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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7일 설교

“주목하자!” (막 8:22-26 ‘믿음치유의 필수’ 21.1.17)

‘엘살바도르’는 중남미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약 2만1천㎢ 인구 약 645만 명)의 이름이고, 그 뜻은 스페인어로 ‘엘’(하나님) ‘살바도르’(구세주)인데, 이 나라의 수도 이름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세주’)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1970년대에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갈등에 휘말리고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부유층은 경제나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 각 분야의 상류층을 장악하였고, 부를 더욱 축적하려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폭력과 살해를 자행하였다. 그럴 때 오스카르 로메로 신부는 보수적인 대주교답게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는 신부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런데 그는 점점 더 참혹해지는 민중의 고충을 사실대로 보아갈 때, 절친한 신부가 억울하게 암살당한 것을 보고 민중의 변호자로 용감하게 돌변하였다. 그러다가 로메로 신부는 1980년 3월 24일 산살바도르의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대부분 말기 암환자들을 상대로 미사를 집례하면서 정부의 기본인권탄압을 설교하던 중에 엘살바도르 정부가 기용한 저격수에게 암살당했다.

30년이 지난 2010년 12월 21일, 유엔총회는 오스카르 로메로의 사망일인 3월 24일을 국제 모든 인권침해와 관련된 진실한 권리와 희생자의 존엄을 위한 날로 지정하였다. 그러고 4년 후 2014년에는 엘살바도르의 국제공항 정식명칭을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로 바꿨다.

오스카르 로메로가 남긴 말이다. 생각하면서 그리고 해당한 그림을 그리면서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그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전혀 상관하지 않고, 불의를 고발하지 않고 있으며,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힘차게 전하지도 못하고 있고, 또한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거부하지도 못하고,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그들의 죄에 대하여 동의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인으로의 사역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잘 살고 있다고 안심시켜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고쳐주려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교회의 진정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나를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차리고 그 언약이 잘 실현되도록 삶의 현실을 조종하고 변화시켜 참여하도록 그 진원지로 실존한다면 그리스도인이든 교회이든 선교단체이든 가장 순종하고 충성하는 신앙 삶인데, 오스카르 로메로처럼 시행착오를 하는 것은 너무나 흔하지만 그 시행착오를 모르고 “할렐루야!” 하는 교인들이 다반사(茶飯事)라는 사실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바로 그 안타까운 다반사를 바로잡는 예수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설교본문은 예수님이 갈릴릴 호수 옆 벳새다에서 맹인을 완치하시는 일을 기록한 것인데, 마가복음은 이제까지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다. 온갖 병을 고쳤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벳새다 들판에서 오병이어 기적... 동네와 도시, 들판, 배 안에서 예수님은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다. 문제는 이런 일에 대하여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신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수없이 시비를 걸어왔다는 점과 또 그 기적들을 목격한 사람들이나 제자들까지도 그 기적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사야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언행을 그냥 외모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고, 좋아하고, 외우고... 끝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정인데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맹인을 재차 안수하시면서 완치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맹인치유를 통하여 성경독자들에게 깨우치려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인식 수준이다(무엇을 얼마나 어디까지 보느냐?).

여러분, 눈이 하는 역할을 아는가? 눈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그래서 눈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창문이라고 하지요. 사람인체의 감각기관이 수집하는 정보량의 80% 이상을 눈이 맡는다고 하니 눈의 기능은 막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눈은 시력에 따라 정상, 근시, 원시, 난시로 되고, 또 색깔을 분별하는 능력에 따라 정상, 색맹, 색약, 적록색약으로 나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 이다.”(막 8:18-19) ‘열둘’도 못 보는 눈이 있고, ‘열둘’까지만 보는 눈이 있고, ‘열둘’ 그 이상도 보는 눈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설교본문 25절에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라고 밝혀 놓았다. 못 보는 사람을 볼 수 있게 예수님이 고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고쳐지는가? 예수님이 하시는 실제 모습을 확인하여 보자.

1) 쳐다보며(24αναβλεψας ελεγεν βλεπω τους ανθρωπους ὅτι ὡς δενδρα ὁρῶ περιπατουντας)

사람이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see, look>을 헬라어는 일반적으로 βλεπω<블레포> ὁραω<호라오>라고 한다. 23절에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고 했는데(‘보이느냐’는 βλεπεις 블레페이스 you see. “Do you(possibly) see anything?” -Amf-). 맹인이 ‘쳐다보며’(αναβλεπω 아나블레포 = ανα + βλεπω again look “he looked up”-영어- 자신이 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쳐다보는 것인데, 단점은 아무리 보려고 애를 써도 제대로 다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 사람들이 보인다<βλεπω> 나무같은 것은 ὁραω 둘 다 현재형 I look). 그렇다면 맹인은 예수님께 안수를 받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우러러 봤지만 실제로는 일반적으로 본 것이다. 바로 이런 게 대충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르되” (ελεγεν 엘레겐 λεγω의 미완료, 반복함. 희열을 입증함). 그러나 치유는 되다 말았다. 안타깝지요!

덴마크 수상의 취임식 때 있었던 일이란다. 왕이 수상에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서약하세요.” 하자 수상이 대답했다. “폐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 위에 손을 얹을 수 없습니다.”곧바로 덴마크 왕이 이렇게 말했단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나님도 자넬 안 믿으시네.” 성경을 증인으로 삼고 중대한 약속과 맹세를 하는 데도 대충 형식치레로 하는 세대라는 것이니 웬지 씁쓸하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실감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주목하여(25)

주목하여 보더니”(διαβλεπω 디아블레포 주목하다. δια는 ‘통하여’ ‘더 깊이’ ‘꿰뚫어’의 뜻이 있다.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시매’ 맹인이 일반적으로 보던 게 통하여 볼 수 있게 바꾸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눈을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상의 사물을 보는 육체의 눈(肉眼)과 지식과 학문의 세계를 보는 지식의 눈(知眼), 하나님을 보고 영생복락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靈眼)이다. 이 3가지 눈이 건전하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왕하 6:11-19에 보면,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였다.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 현실을 보고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그러자 엘리사가 게하시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게하시가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눈은 무엇을 잘 보나요? 돈인가? 높은 자리? 면류관 봉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은 예수님이 바로 자기 앞에 계시는데도 볼 수 없어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까지만 보았다(目不識丁). 누구보다도 자주 성경을 읽고 찬송 부르며 기도하지만 무엇을 먹을까 가질까 이 탐욕에 사로잡혀서 예배당을 크게 지어놓고 그 예배당에 붙잡힌 위인도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3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산상보훈 하였고,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설교하셨다. 저와 여러분의 눈에 예수님이, 아니 예수님의 마음이 잘 보이고, 심판대가 선명하게 보이기를 축복한다!

3) 밝히 보는지라(25)

밝히 보는지라”(ενβλεπω 엔블레포. εν in 안에서, =“나아서”) 어떻게 하면“밝히 보는지라”가 될 수 있게 고쳐지는가?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체험하였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행 9:8, 10-12). 핵심을 요약하면 ‘주께서 이르시되’와 ‘사울의 기도’와 ‘제자의 안수’인데 정리하면 하나님의 뜻 + 쓰임 받는 종 + 은총 받을 성도 = 기적이다.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가? 존경할 만한 것을 시인하는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이 보여주는 믿음은 계산하여 해 볼만 한 것을 시도하는 게 아니다. 키엘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삶으로 믿음을 설명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일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마자 아들을 바친 게 아니다. 성경에 보면 장작을 준비하고 일꾼들과 아들과 함께 사흘을 걸어갔다고 했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고, 그 생각은 엄청난 갈등을 일으켰을 거다. 하나님이 하늘에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해서 75세 때 광야생활을 시작했는데, 겨우 백세에 득남하게 하시더니 그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해서 아브라함은 순종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거역할 이유는 넘쳐났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야만적인 명령을 내리실 수 없없기에, 그는 수없이 돌이킬 수 있는 발걸음을 걷고 또 걸어서 사흘을 갔고 그 아들을 제물로 올려놓고 칼을 빼들었다. 하나님과 완전히 결별할 처지인데도 왜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을까요? 그 설명하기 곤란한 그것을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이 다 불가로 판단 났을 때도 그 모든 이유, 계산을 뛰어넘는 순종이 정금믿음의 수준이다. 이 믿음에 도전하자.

자 이제 오늘 설교를 들은 성도답게 신앙 삶을 다시 조정하자. 오늘 설교본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다시 보게 고치신 현장을 보여주셨다. 치유는 존경만 해도 시작되고, 통하여 보면 치유는 엄청 진행되며 완치되려면 안으로 들어와서 봐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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