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8일 설교
“더러운 귀신아!” (막 5:1-10 ‘귀신 삶의 가치’ 2020.10.18.)
어느 의과대학 해부학 강의실의 칠판 옆에는 커다란 인체해부도가 학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걸려있었단다. 거기에는 인체의 주요 골격과 근육의 명칭과 혈관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 해부도를 가지고 강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기말고사 때 교수님은 시험문제를 강의실 칠판에 또박또박 쓰기 시작하였다. “인체의 각 골격과 근육의 명칭을 기록하시오.” 칠판 옆에 항상 걸려있던 인체해부도는 둘둘 감겨져서 강의실 구석에 세워져있었다. 당황한 학생들은 한 번도 강의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항의를 하자 교수님이 심각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시더란다. “인체해부도는 한 학기 동안 내내 칠판 옆에 걸려있었다. 그러니 강의를 안 들었다는 말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시고 사람을 까만 선으로 그려놓은 시험지를 나눠주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시험지를 받았지만 교실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변했다. 간간이 한숨 소리만 들려올 뿐 답을 쓰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한 시간의 시험은 길고 길게 끝났다. 대부분 백지시험지를 교수님이 거두시고 그 자리에서 시험답안지를 찢으시며 한 마디 하셨다. “제자들아, 똑똑히 기억해라. 의학공부는 교수가 알려주는 내용만 배우다가는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사만 그럴까? 영혼을 구해야할 우리 교우들이 성경을 가까이에 두고 수시로 보면서 들을 지라도 실제로는 너무 모르는 것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항상 가까이에 있고, 늘 보고 듣기 때문에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더 배워서 올바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꼭 알아야할 믿음의 이치와 법칙을 모른 채 대충대충 결국 마구잡이로 하나님의 자녀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늘 설교본문도 천국실현을 현실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8).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방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 즉시 그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결박한 쇠사슬을 귀신의 힘으로 끊어버릴 정도로 막강해서 그냥 방치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책망하는 명령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예수님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귀신 무리)가 많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고 차라리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귀신들이 당장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갔는데, 돼지 떼 2천 마리가량이 갈릴리호수에 빠져 몰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그 때도 이 사건의 소문은 순식간에 여러 동네로 퍼져나갔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직접 보니까 어제까지도 무덤 사이에서 미쳐 날뛰던 그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가정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을 증언하라.”라고 강권하셨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가정으로 돌아간 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실을 전파했더니 이 전파를 들은 사람들이 놀래면서 겁을 먹었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의 개요를 좀 길게 설명하였지만,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귀신 병자를 완치하신 일’이었다.
자 그러면 오늘 설교본문은 우리 성경독자들에게 무엇을 깨달으라고 웅변하고 있는가? 저랑 같이 그것을 세 가지 각도로 찾아보고 값진 교훈을 챙기자. 아멘.
1) 귀신들린 사람(2)
귀신들린 사람이 살고 있던 거라사인은 갈릴리 호수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데가볼리’ (δεκαπολει 데카폴레이, 10개의 도시) 지역의 한 마을로써 그 당시에는 이방인이 살고 있던 헬라사회의 동네였다. 거기 거라사인에서 예수님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은 거처를 무덤 사이에 두었는데,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3)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
귀신들린 그 사람은 판단을 올바로 하지 못해 무덤환경에서 살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괴성을 질러대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곤 했으니... 사랑과 화평과 행복의 삶 리듬은 박살나있었을 거고, 이 정도라면 그의 삶은 ‘죽음문화’라고 봐야 한다. 그 내용과 가치상으로 이미 사망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은 왜 그토록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귀신에게 지배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사탄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사람을 ‘선동적’ ‘부정적’ ‘분열적’ ‘파괴적’으로 몰아가서 사망문화를 이룬다. 막강한 힘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파괴하는 쪽으로 악용시킨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도 흔하다. 사람은 똑똑한데 그 똑똑함을 자기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사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일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요즈음 광화문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깝지요.
목후이관(沐猴而冠)이란 말이 있다. 항우는 진(秦)나라의 함양성을 유방에게 넘겨받고, 약탈과 방화로 함양을 폐허로 만들 더니, 자신의 성공을 고향에서도 자랑하고 싶어서 초(楚)나라의 팽성(彭城)으로 수도이전을 서둘렀다. 그런데 함양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가 수도로 삼을 만큼 천혜요지였다. 그런데도 항우는 천도를 고집하자, 신하 한생(韓生)이 충언하였다. “함양은 예부터 천혜요지로 패업(覇業 왕들이 이룬 두드러진 업적)의 땅이었고, 토지도 비옥하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십시오.” 이 충언을 들은 항우가 화를 벌컥 냈다. 그러자 한생이 물러나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이네(沐猴而冠 : 목욕 목, 원숭이 후, 말 이을 이, 벼슬 관).” 이 말뜻을 항우가 옆에 있던 신하 진평에게 물었다. 진평이 대답하였다.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원숭이는 관을 씌어도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뜻과, 원숭이는 인내심이 없어 관을 쓰면 조바심을 낸다는 뜻, 그리고 원숭이는 사람이 아니므로 관을 만지작거리다가 찢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한 항우는 한생을 붙잡아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 죽였다. 한생이 죽기 직전에 말하기를 “나는 충언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러나 두고 보아라. 100일 이내에 한왕(漢王 유방)이 그대를 멸망시키리라. 역시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 같아서 관을 씌워도 소용없구나.” 결국 천도를 강행한 항우는 함양을 한나라 유방에게 빼앗기고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당하여 목숨을 뺏기고 말았다.
思考하고 판단하며 알아차리는 게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의 보혜사에 민감하게 순종하시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주민들의 반응(15)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군대귀신 들렸던 병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14-15) 군대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단정한 차림을 할 만큼 온전히 치료된 사실을, 동네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체험상식을 넘어서는 일이 벌어졌음을 입증해준다. 치료 받은 환자에게는 평생을 두고 복된 일이 분명하였지만, 수많은 돼지를 몰사당한 사람은 엄청난 충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 일을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축복이요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충격이며 분노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17) 그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혔던 돼지사건을 보면서 또다시 그런 손해를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 구세주)로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멀리 피할 때 구세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진짜 축복이요 올바른 은혜를 받은 게 확실하다. 분명한 사실은 불신자들이 천국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라도 천국은 여전히 실존한다는 사실이고, 동네사람들이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군대귀신에게 파괴적인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갔던 그 병자는 해방을 얻고 천국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20) 어떤 사람들이 전도하는가? 마을사람들은 ‘놀랍게' 여길 뿐이었지만, 예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큰 일'을 체험하고 깨달은 환자는 전도하였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몰아넣던 광풍을 잔잔하게 하시더니,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도 해방시키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알아차리게 하신 바가 있다. 그렇다. 예수님의 복음은 영혼을 구원하는 권능이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앉아서 박수만 치는 일로 끝내지 말고 예수님처럼 해방시키는 일에 동참함으로 영광을 제대로 돌리자. 아멘.
3) 예수님의 가치관(13)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라고 말씀하셨더니, 군대귀신이 돼지에게 보내달라(12)라고 ‘간구’하였고 예수님은 그 간구를 허락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허락은 ‘기도응답’이라고 하지 않고 ‘치유’라고 한다. 왜냐면 귀신이 기도를 흉내 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의 이름을 ‘군대’라고 이미 들었다(λεγιων 레기온 당시 6000명 정도 되는 로마 군부대의 명칭. 그 만큼 귀신들이 많고 군대처럼 전투적이라는 뜻). 그렇지만 돼지 떼가 아무리 큰 집단일지라도 귀신들이라면 예수님은 완전히 통제하여 진멸시켜버린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줬다. 그런데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신 14:8) 돼지 떼의 주인이었던 유대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팔아 경제적으로 많은 유익을 챙겼다고 본다. 유대인 자신은 율법을 범하는 악행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그 죄를 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참으로 비양심적인 짓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돼지 떼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환자의 영혼과 그 존엄성은 수많은 돼지 떼의 가치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돼지 떼의 주인에게는 성경말씀을 떠나 부정한 짐승을 길러 재물을 쌓는 삶은 저 돼지 떼처럼 허망하게 멸망당하는 때가 있음을 미리 알리셨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가치관을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만일 이 사건이 우리주변에서 발생한다면 언론들과 동물애호가들, 환경단체가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까? 특종보도를 앞 다투면서 별별 비난을 쏱아내고, 사건의 주모자인 예수를 잡아 구속하라고 항의하고, 그러면 국무총리는 행정명령을 내려서 교회만 주범으로 몰아가도 교회들은 아무 말도 못하는 꼴을 보여주지 않을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천국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좋은 땅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겨자씨처럼 작아 보이지만, 실제 가치로는 엄청난 영광이고 막강한 일임을 본문이 웅변해주고 있다. 설교본문 바로 앞에서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과 똑같은 교훈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예수님께서 광풍 같은 군대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죽게 된 환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아멘.
오늘 설교본문의 핵심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환자처럼 폭력으로, 무력투쟁으로, 핵무기의 보유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천국복음이라야 참된 평화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라고 내쫓는 예수님을 확실히 깨달을 때,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하나님나라를 올바로 실현할 수 있다. “더러운 귀신들아, 교인들에게서 떠나가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