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9일 설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 6:30-44 ‘오병이어의 기적’ 20.11.29)
6.25전쟁 때 인민군이 목사님14명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는데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14명 중 12명이 죽고 2명만 살아남았단다.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후에, 국군은 12명의 목사님을 거룩한 ‘순교자’로 추천하였다. 문제는 살아남은 목사님 2분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틀림없이 배교하고 살아남았을 거야.”그렇지만 그 배교에 대하여 두 목사님은 침묵하였고 힘든 목회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교인들은 두 목사님을 냉대하였다. 그러다가 12명의 목사님을 처형했던 인민군 소좌(少佐)가 국군에게 체포되어, 순교상황을 진술함으로 진실이 밝혀졌는데; 목사님 14명에게 고문과 회유를 하였더니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애걸하다가 성경을 밟았던 목사님이 12명, 나머지 2명은 죽으면 죽어도 성경을 밟을 수 없다고 버티다가 한 명은 고문에 지쳐 실성까지 하는 걸 보고, 군인입장에서 그 두 목사님을 부러워하면서 “죽이기 아깝다”라고 생각되어 살려주었고, 12명을 가짜 목사로 판단하고 총살시켜버렸다고 자백하더란다.
그래서 두 목사님에게 그 진실을 확인하였더니, 실성한 목사님은 그 상황을 이랬다저랬다 하였고, 정신이 온전하였던 목사님은 일체 입을 열지 않더란다. 왜 그랬을까? 총살당한 목사님들의 명예를 생각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진심을 몰랐던 교인들은 그 목사님을 배교자라고 무시해댔기에, 가는 곳마다 배교자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사건을 전혀 모르는 시골 교회로 가서 목회하다가 일생을 마쳤단다. 그런데 그 시골 교인들은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용기를 얻으며 변화를 거듭해 갔단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자문자답을 해 보는 게 필요하다. “과연 누가 진짜 순교자인가?” 고문과 타협하다가 실패하여 죽은 목사님들이 순교자인가? 아니면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설교자로 살아간 시골 목사님이 순교자인가?
오늘 설교본문도 조용하게 그러나 자신이 할 일을 충실하게 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38 ‘오병이어’<五餠二魚>란 제목으로 우리 한국교회에 잘 소개되어 있는 말씀임). 현장을 좀 설명하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도 못하고 천국복음 전파에 몰두하시다가 잠깐 쉬려고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다. 문장이나 악보를 보면 꼭 쉼표가 있다. 만약 쉼표가 없다면 숨이 막혀 글도 노래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적당한 곳에서 잠깐 쉬는 게 인간의 삶을 건강하게, 절도 있게, 내용 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그 쉴 곳을 미리알고 먼저 가서 예수님을 기다린 사람들이 큰 무리라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 천국설명을 해주셨고, 청중은 들판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가 저물 때까지 설교를 들었단다. 문제는 저녁식사였다. 성경기록을 직접 보자.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예수님의 대답이 얼마나 엉뚱했던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제자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밝혀놓았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1데나리온 = 하루 품삯. 6개월 20일간 월급).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이 대답을 이렇게 하셨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들고 축사하시고 나누어먹었더니, 실컷 먹고도 남은 게 12바구니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들은 ‘오병이어’<五餠二魚>란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축사’이다(ευλογεω 율로게오 : ευ + λεγω 좋게 말한다. ‘찬송한다’<마 21:9> ‘축복한다’<마 26:26> ‘감사한다’<요 6:11 ευχαριστεω 유카리스테오 라고 고쳐 기록함>. 말도 안 되고 형편없이 부족하지만 감사 찬송하심! ≠ 떼를 쓰고, 졸라대는 것, 특히 무질서<39-40>. ευλογησεν και κατεκλασεν τους αρτους και εδιδου τοις μαθηταις<예수님은 축사를 한 번에 끝내시고 떡들을 한 번에 떼시며 제자들에게 계속 나눠주심. εδιδου는 διδωμι 미완료 >). 같은 기적원리가 왕상 17:11-16에도 기록되어 있다.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여러 날 먹었으나’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출 15:16>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수 10:13> = 계속 나눠주심).
내 손에 있는 게 형편없지만 하나님께 축사를 하면 하나님이 그 축사를 받으시고 기적을 이루신다. 그런데 예수님 손에 아무 것도 없으면 축사를 시도할 수 없다. 이 이치를 쉽게 설명하면 내 믿음중심이 제로(0)이면 아무리 큰 숫자를 곱해도 여전히 제로(0)이다. 그러나 내 믿음이 겨자씨(0.1)만큼이라도 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면 그 0.1은 기적의 원인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다. 우리 자신 모두 5병2어를 예수님께 드렸던 그 아이처럼 신앙생활을 해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자 그러면 오늘 설교본문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우리 예수님의 축사원리에 정통해 보자. 아멘.
1) 불쌍히(34)
예수님은 축사하시기 전에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불쌍히 여기사’(σπλαγχνιζωμαι 스프랑크니조마이 to be moved with pity or compassion ‘애타는 마음’ ‘Com<함께> + passion<고통>’ 고난을 함께 나눔.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워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밝혀놓았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도보로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어떤 소망을 가졌기에? 얼마나 목말랐으면? 달려갔을까? 혹시 예수님을 놓치면 큰일이니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으니 나도 꼭 만나보고 싶어서 지금 예수님의 배를 보면서 달렸겠지요. 그토록 간절한 마음을 목자 없는 양 같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였으리라. 믿음을 선한 행실로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아무 소용없어 죽은 시체와 똑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목마름을 예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신다. 이러한 분이 예수님이시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웃의 신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자비로운 분이다. 아래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인격자이다. 사람의 영혼상태를 읽어내는 성도라면 성령충만 하다. 우리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게 신앙생활하길 축복한다. 아멘.
2) 너희가 주라(37)
들판에 모여든 사람들이 12명 정도였다면 제자들도 “네, 그렇게 하지요.”라고 대답하고 한 사람씩 책임졌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만 5천 명, 남녀 합하면 만 명, 아이들과 노인들, 장애 환자들까지 2만 3만 명도 될 수 있었다. 그러니 너무 황당했던 빌립은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했다. 빌립은 계산에 밝고 사리분별을 잘하는 교인이었다. 들판청중은 2만 3만 명이나 되는 한 끼 식사 값을 얼른 계산해보니 200데나리온이었다. 노동자 하루 일당 5만원만 계산해도 200x5만= 1천만 원. 조건을 갖추어야 봉사든 순종이든 한다는 신앙인이 빌립이었다. 예수님을 빼기하고 계산하니까 항상 ‘못 한다’가 대답이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그래도 육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는 만큼 ‘순종’이고 ‘믿음’이다. 아멘.
3) 가서 보라(38)
“가서 보라” = 축사를 시도할 근거를 찾아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있더이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니까?”(요 6:9 안드레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우리의 현실에 맞게 표현하면,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목사님께서 “건축자재를 좀 살펴봐라.”하시기에 한 집사님이 벽돌 한 장 들고 와서 “목사님, 이 벽돌 한 장 뿐인데 이걸로 성전건축을 시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네요.”라고 하는 말과 비슷하다.
5병2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는 빌립 같은 교인이 있다. 빠른 계산으로 판단하는 교인이다.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빠듯한데 주일이면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어리석은 짓이지...” “시간이 돈인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라니 말도 안 되지.” 이런 계산 때문에 항상 초보신앙생활에 머문다. 그래서 “안 돼!” “못하지.”라는 답만 나온다. 또 안드레 같은 집사님이 있다. 동참하기는 하는데 마음속에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의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집사님들이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박자감이 없다. 그런데 이름 없는 어린아이 같은 성도가 있다. 시간이든 의식주든 자기 것 전부를 아낌없이 바친다. 대단한 결단을 한 것이다. 보통 아이들은 먹는 것이라면 굉장히 움켜쥐고, 혼자 먹으려고 감추곤 한다. 그렇지만 욕심을 꺾고 예수님 손에 넘겨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는 수만 명을 배불리게 되었고 ‘12바구니’나 남게 된다는 것!
한 아이의 한 끼 식사일지라도 좋고,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아들이라도 괜찮고, 저녁 먹을 것도 없는 장애환자일지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은 가진 것이 없으나 장차 벌어서 바칠 수 있을 때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하는 것은 기적 지연이다. 예수님은 내일 이백 데나리온을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장차 성공해서 가져오라고 말씀하지도 않았다. 교인들 앞에서 자랑할 만큼 아름답게 꾸미고 유식해지고 잘 된 다음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지금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서 축사하시게 하는 게 정답이었다. 아멘.
대통령을 지내고 나면 연금으로 살면서 비서를 두고 책이나 쓴다는 핑계로 놀고 지내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이다. 그러나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를 사람들이 평할 때에는 ‘재임 때보다 퇴임 후가 더 낫다’라고 한다. 그는 세계에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떤 곳이든지 찾아가서 분쟁해결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 북한과 남한이 전쟁위기로 쏠리고 있을 때 그는 이북으로 가 김일성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시켰다. 카터가 한국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30분간 전도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말했다. “내자(內子)가 다른 종교의 신자라서 내가 예수를 믿으면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대통령을 그만 두면 믿겠소.” 그런데 그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총살당하고 말았다. ‘가서 보라’ 작고 시시해도 기회로 살리길 축복한다.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의 그 현장을 다시 보면서 핵심을 챙기자. 어린 아이가 바쳤던 5병2어는 굉장한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지만, 부잣집은 가축사료로 사용하였다. 또 물고기도 갈릴리 호수에서 쉽게 잡아서 흔한 생선이었다. 물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보리떡 밑반찬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축사하시니까 기적재료가 되어 수만 명이 먹고 남았다. 이런 기적의 주인공으로 신앙생활하길 축복!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