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3일 설교
“누구를 위한 안식일인가?” (막 2:23-28 ‘올바른 안삭일 인식’) 20.8.23.
뱀 같이 지헤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믿음생활을 해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요즘 실감하고 있는데 특히 오늘은 더 그렇다. 19세기에 독일에서 세기적인 두 인물이 14살 차이로 태어났는데 인생은 정반대로 살아갔다. 한 사람은 사생아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14살 때 아버지와 사별하였다. 그는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방황하다가 화가를 결심하고 미술학교에 지원하였으나 18살 19살 때 두 번이나 낙방하고 그해 어머니마저 유방암으로 돌아가셔서 화가의 꿈도 포기하였다. 하지만 그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하였지만 독일이 패전국이었다. 당시 독일의 민간은행과 증권시장, 독일신문도 모두 절반이 유태인 소유였다. 한마디로 독일경제와 언론을 유태인이 좌지우지하였다. 그래서 독일의 패전을 유태인 탓으로 돌리는 풍조가 팽배했다. 종전 직후 독일경제를 재건하는데 독일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유대인들은 돕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독일민족지상주의와 반가톨릭교회주의, 반유대주의로 기울어져서 ‘독일노동당’이라는 우익정당에 가입하였다. 이 정당은 열렬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동시에 반민주(反民主), 반자본(反資本), 반공산(反共産), 반유대를 표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중에 독일의 독재자가 되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하였다. 그러고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29일 자신에게 헌신적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였고 40시간 후에 자신의 유서를 남기고 벙커에서 음독자살함으로 자신의 일생을 마쳤다. 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4.2.-1945.4.30.)였다.
또 한 사람은 목회자의 가정에서 믿음으로 자란 후에 신학자, 목사, 교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의사로서 박사학위를 3개나 취득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신문을 통해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결단을 내린 후에,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전 재산을 정리하여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에 건너가 50년 동안 선교와 의료활동으로 위대한 인류의 등불로 살았다. 그는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65년 90세의 일생을 마쳤을 때 전 세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자로 칭송 받는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였다.
이 세상 사람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어허!’ 하고 탄식을 토하게 하는 사람과, 반대로 ‘와!’ 하고 감격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리고 별로 감탄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탄식과 감격을 잘 대비시켜주고 있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3).
‘못할 일’(ὃ ου κ εξε σ τιν 호 우크 엨세스틴, 율법과 합법하지 않은 행위. lawful.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는 규정과,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출 34:21 안식일에는 파종이나 추수도 금지된 노동이었음>에 위법이라 함.). 그래서 제자들이 손으로 이삭을 따서 비비는 추수를 하였다(눅 6:1)고 바리새인들이 꼬투리를 잡고, ‘보시오’(ιδε 이데)라고 흥분하며 예수님께 거칠게 항의했다. 그 이유는 잘못한 집단의 대표자에게 책임을 묻던 관습대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 범법사실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아, 법적 책임이 예수님께 있음을 확인하며 강하게 추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모세율법을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안식일 노동금지 규칙을 39가지나 규정하였다(곡식을 까불지 말 것, 반죽하지 말 것, 털 깍지 말 것, 바늘로 두 번 깁지 말 것, 두 글자를 쓰지 말 것, 불을 켜거나 끄지 말 것...).
그러면 안식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2-3. 여기 모든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심.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복을 하셨음). 이것은 성경이 밝히 보여주는 안식일의 기원이고, 또 안식일의 제정자는 하나님이심이다. 그뿐 아니라 출애굽기 20장 8-11절에도, 십계명 중에 제4계명을 안식일의 계명으로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또한 출 31:12-17과 신 5:12-15에 안식일의 계명을 또 다시 반복하는데 그 역시 하나님이 하셨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 틀림없다. 안식일을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안식일의 계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니,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의심하는 일은 바리새인들도 전혀 없었다.
문제는 설교본문의 예수님처럼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완강하게 부인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예수님은 중죄인이냐 안식일의 주인이냐? 갈림길에 섰다!
예수님의 설명을 들어보자.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얻어먹은 진설병에 대한 말씀은 삼상 21:1-6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윗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이라도 먹고 목숨을 유지하려고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로 속이고 다윗자신과 부하들이 먹었다. 이것은 해당한 율법 자체를 어긴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하시지 않았다. 며칠을 굶주린 다윗이 목숨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거룩한 떡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은 그 제정의미와 정신이 살아있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렇다면 설교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 삶을 위한 가르침을 챙기자.
1) 안식하는 안식일(23).
예수님은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눅 4:16) 하였다. 그렇다면 본문도 예수님이 회당으로 가시거나, 아니면 회당에서 나오시던 중에 생긴 일인데,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앞서 가면서 길을 열었는데(ποιεω 포이에오 to make, do), 제자들은 시장한데다 마침 밀밭 사이라서 손으로 밀 이삭을 잘라 비벼서 먹었다(‘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지나가실새’(π α ρ α π ο ρ ευ ο μα ι 파라포류오마이 to pass along)라는 말은 그저 통과함을 의미함으로 예수님의 목적지는 따로 있었음을 말해준다. 어딘가? 회당도, 밀 이삭 추수도 아니고 안식이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신 23:25) 이와 같이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손으로 그 이삭을 딸 수 있다고 모세는 설교하였다. 이건 하나님의 이웃구제(신 24:19-22). 그러나 낫으로 곡식을 베면 도둑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예외규정은 없다. 먹을 것을 굶주린 나그네는 비록 안식일에도 남의 밭에 들어가서 그 이삭을 손으로 좀 따먹어도 하나님 앞에 범죄는 아니었다. 설교본문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잇길로 지나 안식하러 가면서 손으로 밀 이삭을 따 비벼 먹었지 낫으로 베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식이라는 한자를 보면, 편안할 안(安)자와, 쉴 식(息)자인데, 식(息)자는 숨쉴 식(息)자도 된다. 그렇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호흡을 하면서 쉬라는 것이지 숨도 못 쉬고 뭘 지키라는 것은 아니다. 아멘.
2) 예수님의 깨우침(25-26).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에 교인이라면 대부분 찬성한다. 그러면 주일은 어떻게 지킬 때 거룩한가? 태초에 하나님이 6일 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시면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1:28>)하여 거룩하게(קדשׁ 카데쉬 구별, 성결, 봉헌)하셨고 안식하셨다.”(창 2:3)라고 하셨다. 그러면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육체의 노동을 중지하고 편안히 하루 동안 쉬는 게 전부이고 핵심인가? 아니다. ‘심히 좋았더라’(창 1:31 확인 + 만족 = 감격! 감동! 감사!)를 ‘하는 날’이 안식일이요. 누리는 안식일이다. 지키는 날이 아니다. 아멘.
찬송가 43장 1절의 가사처럼 “즐겁게 안식할 날”(O day of rest and gladness, O day of joy and light. ‘할 날’이 아니라 안식과 즐거움, 기쁨, 밝고 홀가분함.... 이러한 소유함 자체 때문에 감격함)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이다. 이 이치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7)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위하는 안식일이 아니라 규칙과 형식에 끌려가는 안식일이었다. 안식이 없는 안식일을 지켜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의도와 너무나 빗나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아멘.
3) 바리새인들의 시비(24).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였다고 시비를 걸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면 ‘못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정해놓은 규칙대로 하면 ‘못할 일’이 분명했다. 결국 죄를 만들어 씌운 셈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확하게 책망하셨다(3:4).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마 15:6),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4).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하기도 하였다. 전통은 습관을 그리고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전통은 인위적이었고 순종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착각이고 고집불통을 순종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지금도 ‘보수신앙’이란 이름으로 존재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에 입학했더니 친구들이 그를 왕따 시키고 세 가지 별명으로 놀렸다. “촌놈! 가난뱅이! 땅딸보!” 나폴레옹은 너무 괴로워서 학교를 포기하겠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가 보낸 답장내용이었다. “내 아들 나폴레옹아! 비굴해지지 말거라. 좋은 환경에서 영웅이 탄생한 적이 없다. 네게 무서운 적이 있구나. 바로 허영과 사치이다. 가장 귀한 친구는 독서이다. 책을 읽어라. 나는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 너를 믿는다. 내가 함께 하마.” 나폴레옹은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장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설교 중에 주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확실히 들어야 한다. “은혜로 교우들아! 용기를 내라. 나와 함께 하면 멀리 어디든 갈 수 있다. 어떠한 홍해라도 길이 있고, 어떤 방해에도 해답이 있으며, 그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할지라도 안식을 멈추지 못한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 신앙고백이 살아있으면 좁은 생명길을 다 갈 수 있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본문의 핵심에 정통하게 저와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맞춰놓고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을 기다리자. 설교본문은 올바른 안식일 신앙삶이다. 안식이 있는 안식일! 안식하는 안식일! 생명을 하는 안식일!