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1일 설교

October 11, 2020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 4:35–41 ‘참 평강을 이루는 믿음’ 2020.10.11.)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들리는 것은 바울이 롬 6:14에서 밝힌 하나님의 그 은혜이다(“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현실은 말씀을 듣고 읽어도 말씀이 들리지 않아 믿음이 생길 수 없는 모습이다(“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고후 4:3-4). 그렇다면 들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씀의 현장을 보면서 그 일에 참여할 바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슨 일이,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 정도를 파악할 때 순종을 실제로 할 수 있게 된다. 성경독자인 우리가 성경현장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일을 빠르게 할수록 은혜에 가깝게 다가선 셈이다. 듣기만 하고 들은 말씀의 현장에 동참하지 않으면 이론가로 남고, 자기합리화에 도취 당한 나머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고집을 부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된다.

   그러면 오늘 설교본문은 어떤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다가 큰 광풍을 만나는 그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37. ‘큰 광풍’(λαιλαψ μεγαλη 라이랖 메갈레 a squall of wind, great. 짧은 시간에 급변한 기온으로 강하게 불어대는 돌풍. “A furious squall came up” -NIV-). 광풍(狂風)은 글자 그대로 미친바람이란 뜻이라서 대개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간다. 시커먼 구름 속에서 천둥벼락을 치고, 모든 것을 마구잡이로 뒤엎는 폭풍과 험한 파도, 쏟아 붓는 장대비를 동반하곤 한다. 제자들이 엉겁결에 쏟아낸 말을 들어보자.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40절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 당시 제자들은 천국에 관한 말씀을 예수님에게 많이 들었고 또 특별히 해석도 들었다. ‘들음’ 자체만 놓고 판단한다면 참여율로나 암기상태로나 다 우수한 셈이었다. 문제는 현실 삶에서 그들의 들음에 대한 암기와 그 생활은 따로따로 하는 제자들이었다. 그럴 때 예수님은 타고 계신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고 예수님은 잠을 깨신 후에, 즉시 광풍을 잔잔하게 제압하시더니 40절처럼 제자들에게 냉정히 믿음 없음을 지적해주셨다.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했던 마가는, 성경독자인 우리가 제발 알아차리길 원했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믿음의 실체였다. 본문을 통하여 마가가 보여주는 믿음을 그대로 지금부터 저랑 같이 살펴보면서 배우고 또 챙기자. 아멘.

   1) 들음의 생활화(38)

   ‘큰 광풍’은 예수교 전문용어로 신앙생활의 ‘시험’인데, 훼방이고 고난을 뜻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로 하면 ‘환란’이요, ‘박해’, ‘재물의 유혹’에 걸려들게 하는 ‘욕심’이다. 그런데 왜 마가는 마가복음 4장에서 4가지 천국비유 끝에 큰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기록하였을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천국을 네 가지 비유로 알아듣게 하신 직후에 그 비유들을 생활화할 수 있는 실제현장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셨던 것이다. 천국실현의 실제를 목격시켜주시는 예수님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실제 믿음은 어떤 모습이었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 하시나이까”(38)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40).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당당하게 이런 대답을 했겠지요. ‘다 들었습니다.’ ‘다 기억하고 있다니까요.’라고. 그런데도 제자들의 들음과 기억은 실제 삶에서 ‘믿음이 없느냐’로 검증되었고, 분명한 것은 ‘좋은 땅’이 아니었음을 성경독자들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들음(읽음, 쓰고, 암기함)들은 어떠한지 솔직하게 점검해보라고 설교본문은 웅변하고 있다. 들음을 금으로 표현한다면 ‘순금’인지? ‘18금’인지? ‘14금’인지? 아니면 금 색깔만 ‘도금’했는지? ... 속 내용과 그 가치가 진실하냐는 것이다. 믿음은 언제 어떻게 입증되는가? 말씀을 들을 때? 들은 말씀을 암기할 때? 들은 말씀을 필사(筆寫)할 때? 그러한 경우보다 고난 속에서 생활화할 때라고 설교본문은 말해준다. 아멘.

   요리로 바꿔 생각해 보자. 요리를 엄마한테 배우든, 친구한테 배우든, 학원에 다니면서 배우든 상관없다. 배워서 요리를 잘하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면, 이제 당당하고 똑똑하며 훌륭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배운 요리기술로 자기식구 밥상만 잘 차리는 것으로 끝내려한다면 그래도 그 요리기술을 당당하고 똑똑하며 훌륭하다고 볼까? 현실은 인색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가는 일을 당하게 된다. 요리기술로 봉사하고 대접하며 섬기는 데까지 활용해 보자.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낙심한 사람이 소망을 갖고, 굶주린 사람이 웃음을 찾을 것이다. 요리의 재능은 가치(value)로 더 빛나고 그럴 때 전도는 덤으로 되는 법이다. 이게 예수님의 제자훈련의 원리였다. 할렐루야!

   지금 저는 요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고 쓰는 것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다. 본문에서 광풍은 믿음다운 믿음을 사용하게 되는 엿새 동안의 기회였다. 찬송가 359장의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 말라.”라는 찬송은 엿새의 믿음생활을 중계해주는 바이다. 어느 젊은 며느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시어머니에게 핍박을 받고, 흔들리는 믿음을 이겨내려고 혼자 방에서 찬송가 342장을 간절히 불렀단다.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이 찬송을 건넌방에서 시어머니가 듣고 치를 떨었단다. 시어미가 야단을 치면 조용히 반성할 일이지 “너 시어미를 당해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칠 거라고?”라고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엿새 중에 큰 광풍이 매몰차게 몰아칠 때 ‘들음’을 행동하는 게 산 믿음이라는 것이다. 아멘.

   2) 예수님을 깨우는 믿음(39)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35-36) 제자들은 순종하며, 임마누엘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큰 광풍에 시달리게 되었는가? 그 답은 38절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이 주무셔버리면 전지전능도 그리스도도 빵점(zero, 0%)으로 존재할 뿐이다. 설교본문은 예수님께서 빵점(zero, 0%)으로 존재하심과 동시에 일시에 큰 광풍을 잔잔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인생의 광풍들을 다스리고 구원하시는 전지전능을 목격시킨다. 아무리 무섭고 두렵게 할지라도 그 미친바람을 예수님께서 단번에 제압하여 구원하셨으니, 이러한 현장을 통하여 예수님이 인생의 모든 해답을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실현은 예수님을 깨우는 게 필요충분조건이다. 바로 이 깨움을 성경은 ‘기도’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위에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사망의 짝꿍 세상걱정(고후 7:10)은 믿음의 암이기 때문이다. 세상걱정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결국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일에 무관심하게 한다. 저와 여러분이라도 주님의 언약을 믿고 문제의 아픔을 하나님께 내놓고 신앙관대로 기도하면서 생명길을 가자. 그럴 때 믿음의 신비함이 현실로 나타남을 체험하게 된다. 선지자 이사야도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0-22)라고 예언하였다. 노 젓는 배는 자기 힘으로 일을 성취하는 적군이다. 그러면 큰 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직체로 하는 적군이다. 그런데 막강하게 다 막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일상 삶의 큰 광풍도 일시에 잔잔케 하심을 보여주셨다. 시 34:18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라는 말씀이 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에 가톨릭 지도자들이 종교개혁을 뒤엎으려고 온갖 무력으로 협박할 때 루터는 이런 기록을 남겨놓았다. “사탄은 분노로 치닫고 있다. 경건하지 않은 수도자들은 공모에 응하고 있으니..... 우리는 전쟁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기도로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자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당하고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나 투쟁기간 동안에도 하루에 3시간 정도씩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책을 써서 종교개혁을 진행했단다. 우리도 기도응답을 체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해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3) 깨닫는 믿음(41)

   제자들은 능숙한 어부였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들은 광풍에 대한 상당한 대처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위기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당연히 애를 썼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들의 처지는 죽음 직전으로 몰려서 잔뜩 두려움에 빠졌다. 38절은 제자들의 최후수단처럼 보인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이치를 잘 깨닫자. 예수님께서 그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 예수님을 주무시게 믿음생활 하는 것! 그게 바로 ‘믿음 없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 직전을 천국으로 바꾸셨던 방법은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꾸짖고’(επιτιμaw 에피티마오 귀신책망,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또 호수에게 명령하심(‘고요하라’ φιμοω 피마오 muzzle, speechless, to be silent. ‘재갈 물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아멘.

   그런데 제자들은 그 평안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41).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의심과 혼동을 입증해준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수없이 보아왔고 또 배 안에서 보았지만, 그 예수님을 구주로 신뢰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암기하지 말고 ‘깨닫는다’는 게 이토록 어렵고 오래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전재 하신다. 그 하나님과 어떻게 도움관계를 맺느냐가 숙제이다. 하나님을 내편으로 만들어 열 달란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권능과 은사와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며 살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고전 13장)이니, 나를 통해 이웃에게 기쁨 되고, 나 때문에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시다고 고백하는 일이 생길 때 전도는 저절로 된다. 이런 믿음생활을 진행하는 저와 여러분이면 좋겠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를 들은 성도답게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의 푯대를 새롭게 조정해 놓자. 게티스버그 전투의 결정적인 전야에 링컨은 매우 침착했고 자신만만하였다. 물론 그런 모습은 장교들에게 큰 격려였다. 그래서 장교들이 링컨에게 물었다.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해 기로의 시간인데, 어떻게 이처럼 평온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까?” 링컨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국가의 장래를 맡겼소. 그분은 국가가 보전되리라는 것과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내게 주셨소.” 사도 바울이 강조하였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 로라.”(고후 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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