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3일 설교
“열리라!” (막 7:31-37 ‘예수님의 치유현장’ 21.1.3)
미국의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해주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에는 통행료를 징수하는 부스 7개가 나란히 있단다. 어느 날 한 신사가 금문교를 지나가다가 통행료를 지불하는데, 그 부스의 직원은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특이하고 궁금해서 물어봤다.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파티 중입니다.” “파~티라고요? 누구를 초대하셨나요?” “제가 제 자신을 초대했지요.” 며칠 후 그곳을 다시 통과하는데 그날도 그 직원이 변함없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오늘도 파티를 열고 계시네요?” “물론이지요.” “그런데 다른 부스의 사람들은 왜 파티를 열지 않나요?” “저 사람들이요? 자기들이 일하는 부스를 관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하여 오후 4시 반에 퇴근할 때까지 저들은 관 속에 갇혀있는 시체들이래요.” “그래요? 당신이 저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요? 나는 중요한 비전이 있지요. 댄스 교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곳을 연습장삼아 매일 춤추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 부스들을 보세요. 저렇게 닫혀있는 관이라면 제가 있는 이 부스 안에는 열려있는 무대랍니다. 하루 종일 춤을 추면서 월급까지 받으니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이처럼 이목구비가 있어도 닫아놓고 살아가면서 닫혀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해주는 예화이다. 교회에도 영혼의 이목구비나 신앙양심이 마비된 교인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행한 비극이지요. 설교본문도 고장 난 귀와 입이라서, 귀가 들리지 않은데다 말까지 더듬는 장애자를 우리 예수님이 고쳐주신 일을 보게 한다(32, 35). 그런데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셨다. 18절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러고 21절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심지어 33절에는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렇다면 이렇게 책망하신 말씀들이 무엇을 웅변해주고 있나요? “있어도 못 한다!”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 교인들의 신앙장애까지 다 포함하신 책망이다. 이러한 장애는 누구든 고침을 받으라는 게 우리 예수님의 판단이셨다.
귀와 입이 고장 난 그 장애자를 보신 우리 예수님은 ‘탄식’하셨다고 했다(34 στεναζω 스테나조groan, sigh, to give censorious feeling. 검열관과 같은 느낌을 줌. 압박! 예수님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아 답답하여 신음이 터져 나왔던 것). 우리의 현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죠. 코로나나 정치권 뉴스가 그렇고, 일본 스가 정권이나 중국 시진평 정권, 미국 바이든 정권, 북한 김정은 다 답답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열심히 찾아야할 교회도 답답하기만 하다. 더듬는 말들이라서 무슨 뜻인지 주의 깊게 들어도 알아듣기 힘든 실정이다. 정권도 사회도 교회도 예수님께 고침을 받아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게 되고 속을 뻥 뚫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홍길 씨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 14좌를 모두 정복한 산악인이다. 그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처음으로 올랐을 때 한 방송국이 준비한 인터뷰를 하였다. 진행자는 최고급 인간승리를 입증해 보이는 특종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고 이렇게 물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순간, 그 정상을 처음 밟았을 때 그 순간 그 느낌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마는 그래도 한 마디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눈물이 났는데 금세 고드름이 생겼습니다.” “하하, 그게 아니고, 첫발을 밟았던 그 순간 그 느낌 그 소감이요?” 이렇게 엄 대장이 묻고 대답했다. “허망하였습니다.” 진행자는 그대로 마무리할 수도 없고... 당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죠. 그런 느낌도 있었겠죠.” “네~ 그러고, 그 다음에는요?”라고 또 물었다(속으로 ‘이 바보야, 멋지게 감동시킬 말 한 마디 해봐요. 한 마디만 쏴주란 말이야. 도전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온 국민에게 희망을 불질러주는 그런 메시지 있잖아!’ 하고 다급해 하고 있는데...) 드디어 엄홍길 대장이 대답하였다. “그 그 다음에는 어떻게 내려갈 지 그게 두려웠습니다.”
산악인이 어마어마한 에베레스트 그 최고봉에 다다르면 5걸음 걷다가 10초 쉬고, 10초 걷고 30초 쉬면서 정상을 밟고 나면 뭘 실감할까? 영하40-50도의 강추위인데 칼바람은 불고 산소는 희박하니 체감온도 영하70도라는데 ‘어서 내려가야지...’ 이게 불신앙 인생의 최고봉 실제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답답함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그 실제비결을 함께 찾아보자. 다행이 오늘 설교본문에 그 정답이 있다.
1) 나아와(32)
저랑 같이 읽은 말씀 중에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간구하거늘” 이 세 마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음전문용어이다. 믿음과 기적은 서로 상생관계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수없이 보여주고 있다.
가끔 믿음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기적이 일어나 경우를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보여주고 깨달아 믿음생활을 하라는 초청이요 권면이며 전도인 것이다. 통상적으로 기적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시인하고 믿고 동참하는 성도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태복음 13장 58절에 있는 말씀이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나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가? 믿음을 행하여 보자. 기적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1999년 4월 20일 미국의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학생 2명이 자신들을 왕따로 만든 친구들을 향해 잔인하게 복수한 짓이었다. 학생 12명과 교사 1분 그리고 총을 쏜 학생 2명이 함께 사망했다. 범인 가운데 한 학생이 여학생 캐시 버넬(Cassie Bernall)에게 총을 겨누고 물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그래, 나는 믿어!” 그러자 범인은 총을 더 가까이 겨누며 고함쳤다. “하나님은 없어!” “아니야, 있어! 너도 믿어야 돼!” 그 순간 “난 믿지 않아.”라고 말하면 살 수 있는 분위기였지만 캐시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총탄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의 크리스천 십대들이 ‘캐시 버넬’ 티셔츠를 입기 시작했고, 그 셔츠에 “그래, 믿어”(Yes, I believe in God)라고 캐시 버넬의 신앙고백을 새겨 놓았단다. 그 티셔츠를 입고 학생들이 전도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더란다. 그러한 모습을 미국언론들은 이렇게 묘사했단다. “캐시가 미국 교회에 불을 질렀다.”
37절도 전도하기 쉬워졌다고 밝혀놓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모두 훌륭하시다!”(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LB-)이라고 소문냈다. 사 9:6에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NKJV- Wonderful = 기묘자 = 신기하고 놀라운 분<ὑπερπερισσως εξεπλησσοντο they were astonished beyond measure, -RSV->. 그래서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거의 정답에 접근한 셈!).
2) 따로(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귀먹고 말을 더듬는 장애인을 무리 중에서 불러내 단독으로 만나 치료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믿음을 확인하실 때 항상 단체보다 각 개인을 살피신다. 이 이치를 우리가 올바로 깨달을 때 믿음생활을 굉장히 진보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라고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셨지요. 독단적인 믿음으로 은밀하게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독단적인 골방에 기적이 있다.
어떤 할아버지가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여 할머니와 참 좋은 하루를 보내면서 석양 해가 지는 바닷가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많은 추억이 떠오르고 살아온 나날이 그래도 감사하더란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보, 참 고마워. 당신과 함께 한 인생항해가 내게는 지겹지 않았다오.” 그러자 할머니가 정색을 하면서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영감, 오늘이라도 진실을 말해주니 고맙소. 사실 나도 당신과 함께 사는 게 참 지겨웠다오.”
우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에바다를 필요로 한 게 할머니의 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꼭 할머니처럼 살아가는 교인이 의외로 많아요.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받고도 응답할 줄 모르는 교인들, 수없이 설교를 듣지만 자기 생각대로 듣고 끝내잖아요. 말로만 들을 일인가? 그의 눈빛으로 하는 말, 표정으로 하는 설명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여유가 없게 된다. 왜 그런가? 자신을 모르는 착각과 고집 때문이지요. 따로!
3) 에바다(34)
에바다(Έφφαθα 열리다 아람어 = <διανοίχθητι 디아노이크쎄티 너는 열려져라>로 마가가 헬라어로 설명함). 로마의 식민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말은 아람어였고, 식민지배국인 로마는 헬라어를 행정언어로 사용했다. 따라서 헬라어를 잘 하는 사람은 친로마파로 출세하기 쉬웠다. 지배자의 언어를 배워서 그들과 협조하면 많은 출세기회가 생기죠. 언어로 출세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아람어로 말씀하셨다. 귀 먹고 말까지 더듬는 장애자의 형편에 맞춘 것이다. 예수님은 소통하기 위해 약자들의 언어를 사용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στεναζω 스테나조 groan, to give censorious feeling ‘긍휼심정’<compassion>)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상함, 견딜 수 없는 좌절의 눈물, 분노, 수치... 다 잘 공감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신과 눈물과 전승문화가 소통하는 성경읽기, 설교듣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온통 영어 열풍에 빠져 있다. 영어가 출세의 수단이 됐다. 그래서 한글의 맛도 느끼기 전에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많고, 가수들의 노랫말에 영어가 섞인 지 오래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가요 가사는 우리말 어법을 무시한 게 허다하다. 컴퓨터언어는 더욱 심란하다.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과 저와 여러분의 삶을 맞추자. 예수님은 소통방해(귀 먹고, 말 더듬음) 고쳐주셨다. 만남으로! 단독 골방원리로! 소통함으로! 이렇게 우리도 소통방해를 고쳐가며 신앙생활하기를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