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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8일 설교

“예수님을 배척한지라!” (막 6:1-6 ‘믿음을 방해하는 정보’ 20.11.8)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대추 한 알” 장석주 교수)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손가락 마디만한 대추열매지만 세상과 통하였기에 우리 선조들은 결혼식 같은 잔칫상에 올리지 않았을까요? 대추 열매는 붉게 물들이기까지 태풍을 몇 번씩 맞고, 또 천둥소리와 번개벼락에 몇 십번이나 심장 떨리게 놀라 오들오들 떨면서, 초죽음에 빠지는 날을 여러 차례 견뎌냈다는 것이다. 그러고 온 몸이 둥글게 쭈글쭈글해지기까지, 푹푹 찌는 땡볕 계절과 칠흑같이 어두운 밤들을 지새우고 새벽에 무서리를 맞으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나날에 시달리면서 세상과 통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비슷하지요. 인생살이가 순탄하면 오죽 좋으련만...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시련은 필연이다. 시련과 공포심이 종종 몰려와서 좌절로 몰아가는데도, 인생의 열매들을 맺다가 보면 붉고 둥글게 쭈그러진 대추처럼 온몸과 마음에 주름이 생겨나지만, 그러는 중에 인생의 대기만성(大器晩成)을 이루곤 하잖아요.

Helmut Richard Niebuhr(1894-1963)는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세상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 실존인지 그 실체를 연구하며 가르치고 또 여러 번 논문을 썼다가 결국 그것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그 책이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이다. 그 책에서 리버는 현존하는 교회의 존재실태를 5가지로 정리하였다. ① against(세상이라는 사회와 대립관계, o x) ② of(일치하지만 평행) ③ above(이상으로써 상위존재) ④ paradox(합의되지 않는 양극적 모순관계) ⑤ conversionist(개혁자, 들어가서 섞이고 겪으면서 물들여서 변화시킴, transformer = ‘세상과 통하는 것!’)

오늘 설교본문도 세상을 부풀게 하는 교회임을 보여주려고 무척 애를 쓰는 모습이다. 확인해보자(2 ‘듣고 놀라 εξεπλησσοντο : εκπλησσω<에크세플레쏘 to strike out of, 충격, 압도. amaze>의 imf, pass = 하나님께서 감동감화 시키심. 이 일은 고향회당에서 설교 중에 일어난 것임. =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16-22> 누가는 의사출신답게 6하 원칙으로 기록했음.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었다. 그 성경은 이사야 61:1-2인데, 특히 ‘가난한 자에게’ ‘포로 된 자에게’ ‘눈 먼 자에게’ ‘눌린 자’ 이 말들의 공통점은 짓밟힌 허약자인데,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지극히 무시한 지역차별 주장임 =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와 일치함!) 이 약자들을 회복시켜주고 싶어 간절했던 분이 예수님이셨음. 더구나 예수님은 자기 고향이기에 약자설움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또 철저히 무시당했던 그 동네출신 청년 예수가 갈릴리 온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고향에 와서 설교했다. 고향은 누구든지 친근, 포근, 안기고 싶은 어머님의 품 같은 안식처이다. 또 고향은 동질성을 만들어준다. 학교나 직장, 객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그냥 반갑지요. 그래서 고향사람이 출세하거나 유명해지면 은근히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2).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문을 가졌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통상 ‘어떻게’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 사건은 어떻게 일어났을까?’라고 궁금해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How’보다 ‘Why’에 관심을 갖고 ‘왜 하나님은 창조하셨는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는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질문을!

아무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의 출처를 궁금해 했다. 여호와에게서 인가? 인간의 노력인가? 아니면 사탄에게 받은 건가? 그러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라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놀라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눅 4:21-22놀랐던 이유를 밝혀놓았네요. ‘증언’과 ‘은혜’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설교를 들었다는 것임) 설교의 핵심은 장차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 지금 회당에서 설교를 듣고 있는 너희에게 성취되었다고 증언하시는 동안 감동감화가 계속 반복되었던 것임!).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고 5-6절에 기록되어 있다(εθαυμαζεν δια την απιστιαν 에싸우마젠 디아 텐 아피스티안. 미완료, “He marveled because of their unbelief.” -NKJV-). 고향사람들이 믿지 않음으로 예수님이 놀라셨다는데, 사실은 굉장히 안타까운 탄식이다. 설교를 듣고(읽고, 쓰고)도 믿음행위가 없을 때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시고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 예수님은 ‘길가’, ‘돌밭’, ‘가시밭’도 아니고 말씀 듣고 깨달은 ‘좋은 땅’을 찾아 ‘네 믿음대로 되라’라고 말씀하여 기적을 행하신다.

자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고도 믿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게 그 정답!

1) 호기심(2)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행하는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의 설교말씀의 권능과 치유(‘증언’과 ‘은혜’)를 듣고 보고 있는데 놀랐다(εξεπλησσοντο : εκπλησσω<to strike out of, 충격, 압도, amaze>의 imf, pass = 하나님께서 감동감화하심!)고 했다. 그래서 ‘어디서’ ‘어찌됨’을 굉장히 궁금해 하고, 그 출처를 알아내려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예수의 저 지혜와 권능과 안수치유는 어디서, 왜 일어나는가?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물었다. 이것은 좋은 길조이지요. 참여와 탐구, 확인, 발견을 이루기 때문이다. 단 호기심으로 끝내버린 게 문제였다. 왜냐면 신앙 삶은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을 만나 고백을 갖출 때 믿음이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크고, 교인들이 착하고, 신앙생활이 풍요롭고, 하나님을 예찬하고... 다 필요하고 좋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는 고백과 신앙관, 삶이 없다면 아직 구원문턱에 있는 것이다. 구원 문턱에서는 권능도 응답도 여호와 닛시도 하나님을 인식시키려고 ‘소수’(5)로 일어날 뿐이다.

2) 본질인식(4)

당연히 존경받아야 할 선지자가 가족과 친척, 고향 사람들에게는 무시당한다는 말씀인데, 현실적으로 친숙한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이셨지만 그의 공생애 헌신을 통하여 더욱 존경받아야 할 바리새인들에게 오히려 멸시와 모욕을 당하다가 결국 십자가처형을 동족의 고발로 당하셨고 그때 12제자들에게 배신당하셨잖아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던 것이다. 이런 불상사는 겉모습과 속 본질 문제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이 상대할 사물에 대하여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결론을 편견(선입견, 고집)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성장기를 지켜보았고(빈곤한 가정환경, 율법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지 못함, 그저 목수생활... 3절에 ‘아니냐’라는 질문을 3번이나 반복하였음),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예수님을 배척했던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정보에 근거한 판단이 정당하다고 자부하기에 충분한 사실이 있었다.

바울과 신라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베뢰아 사람은 그게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하였다. 이점을 훌륭하게 보아야 한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스 7:10-11)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 12:8). 성경지식은 믿음에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올바른 성경이해는 깨달음과 믿음생활에 필요하지만 어떤 성경이해는 올바른 믿음을 갖는데 방해되기도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4). 성경으로 올바른 본질 인식을 하자는 것!

3) 예수님의 믿음(6)

예수님이 애타게 바라시는 믿음은 분명하게 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의 믿음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의 나사렛 사람들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면 헛것이요 가짜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신중하게 읽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에 따르는 행위와 삶을 믿음이라고 아주 길게 처지가 다른 여러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유태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3.23.~ 1980. 3.18)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5가지의 요소를 지닌다고 밝혔다. ① 관심(생각, 표정, 언행이 보이고 신경 써짐) ② 이해(생각, 표정, 언행을 알아차리고 공감함) ③ 책임(언행, 삶에 참여하여 공동부담 함) ④ 존경(예의바르게 인정하고 높이고 따름) ⑤ 희생(내 귀한 것을 공유하고 사용하게 함). 하나님을 사랑함도 똑같다. 이런 사랑생활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는 믿음은 정보나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진리’라는 과정을 거쳐서 그 진리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 삶 자체라서 의심이나 거짓의 정반대인 진실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의사를 믿고 수술대에 몸을 맡기고, 이발사를 믿고 면도를 하고, 은행을 믿고 돈을 예금하고, 바다의 파도에 불안을 느끼면 바다에 뛰어 들어가 수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히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밝혀놓았다.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준 믿음신호등을 확인하고 분명하게 맞춰보자. 오늘 설교본문은 우리 예수님이 고향에 가서, 음부의 권세를 확실히 꺾고 천국실현을 온전히 이루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가셨지만, 시작하시다말고 결국 포기하시고 돌아섰다는 안타까운 사연이다. 그 안타까움을 설교본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그들이’를 우리자신이나 가정, 일터, 교회로 바꿔도 아무 상관이 없다.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에 해당되지 않게 제발 신앙생활을 해 가는 저와 여러분이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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