차례라는 뜻이다.

자 그러면 신앙중심을 예수님과 네모반듯하게 맞추어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어떠한 특징을 보여주던가? 설교본문을 보면서 저랑 같이 정답을 찾아보고 우리 자신과 맞대보자.

1) 안에서(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엔 크리스토, in Christ)는 바울의 전문용어로, 예수님과 신비한 연합을 맺고 있는 관계를 말하는데, 부부관계, 부자관계처럼 말이다. ‘성도’(ἅγιος 하기오스 ‘신령한 자’ ‘봉헌된 자’)와 밀접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제물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성화(聖化)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바울이 갈 2:20에 밝혀놓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세상은 흥망성쇠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서 사는 성도는 영원하다(요일 2:16-17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주님 밖에 있는 자들이 경험할 수 없는 풍성한 생명과 기쁨, 권능,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성취가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 불쌍해 보이나 실제로는 세상 속에 있는 자들이 불쌍한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가 훨씬 중요함을 알게 된다. 예수님과 주종관계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2) 디모데(1)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서의 공동송신자로 빌립보 교회에 소개하였다. 빌립보서를 실제로 쓴 저자는 바울이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가 디모데를 만나 제자로 양육하였고 믿음의 아들로 삼았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차이를 둘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이 빌립보 전도 때 디모데는 바울을 도왔고 또 빌립보에 몇 차례 방문 심부름을 한 탓에 빌립보 교회에 잘 알려진 지도자였다(행 19:22, 빌 2:19).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예우해준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인간관계가 바울의 겸손이고 배려이며 충성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다. 특히 겸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것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사도 베드로도 강권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주님의 일을 하면서 심판대에서 높아짐이 진정으로 높아짐이다. 아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을 처형할 때, 마을 한복판에 통나무를 세우고 범인을 묶어 놓고 범인들의 얼굴에 창호지를 물에 적셔서 한 겹 두 겹 붙였단다. 그러면 점점 숨을 쉬지 못해 서서히 죽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형수의 얼굴에 붙이는 종이를 ‘도모지’(塗貌紙)라 했는데, 그 당시에 아무리 도모지를 얼굴에 붙여도 천주교인들은 한 사람도 배교(背敎)를 하거나 다른 천주교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해봐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도모지’라고 하였고, 이 ‘도모지’가 ‘도무지’라는 말로 변했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도 ‘도모지 성도!’ ‘도모지 목사!’이길 축복한다. 아멘.

3) 은혜와 평강(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χαρις ὑμιν και ειρηνη απο θεου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아포 쎄우 απο ~으로부터 출처를 말함,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와 평강(χάρις 카리스 ‘총애’ ‘호의’ ‘선물’ ‘기쁨’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무조건 값없이 주시는 구원, 축복. “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2-4>. 평강 εἰρήνη 에이레네 ‘평화’ ‘화평’ ‘일치’ 하나님과 화목함을 나타낸다. 히브리어의 ‘샬롬’<שׁלום 샬롬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평안>에 해당).

그런데 ‘은혜’를 기원하는 인사는 헬라인의 풍속이었고, ‘평강’을 비는 것은 히브리인의 풍속이었다. 바울은 이 두 풍속을 합하여,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하지 않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미하였다. 요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은 신앙적이고, 관계적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논증하였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값을 치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살아있다면, 나 자신이 어떤 슬픔과 괴로움, 환난을 당하더라도 그것들과 함께 선을 이룬다니, 자신의 걱정과 짜증을 이겨낸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일 때 맛보는 평강이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이 가리키는 믿음신호등을 살펴보자. 빌립보서는 ‘옥중서신’기쁨의 서신’ ‘주 안에서 서신’이라고도 부른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감옥 밖의 성도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중에도 ’기쁨의 서신’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종으로, 우리 아버지와 예수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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