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6일 설교

September 6, 2020

                              “원하시는 삶인가?” (막 3 : 13 – 19 ‘12사도를 세우시는 예수님’ 2020.9.6)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경–407)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황금의 입술’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중요한 신학자이기도 하였단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에게 박해를 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크리소스톰이 로마 황제에게 체포되었을 때, 황제는 어떻게 처리할 것을 보좌관들과 의논하느라고 황제가 물었다. “그를 지하감옥에 감금시킬까?” 곧바로 보좌관이 대답하기를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오히려 지하감옥에 갇힌 것을 반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찬양하려고 지하감옥 같이 고요한 곳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처형시키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안 됩니다. 그는 즐겁게 죽으려 할 것입니다. 그는 늘 주장하기를 자기는 순교자로서 천국입성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처리할 방법을 말해보시오.” “크리소스톰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를 부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빼놓고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이라고 할 만큼 오래 전에 스코틀랜드 어느 조그만 마을에 있는 교회가 기도로 준비하고 한 주간 동안 부흥집회를 열었단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한 주간 끝까지 집회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사님은 예수님께 헌신할 일꾼을 시간마다 물어도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부흥회 마지막 날 목사님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꼬마소년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물론 목사님은 예수님께 헌신할 사람이 겨우 꼬마 한 명뿐이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교인들 앞에서 목사님께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단다. “오! 하나님, 제 일생을 주님께 바칩니다. 저에게 아프리카를 맡겨주십시오.” 그 순간 온 예배당이 조용해졌다. 그 꼬마 소년이 바로 ‘리빙스턴’(Livingstone, David 1813~1873. 영국의 선교사, 탐험가)이었단다.

   오늘 설교본문도 예수님께서 아주 특별한 일꾼 열두 명을 선발하여 조직하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13-14절에 보면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세우셨으니’(πoιεω 포이에오 to create, make, do). 그런데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눅 6:12-13, 17.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οχλος πολυς μαθητων αυτου 오클로스 폴뤼스 마쎄톤 아우투 ‘A large crowd of His disciples’-NKJV- 많은 무리의 제자들이 있었음! 그래서 철야기도 하셨고! 굉장히 신중하게 선발하셨음을 보게 함.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하게 되기 때문).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다.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 종교적 열심 때문에 빗나간 교인들이 예수님 곁으로 몰려들었다.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필요한 치료와, 가르침과, 구원을 선포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도 예수님 곁에서 시비하고 대적하며 고발하려고 감시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이름을 대부분 밝히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핸드폰을 갖고 있었다면 그 주소록에서 그들의 이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애써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자신의 필요만 채우면 예수님과 관계유지를 끝내고 지나간 나그네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핸드폰에 기록될 사람들이 있었다. 처지가 불쌍해서 예수님께서 도와주셨던 사람들, 예수님이 친구처럼 지내왔던 세리와 죄인들, 예수님과 계속 관계를 맺고 예수님의 뜻에 의기투합하여 예수님과 동지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또 예수님의 핸드폰 ‘즐겨찾기’에 기록할 이름이 있었다.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이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의 장단점을 다 파악하시고 끝까지 함께 살면서 자신을 닮은 신앙인격자로 다듬어 쓰시는 일꾼들이다. 이 일꾼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가는 일을 소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실수를 하여도 자르지 않고 결국 자신의 속마음까지 다 보여주시고 예수님의 생각과 계획과 가치관에 녹아든 삶을 살아가게 하셨다. 그들은 일생 동안 어떤 처지에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뜻을 실현하고 예수님께서 칭송을 받으시게 한다(“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전 12:11).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핸드폰 즐겨찾기에 기록될 수밖에 없지요.

   한 전도자가 지나치게 우상숭배 하는 마을에서 전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욕을 해대고 소금을 뿌렸다. 그러나 전도자는 웃는 얼굴로 그들을 축복하였다. 전도를 마치자 한 나그네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전도자님, 그렇게 욕을 하고 야유를 해대는데 화를 내기는커녕 그들을 위해 축복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요. 내 처지가 그러니 어쩌겠소? 내 분노는 허약해서 저들에게 성을 내나마나 하고, 마침 내게 남아있는 용서들을 저들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었소.” 이러한 전도자는 우리 예수님의 핸드폰 즐겨찾기에 기록된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설교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열두 사도의 선발을 살펴보고 필요한 교훈을 챙기자.

   1) 나아온지라(13)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사도로 부르셨다고 했다. 예수님의 일꾼은 자기가 찾아가서 지원하여 되는 게 아니다. 그 당시에 랍비학교는 학생들 본인이 원하는 랍비(선생)를 먼저 찾아가면 선생이 받아주었다. 결국 학생들이 스승을 골랐다. 사울도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을 찾아가니까 그의 문하생으로 받아주었다. 지금 입시제도도 마찬가지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것이 굉장한 의미를 갖는 차이점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를 부르시고 세우심은 예수님의 절대주권이다. 그래서 주의 종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골라잡는 게 아니라, 먼저 예수님이 부르시면 종이 응답하는 것이다. ‘부르시니’(13) ‘나아온지라’(13) ‘세우셨다’(14, 16). 이 세 동사는 인격적인 결단을 제자들이 할 수 있었고 예수님은 존중했음을 보게 한다. 예수님은 자기마음에 드는 이를 지명하여 조직할 권세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부름에 응답하여 ‘나아온’ 자들을 사도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절대주권 속에서 자원하는 제자를 원하신다(“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벧전 5:2-4).

   공자가 하급관리로 살아가는 조카 공멸에게 물어봤단다. “네가 관리로 살면서 얻은 게 무엇이냐?” 공멸이 대답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만 잃었습니다. 첫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못 했고, 둘째는 월급이 적어 친지접대를 못 했으며, 셋째는 공무에 쫓겨서 친구와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공멸과 같은 관리로 있던 제자 복자천에게 공자는 똑같이 물어봤단다. 복자천이 대답했다. “제가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는 스승님께 배운 것을 실천해보게 되어 배운 내용이 더욱 확실해졌고, 둘째는 월급을 아껴 친지를 접대하니 더욱 친숙해졌고, 세 번째는 공무의 여가 때 동료들과 교제하니 우정이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같은 처지를 살았지만 공멸은 짜증 속에 고달프게 살아갔고, 복자천은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갔다. 그 이유는 다른 관점 때문이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2-4. 참 은혜는 순종하고 충성하는 신앙관을 만들어줌).

   2) 함께(14)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ἵνα ὦσιν μετα αυτου 히나 오신 메타 아우투 ‘that they might be with Him’-NKJV- ‘공재’<共在 동고동락>인데 ‘친교’<κοινωνια 코이노니아>, ‘배움’<διδαχη 디다케>, ‘실천’<πραξις 프락시스>이 생기는 삶). 예수님과 함께 있음은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의 하시는 판단과 그 일처리를 보고 예수님이 하시려는 그 의도와 원칙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이유, 전도하시는 방법, 병자들을 고치시는 원리, 그리고 소통하는 비결을 보고 알아차리게 된다(“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성실하시다>). 바로 이 ‘함께 함’을 대충으로 끝내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니, 응답이니... 합리화시키곤 한다.

   ‘동참’은 사도훈련의 기본이요 필요충분조건이다. 가룟 유다 대신 사도 한 명을 보충할 때 선발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딱 한 가지,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항상 12사도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서 뽑는 것이었다(행 1:21-22). 그만큼 동참이 막중하다. 지식이나 재산, 나이... 그런 것은 따지지 않았다. 이 사도선발원리를 따르면, 오늘날도 예배출석과 기도회 참석이 기본이고 합격선이다. 11명의 사도들도 중간에 실수하고 서로 다투고 1등자리를 욕심 부리고 하였지만, 마가의 다락방까지 100% 개근하고, 모두 훌륭한 사도로 충성하였다.

   한 불자신도가 싱글벙글 웃으며 여러 스님들에게 수수께끼 문제를 하나 내었다. “저희 동네에 솥이 하나 있는데 그 솥에다 떡을 찌면 세 명이 먹기에는 모자라지만 열 명이 먹으면 남습니다. 왜 그럴까?” 스님들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대답 대신 ‘관세음보살!’ 하자 답을 말해주었다. “서로 다투면 모자라고, 양보하면 남지요.” ‘십자가의 도’를 불자들도 암기하고 있다. 암기를 넘어 깨우침은 ‘예수님과 함께’를 온전히 할 때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싶은 간절함이 없고, 예배의 사모함이 없다면 암기믿음이라는 것이다. 아멘.

    3) 보내사(14)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활용하는 삶인데, 사도훈련의 최종목적이다. 복음전도가 이 세상을 고치고 변화시킨다. ‘기도 많이 하는 것, 예배시간에 은혜 받고 예수님 닮아가는 것, 성경 읽고 쓰는 것...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고수가 되었는데도 스승을 떠나 하산하지 않는다면 고수의 가치는 작아진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보냄의 파송을 올바로 할 때 우리 예수님의 언약성취와 임마누엘하심은 무한대임!)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우리 자신을 사로잡아 지적하신 말씀을 다시 챙기자. 12사도 조직(자원반응! 동고동락! 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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