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5일 설교
“구원하는 믿음을 보자!” (막 5:25-34 ‘평안으로 회복시키는 믿음’ 20.10.25)
작가 오혜령(1941~) 씨가 쓴 ‘당신은 춤 나는 춤꾼’이라는 시이다. 춤이신 하나님/ 인생은 한바탕 춤입니다/ 신바람 나는 춤입니다/ 가장 솔직한 자아 표현이/ 춤입니다/ 온 존재로 춤을 추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미리 안무해서/ 기억해 내며 추는 춤이 아닙니다/ 그 때 그 때 마다/ 마음으로 추는 춤입니다//
오혜령 씨는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이화여고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24살 때 신춘문예에 희곡 ‘성야’로 등단하여 희곡작가, 연극배우 그리고 라디오 DJ 만능스타로 이름을 날리면서 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 연극대상도 수상하였고, 36살 때 세계 언론인작가대회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자랐고 기독교 학교를 다녔기에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흔히 똑똑한 지식인들이 쉽게 빠지는 ‘내 그물은 내가 채운다’는 자기 과신에 사로잡힌 인생길로 빗나갔다. 그러다가 한창나이인 37살 때 날벼락 같은 ‘위암과 임파선 암’으로 3개월 시한부 사형선고를 받았다. 암세포는 십이지장, 임파선까지 전이되어서 수술도 할 수 없었고, 방사선치료를 한번밖에 못했다. 그는 집에서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했던 일은 오직 하나님께 항의였단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추구해 온 저에게 왜 매를 드십니까?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더 이상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달력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쳤는데, 예정된 죽음의 날짜를 며칠 더 넘겼을 때, 물만 먹어도 토하고 고통스런 혈변을 계속했다. 정신이 몽롱해지더니 누군가 자신의 목덜미를 낚아챈 것 같더니만 방바닥에 나동그라졌는데,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란다. 그러고 하나님을 원망한 게 무서워지면서 지난날 일들이 ‘교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서 눈물로 시인하고 고치기로 다짐했단다. 이렇게 반년 가까이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혼자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에 오한이 덮쳐 왔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왔구나!’ 그는 죽음을 예감했다. 이제는 육체의 암이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암을 치료받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라는 두려운 생각에 가슴을 쳤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너무 추워서 이불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았다. 어깨에 생겼던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고, 복수로 차올랐던 배도 푸욱 꺼져있었고, 가빴던 숨까지 평안해졌다. 너무나 놀라고 감사한 나머지 서원기도를 드렸단다. “덤으로 얻은 인생, 앞으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이처럼 실패나 암병, 죽음문턱도 예수님을 올바로 만나면 불행이 행복으로, 탄식이 춤추는 찬송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흔하다. 오늘 설교본문도 지긋지긋한 고통이 춤으로 변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계셨는데,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와서 자기 딸이 죽게 생겼으니 고쳐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애원대로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데 이름도 직업도 바닥인 여인이 끼어들어 완치를 받았다. 그래서 사경을 헤매던 회당장의 딸은 죽고 말았다. 시간을 지체하였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무능했던 그 여인 때문에, 한 동네의 유지였던 회당장은 딸과 사별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두 사람 다 춤을 추게 하였다고 성경은 밝혀주고 있다.
이 이름 없는 여인의 치료는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현실이기 쉽다. 매스컴은 항상 유명하고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소식을 선호하죠. 그래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특종을 잡아냈다고 자랑한다. 그에 비해 민초들의 비명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농부들은 잘 가꾼 논밭을 갈아엎는 일을 종종 한다.
설교본문의 여인도 철저하게 잡초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피를 쏟는 혈루증이었다. 레위기 15장에는 ‘유출병’이라고 했다(부정한 병으로써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 당시 불치병). 설교본문으로 직접 확인하여 보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토록 얼마나 걸렸는가? 12년 동안. 사람이 해골 같아 희망은 다 조각났고 극심한 우울증에 갇히기에 충분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 현실로 표현하면 서울대 병원, 삼성의료원, 경희대 한방병원, 뜸, 민방... 다 시도해 보았지만 ‘긴병에 효자 없다’는 꼴이 됐다. 이제 철저히 소외당하는 무관심을 오히려 당연시해버린 신세로 짓밟혔다.
그런데 그러한 여인이 한 순간에 완치되었다(①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29> = 병이 뿌리째 없어졌음! ②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34> 이 여인은 육체의 질병과 함께 영혼구원까지 받음 ③ “평안히 가라”<34 오랜 세월 난치병 때문에 마음은 산산조각 났을 것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④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건강, 건전, 건실함으로 전인치료를 받았다는 것임>).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노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놀이터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할아버지, 왜 담배를 계속 피우세요?” “며느리하고 싸우고 나니 속상해서 그런다.” “할아버지, 속상하시면 교회에 다니세요.” “교회가면 답답한 게 풀리느냐? 어느 교회로 나가냐? 언제 가느냐?” 계속 물었다. 소녀는 아는 대로 알려주고 버스를 함께 타고 가자고 약속했다. 주일 오전 약속시간 10분전에 도착했더니 할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기다리고 계셨다. 소녀는 함께 버스를 타고 교회로 가서 장로님께 설명해드렸단다. 할렐루야!
우리 주변에도 속상하지만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영혼들은 많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는지 설교본문을 살펴보면서 정답을 함께 찾아보자.
1) 듣고(27)
설교본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She heard about Jesus, -NIV-)라고 밝혀놓았다(온갖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광풍을 잔잔하게 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임. 그렇다면 성경을 읽거나 쓰기, 설교듣기, 성경공부... 다 해당된다. 중요한 점은 롬 10:17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니라.”(‘의’ 소유격 δια ρηματος χριστου 예수님께 속한 기쁜 소식이었음). 지금 우리 사회는 온갖 소문이 넘쳐난다. 하지만 예수님께 속한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적다. 사도 바울은 밝혀놓았다. 성경이라도 예수님을 듣고 볼 때에 믿음이 생긴다고. 그런데 찬송가 515장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듣기를 어떻게 하는지 냉정하게 점검해보자. 저와 여러분은 믿음이 생기게 듣기를 하는 신앙생활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생각(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이는’ ελεγεν γαρ 엘레겐 가르 말하다 미완료 ‘For she said’-NKJV- ‘saying to himself’ -GN-). 그렇다면 이 여인은 정반대로 중얼거릴 수도 있었다. “가 봐도 소용없어” “내 병은 12년이나 됐고 명의들도 못 고쳤는데...” “치료비도 다 써버렸고, 병은 더 악화 돼버렸잖아!” 잠언 4:23-24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לְזוּת 레주트 perverse 심술궂은, 외고집을 부리는 ‘corrupt talk’ -NIV, ‘misleading words’ –GN-)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후두염에 걸린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와 안수기도를 원했다. 목사님은 안수기도를 드린 후에 새벽기도를 시작하라고 권했더니, 권사님은 말을 하려면 너무 고통이라서 기도를 못하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이 말씀을 새벽기도시간에 쓰라고 했더니, 권사님이 10,000번을 쓸 때 후두염이 치료됐단다. 기도는 꼭 말로만 고함쳐서 하는 게 아니다. 말로 하던 침묵으로 하던 주님과 대화하면서 알아차리며 교제하는 것이다. 그럴 때 놀라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체험하게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행동(27)
처절하게 낙심에 빠질 법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졌다는 것이다. ‘안수 받음’이 아니라 환자가 만지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 당시에 혈루증 환자는 문등병자처럼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예수님을 만지는 행위는 율법과 관습을 훌쩍 뛰어넘어야 가능했다. 그녀는 이미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했음을 말해준다. 왜냐면 성경이 보여주는 기적은 항상 엄청난 장애물들을 넘어야 실현됐다. 그런데 믿음이 그 장애물들을 넘어가게 한다! 그 장애물들은 때로는 사람이고, 재물이며, 직업, 관습, 체면... (31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 예수님과 접촉은 수십 번도 넘게 이루어졌음을 말해줌. 그 중에 믿음으로 하는 접촉은 단 한 번뿐이었고, 그 한 번만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하였다는 것임!). 그래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라고 했다. 아멘.
조선 영조(英祖)때 이재라는 이름난 학자가 있었다. 이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이재가 12살 때 어머니는 아들 이재를 시동생인 당대의 정치가 이만성에게 데리고 가서 인물로 키워달라고 부탁하였다. 며칠 후 이만성은 “조카가 공부를 안 해 매를 들어 때렸는데 그만 숨졌다”라고 비보를 전하였다. 이재의 어머니는 비통해 하면서도 “시아제, 가르치다 그런 걸 어떡하겠소.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만성이 “형수님, 사실은 죽지 않았고 나를 얼마나 신뢰하고 맡겼는지 알아보려고 그랬습니다.” 그 이후로 이만성은 조카 이재를 정도로 가르쳐서 대학자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어떤 각오로 임하였느냐에 따라 열매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혈루증 여인의 각오도 ‘죽으면 죽으리라’ 정도는 되었음이 늘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4) 여쭈니(33)
여인자신이 고침 받은 사실을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거기 있던 군중들에게 밝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고 찾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고침 받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응답간증을 기다리셨다. 간증 후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도 ‘건강’도 추가하셨다고 설교본문은 밝히 보여준다. 바울도 이런 간증을 하였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변화됨!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3:10 믿음의 진보: 커짐, 달라짐, 성숙함, 뜨거워짐, 열정적임...).
어느 집사님은 주일예배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자주 부끄러운 품행을 동네 사람들에게 들키곤 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불러서 부끄러운 품행을 고치라고 설득하였더니, 그 집사님이 변명하기를 “저는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는데요.” 목사님이 그 집사님에게 한 마디 더했다. “집사님, 사람이 꽃밭에 매일매일 머무르면 꽃향기가 배는 법이지요.” 고쳐져야 한다. 아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을 낙심시키는 육신의 문제와 환경의 문제, 응답의 지연문제를 안고 지쳐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완치 받고 춤을 추게 되는 일을 보았다. 그러한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의 복음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입술로 시인하며, 행동하고, 간증 전도할 때 재현된다. 체험하기를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