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4일 설교
“비로소 말씀하신 바!”(막 8:27-38 ‘예수님에 대한 인식 21.1.24)
우리 사회가 아직도 앓고 있는 심각한 병리현상 중 하나는, 집단체면(집단무의식 현상)을 정치권이 악용해온다는 게 제 생각이다. 이건 일제강점기나 군사문화의 영향인데 아직도 우리는 전체통제의 획일주의를 끊지 못하고 있다. 실례로 ‘붉은 악마’를 보자. 수십 수백만이 붉은 색깔로 거리를 차지하고 응원했지요. 그래서 우리 민족의 단결력을 온 세계에 보여줌으로 자부심을 갖게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때 한국대표팀이 전혀 예상 못한 4강 신화를 이룰 때, 외국언론들이 한국 대표팀을 Red Furies(붉은 난폭자들)로 칭하자 이 표현을 악마가 뭐가 좋다고 국내에서 ‘붉은 악마’로 번역하였다. 2002년 우리나라와 일본이 월드컵 축구대회를 공동개최했는데 일본은 한가지로 응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 열광의 나라 브라질도 똑같은 복장, 똑같은 몸짓, 똑같은 구호로 획일하게 응원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의 붉은 악마나 북한의 카드색션은 같은 거라고 조롱하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물론 빈손과 연장, 자발과 강요가 다르다고 해명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토록 기계적이어서 전체주의의 명령체제를 암시해주지 않던가? 그런 집단은 개성을 완전히 멸시해도 흔적도 없다.
21세기의 지구촌문화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을 창출했는데, 이것은 해체사고의 발로이다. 개성을 존중하는 개체사회라는 말이다. 옛 획일적이고 통제된 사회를 개혁하여 작은 걸 존중하고 개성을 높이 평가한다. 개인이 주체로 있는 문화흐름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집단문화의 상징인 유행이 대세를 이루고 있잖아요. 다 똑같이 입고 똑같은 구호를 지르는 그것을 대단하다고 칭송하고... 선진국은 벌써 사라진 풍속도인데, 우리는 아직도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면 사회에서 배제 당한다(트롯 방송경쟁). 교회까지도 작은 교회는 외면당하고 큰 예배당을 선호하다. 큰 무리에 끼어야 안도감을 실감한다. 집단 속에서 적당히 익명의 신자로 숨어야 신경 쓸 일도 없어지고 편리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엔 주님부재현상이 있고, 치유의 은혜는 거의 흉년이기 쉽다. 주님은 무리 속에서 장애인을 일대일로 만나주셨잖아요. 일생을 무리 속에 떠다니며 주님을 만나려고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은 평생을 낭비하기 쉽다. 정말로 주님을 만나 자신의 신앙장애를 고치고 싶다면 무리 속에서 주님과 독대하시기 바란다.
바로 그 독대를 오늘 설교본문이 보여주고 있다. 설교본문을 선명하게 깨닫고 우리의 신앙관에 잘 새겨두자. 설교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샤랴로 가셔서 거기서 자신에 대한 인식을 알아본 일인데, 그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헬몬산 기슭에서 시작했는데 요단강의 수원지가 있었고, 이 수원지는 40km를 흘러가면서 비옥한 토양을 이루고 갈릴리 호수를 이루었다. 그래서 황제 아우구스도가 헤롯대왕에게 하사했고, 헤롯은 그 땅에 이방신전을 대리석으로 건축하여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는 다시 헤롯의 아들 빌립에게 하사했다. 그래서 빌립은 황제 디베료 가이사와 자기 이름으로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고 이름을 지었다. 강이 있고, 땅도 비옥하고, 호수까지 생겼던 것은 수원지 때문인데, 왕들은 그 땅을 하사하고 바치고 신전을 지어 꾸미고, 이름 붙이고... 엉뚱한 혼동을 서슴없이 하는데 거기에 장단을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수님의 인식도 혼동과 착각을 고집하기 쉽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날 때 확인해 보았더니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라는 여론이 지배적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는데, 곧바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 이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더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파격적인 칭찬과 약속을 하셨다고 밝혀놓았다(베드로 신앙고백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고 또 천국열쇠를 주셨다고).
이렇게 엄청 만족하신 예수님이 “수난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비로소 공개적으로 예고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일제히 당황하였고, 직선적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책망하듯이(επιτιμαω 에피티마오 예수님이 귀신에게 한 말) 말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호통을 치셨다는 것이다. 그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고 찬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처방해주셨다. 건강의 축복, 재물의 축복, 일터의 축복, 가정의 축복, 삶의 질의 축복... 그런데 그런 축복을 누리려고 씨름만 한다면 그 사람은 속빈 강정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축복 누림을 올바로 하는 신앙 삶은 결국 자기십자가를 짊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역설하셨다는 것이다. 좀 길게 설명했지만 이게 설교본문의 내용과 그 정황이다.
자 그러면 설교본문을 통하여 성경독자들이 깨닫고 반영할 그 가르침은 무엇인가?
1) 비로소(31)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αρχω begin, to be first, head, chief, originally, wholly 1: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 비로소 나타내시니” “Jesus began to show” –NKJV-) 적합한 상황이라는 것!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했던 대답은 굉장히 우수한 여론이었다. 세례 요한은 마지막 때 오실 메사아를 준비한 선지자로 온 나라가 인정하였다.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최대급 능력의 선지자였다.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여론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분이 선지자였으니까 예수님의 여론은 최고의 찬사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토록 긍정적인 여론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왜냐면 그런 여론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본질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3년 동안 나와 함께 숙식하며 배웠던 제자의 신앙관으로 볼 때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줄로 알고 너희가 따르느냐?”이다.
어느 고등학생이 친구들에게 전도하면 그들이 “야, 어떻게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가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냐?”라고 반문했단다. 그러면 그 학생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너희들이 믿는 것은 사람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믿으라고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물위로 걷는다는 것은 물론 미친 소리지. 그러나 더 미친 소리는 하나님이 물에 빠지셨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맞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물을 만드셨는데 예수님께서 물의 원리를 활용하여 물위로 걸어가신 게 뭐가 그토록 잘못인가? 사람을 만드신 분이 고장 난 사람을 고치신 일이 뭐가 그렇게 희한하다고 그러는가?
나사렛 예수님은 누구인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과 흥분을 자극시킬 매력을 갖춘 분이다. 사실 인권의 소중함과 민주주의, 과학과 의학의 발달, 병원과 대학, 자선기관을 만들게 동기부여 하셨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 학문을 창의적으로 발전하게 하셨다. 이 사실은 세계역사가 입증해준다. 그런데 2000년 전 나사렛 예수님은 당시 권력과 존귀, 영광의 자리를 멀리하셨다. 그러나 권력과 존귀, 영광이 올바로 실존하지 않으면 지적하고 책망하셨다. 그래도 가장 핵심인식은 십자가의 화목제물이다. 아멘.
2) 하나님의 일(33)
사탄의 짓과 결별한 제자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착각하고 억지 고집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예수 믿으면 축복이 호박 넝굴채 굴러들어오고, 실패한 사람이 무조건 성공하고, 돈 잘 벌고, 출세하고, 병 고침 받고...” 번영의 설교(prosperity gospel)가 온 한국교회를 ‘사람의 일’로 변질되게 물들이고 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있는 교인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오늘 설교본문은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많은 고난을 받고 결국 십자가로 죽임을 당하나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가리키고, 또 ‘내 성격대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치관과 하신 일을 올바로 알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시간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온갖 유혹과 죄악이 넘쳐나는 엿새 동안에 신앙고백대로 생활하는 게 어려워진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자. 하나님의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명하는 ‘오직 예수’파들이 얼마나 흔한지...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일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수정하는 일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래서 헌신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좁은 생명길이 믿음이요 소망이라고 다시 정의해야 한다. 아멘.
3) 자기 십자가(34)
올바른 그리스도인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셨다.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차이를 아는가? 전문가는 어떤 일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과 기술을 익힌 실력자이다. 나라마다 전문가의 능력과 역할을 소중히 알고 자격증을 부여하여 활용한다. 전문의사가 아닌 사람이 치료행위를 하면 ‘돌팔이’라고 조롱당한다.
아마추어는 남이 피워놓은 불에서 따뜻함을 즐기지만 프로는 불을 피워놓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위를 이긴다. 또 아마추어는 약자에 강하지만 진정한 프로는 강자에 강하다. 아마추어는 돈을 소중히 여기지만, 프로는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아마추어의 자리는 항상 관중석이지만 프로의 자리는 자신의 땀을 쏟아내며 실력을 발휘하는 운동장이다. 아마추어는 비난해도 프로는 정정당당하게 비판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 신앙인도 프로처럼 한다. 그래서 쭉정이 교인은 ‘너도 나도 죽자’라는 식인데, 자기 십자가를 진 성도는 ‘너도 살고 나도 살자’고 헌신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신앙인 반에서 믿음생활을 하는가? 프로? 아니면 아마추어 반인가? 아마추어는 자신한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지만, 프로는 자기 자신한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다. 자신이 어느 반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기준을 알려준 친절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믿음과 율법의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바리새인들이 아닌 사람들은 아마추어 신앙인이라고 속단했다.
우리도 예배드리러 와서 성전의자에 앉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배 중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하고, 생각을 고치고, 자기 삶을 맡길 때 전문신앙인이 된다. 이것은 성령의 보혜사 되심으로 성취된다. 보혜사 되신 성령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프로신앙인이길 축복한다. 아멘.
자 오늘 설교가 보여준 우리 자신을 확인해보자.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who)며? 무엇(what)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시며, 나의 구세주요, 내 십자가를 지고 좁은 생명길을 후원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