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일 설교

“믿기만 하라!” (막 5:35-43 ‘영혼을 살리는 믿음’ 20.11.1)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킬리만자로 산이 있다. 북쪽과 동쪽은 케냐와 접해 있고, 킬리만자로 산 남동쪽으로 파레 산맥이 뻗어 있다. 그런데 킬리만자로 산에 매우 험하고 위험천만한 등산길이 있단다. 그래서 정상까지보다 더 편하게 등산할 수 있는 등산길을 여러 개 개발해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험악한 등산길을 피해 올라간단다. 그렇지만 위험천만한 등산길 중턱에 가야만 환호성을 지르면서 볼 수 있는 풍광이 있는데, 그 풍광을 아는 등산가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그 험악한 길을 선택한단다. 이제 그러한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어서 일반인 등산객들도 그 풍광을 즐기려고 일부러 그 험악한 등산길을 선택하기도 한단다. 그 등산길은 가파른 절벽바위를 타고 꼬불꼬불 올라가는 좁은 길인데, 길 입구에 도달한 사람마다 겁을 먹기에 충분하리만큼 위험해 보인단다. 그래서 입구에 이런 푯말을 세워놓았다고 한다. “이 길은 좁고 다른 길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미 수없이 통과한 길이니 그대 역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비슷한 결단을 하게 되는 경우는 의외로 허다하다. 오늘 설교본문도 몸부림을 치게 하는 인생의 한계를 당하여 애간장을 녹이면서 결단하는 아버지를 보여주고 있다(35. 회당장이 자기 딸을 고치려고 겨우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데, 예수님께서 도중에 하시던 일을 아직 끝내지 못했을 때, 회당장의 딸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임).

그런데 오늘 설교본문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삶을 아주 구별되게 보여주는데,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36)과 큰 무리(23)가 그 사람들이다. 첫 구별은 회당장의 귀한 딸이 사경을 헤매다가 부모의 가슴에 무덤을 만들지도 모를 처지였다. 그러나 큰 무리는 어떤 기적, 유익, 유행을 찾아 몰려다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두 유형이 다 같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믿음’ 때문에 교회에 소속하여 순종하는 성도와 자기 필요들을 해결하려고 ‘혹시나’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혹시나’하는 교인들은 진정한 감사나 신앙고백에 해당한 일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이 큰 무리의 ‘혹시나’에 속한다면 최대로 비극적인 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31-33에 이런 말씀을 해 놓았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과 염소는 여러 가지로 비슷하지만 진짜와 가짜라는 것이다.

두 번째 구별은 예수님을 자기 삶에 기필코 모시려고 애타게 노력하는 성도(40, 22-23)와, 예수님이 부담돼서 떠나달라고 하는 무리들이다(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가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구별은 기도하는 삶과 심히 통곡으로 끝내버리는 삶이다(23, 38, 40).

회당장을 보자. 그는 혼자라도 간구하였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일수록 혼자 골방에서 은밀히 주님을 만나는 생활을 이어간다. 기도 골방을 가지고 은밀히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이기를 축복한다. 무리로 몰려다닐지라도 기도골방이 없다면 성도라고 하기 에는 솔직히 떨리기 때문이다. 설교본문의 야이로라는 회당장은 많이 기도한 사람이었다(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παρακαλει αυτον πολλα λεγων 파라칼레이 아우톤 폴라 레곤 he beg to him manny 현재형,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 반복을 의미함). 계속 기도하는 경우는 신뢰함이 확실할 때 가능하다. 답답한 일에 기도로 승부를 건 사람들을 성경에 많이 소개해 놓았다. 술에 취한 여인처럼 기도했던 한나, 죽으면 죽으리라고 금식기도 했던 에스더, 예수님도(“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라고 했다.

설교본문 22절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로 존경함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에 회당은 예배당과 학교와 심지어 재판소였다. 그렇다면 회당장 야이로는 대단한 우두머리 지도자였다. 사회적 지위가 높으신 어르신 회당장이 30대 초반의 젊은이 예수 앞에 무릎 꿇고 사정사정하는 것은 좀처럼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 확신함은 어려울 때 혼자서라도 인격적인 행위로, 삶으로 나타나지기 마련인데, 바로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한다. 아멘.

그런데 또 38절에 현실 그 자체를 낙심하여 울며 통곡하고 끝내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럴 때 그리스도인은 기도한다. 비통해서 기도하고, 실패의 현장에서 낙심될 때도 기도한다. 그래서 엄청난 차이, 극과 극의 차이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0절을 보자. ‘그들이 비웃더라’라고 했다. 무엇을? 누구를 비웃었는가? 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떠들며 울고 통곡하는 자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한마디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까 죽었던 소녀가 살아나 일어나서 걸었다(눅 8:55). 할렐루야! 그럴 때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만 하는 사람들(42)이 있었다. 누가 그랬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 천국백성이 아닌 염소들이었다! 이러한 염소들은 지금도 ‘큰 무리’ 속에 섞여 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회당장 야이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신앙교훈을 챙기자.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 아니 죽어버린 딸을 살리는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1) 따르라(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이 말씀은 회당장이 예수님 곁을 얼마나 철저하게 따라다녔는지 그것을 우리에게 가늠하게 해준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인지 교인인지 그것을 구분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인식과 구세주라는 진실한 신앙고백과 지금 절실함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 나아와서, 결국 만나고, 함께해 간다. 모든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지만 그것도 주 예수님 안에서 이루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에 그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24). “예수님, 제 집으로 가서 제 딸을 살려주세요.” “그와 함께 가실새” 회당장은 드디어 자신의 소원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소망실현 중이었다. 그런데 그럴 때 문제가 생겼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7)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데 한 여인이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치료를 받았다.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회당장의 편에서 보면 답답한 일이었다. 왜 그런가? 회당장은 한 걸음이 아쉬운 때였다. 시간을 지연시키면 그것은 곧 방해였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시간지체를 허용하셨는가? 그것은 회당장의 참 믿음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했다. 여러분, 내 문제가 급한데 가만히 보니까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은 기도응답을 곧장 받는다. 그런데 나만 응답을 못 받고 있어요. 그런 적이 없었나요? 다른 사람들이 기도응답을 받고 문제해결을 감사할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되던가요? 회당장 야이로는 아버지답게 속마음이 조마조마했을 텐데 불평하지 않고 기다렸네요. 갈 길이 바쁜데도! 성깔부리는 사람은 동행을 때려치우고 토라져서 응답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믿는지를 보신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렇다. 성경은 단 한 번의 기도로 응답된다고 기록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고 현재 명령형으로 말씀하셨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 반복을 의미한다. 여러분, 기적수준의 응답은 기도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자의 것이다. 체험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믿으라(36)

예수님이 큰 무리 속에 섞여서 혈루증 환자를 고쳐주고 있을 때, 회당장은 어서 어서 예수님과 함께 자택으로 가는 게 간절하였다. 그런데 최악의 비극정보를 듣게 되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Ἔτι 아직 ἔτι 에티 반복함. “any more” 더 이상, 소용없음!)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철저한 절망통보였다. 이미 장례식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38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딸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죽었다는 보고였다. 아버지 야이로는 그 말을 듣고 그만 하늘이 노랗게 변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아버지 회당장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비관과 절망, 분노에 빠지기 쉽다. 회당장은 한없이 분통터졌을 텐데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36 μη φοβου μονον πιστευε 메 포부 모논 피스튜에 not/ afraid/ just one/ believe/ 현재명령형, 계속해서 믿어라!) 기가 막힐지라도 계속해서 믿을 때 기적수준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딸도 살아났다! 아멘.

저와 여러분이 건강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또 새벽기도 하며 봉사도 헌금도 했는데 왜 차도는 없고, 더 악화되는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낙심이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회당장 야이로를 기억하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에 더 열심을 내는 게 정답이라는 것이다. 아멘.

3) 잔다(39)

‘죽어있는 것’과 ‘자는 것’의 차이를 아는가? 그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 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 데리고 들어가셨나요?(3 7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부모). 그러면 “다 내보내신 후에”는? 예수님은 비웃는 사람, 낙심하여 우는 사람, 불신하여 통곡하는 사람을 쫓아내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기도했는데 더 어려워지고, 기도했는데 병원에 가야하고, 기도했는데 더 통증이 심하고, 기도했는데 딸이 죽어버렸다. 그럴 수 있다. 그럴 때 낙심하기 전에 주님이 일하실 것을 기다릴 줄 알아야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다. 아멘. 인터넷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아내가 애를 보라고 해서 열심히 애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아내에게 혼났다. 빨래를 개주라고 해서 개한테 빨래를 던졌다가 또 혼났다. 세탁기를 돌리라고 해서 있는 양손으로 세탁기를 돌렸는데 역시 혼났다. 커튼 좀 치라고 해서 막대기로 톡톡 쳤더니 “당신, 왜 이래?”라고 하면서 바보 됐다. 그러고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아내가 “문 닫고 나가”라고 해서 문을 닫아놓고 나가보려고 문 앞에 서서 그 방법을 찾고 있다가 침해 의심받았다.” 성경독자들이 글자만 읽고 그 문장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딱 바보인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님으로 믿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인정하고 반영하는 삶이다. 오늘 설교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때 회당장이 예수님의 능력을 시인하고 약속실현을 바라보며 기다릴 때 믿음이다. 홍해 앞에서 길이 있음을 기다렸던 사람이 모세였다. 엘리사는 아람군사들에게 에워싸였을 때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고,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불가능 앞에서 살아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럴 때 믿음이고 기적 수준으로 응답받게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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